<-- 67 회: 3-10 -->
섣불리 최향과 척을 지었다가는 정차의 일이 크게 우려되는 까닭에 중랑장 이상평은 다시금 최충헌의 영임을 입에 올렸다.
“참지정사 어른. 이는 상국 어른의 영이십니다.”
“그 입. 닥치라. 내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최향은 입을 찢어져라 크게 벌리며 고성을 질렀다.
벌린 입에서 침이 마구 튀었다.
이상평을 아래로 보는, 우월한 지위에 있는 자 특유의 오만함이 진하게 풍기는 최향.
이상평은 최향의 난데없는 고성에 크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턱.
놀라기는 최향의 최측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장군 최준문,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
그들은 중랑장 이상평에게 고성을 지른 후 우로 비켜서는 최향을 보았다.
다들 어떻게 돌아가는지 예의주시했다.
최향이 성난 것 같아 내심 조마조마했다. 행여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내심 꺼렸다.
최향은 솟을 대문 너머에 있는, 가장 높다란 기와지붕이 얹어져 있는 한 전각, 교정도감을 왼손 검지로 가리켰다.
“나는 저기 계신 아버님의 부름을 받고 왔다.”
소리쳐 말하며 이상평을 노려보았다.
성난 눈초리였다.
최향은 꺼림이 없는 듯 크게 외쳤다.
“나와 함께 온 이들은 능히 교정도감에 들고도 남을 자격을 갖춘 이들이다. 다들 조정의 현신賢臣들 이거늘. 네놈이 감히 아버님을 지근에서 모시는 것을 기화로 감히 날 능멸하려 해.”
최향은 동행한 이들을 교정도감에 들이기 위해, 자신의 권위가 중랑장 이상평에게 통하는지 내심 알고자 하였다.
그런 이유로 억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평을 몰아세웠다.
주어진 기회를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줄 아는 노련한 권력 추종자 최향.
이상평은 그런 최향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차, 참지정사.”
이상평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최향의 최측근들은 심중 고소를 머금었다.
‘크큭.’
‘하하하하.’
다들 이상평이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여기며 자신들을 들여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상평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주위에 서 있는 두 별장과 산원들은 이상평을 바라보며, 다들 안쓰러운 기색을 띠었다.
상관인 중랑장 이상평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곧 이상평이 내릴 명.
최향과 측근들의 통과시키라 말할 것이다. 그 명을 심중 다 이해했다.
자신들이 이상평이라고 해도 어쩌지 못하는 상대가 바로 최향이 아니던가?
당금 고려에서 누가 감히 최향에게 각을 세우며 맞설 수 있단 말인가?
최충헌의 장자 최우마저도 최향에게는 늘 한 수 양보 하거늘.
‘중랑장.’
이상평의 측근 수하들.
두 별장과 산원들은 이상평에 대한 애석함에 얼굴빛을 흐렸다.
심중 최향에 대한 반감이 일었지만 그 반감을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목숨이 여벌로 두서너 개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최향의 호위장 권호렴이 조심스레 나섰다.
“참지정사 어른.”
신중이라는 감정이 밴 목소리였다.
최향은 흠칫거리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감하니 권호렴을 쳐다보는 시선에서 의아함이란 감정이 묻어났다.
권호렴은 왼손에 쥔 검을 가슴으로 들며 가로로 눕혔다.
그와 함께 오른손을 들어, 검을 쥔 왼손에 갖다 대며 최향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수하된 자는 섬기는 분의 영을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하는 것이 본분입니다. 부디 너그러이 살펴주십시오.”
권호렴의 목소리에서 무사의 기개가 엿보였다.
이상평처럼 그 자신도 최향을 섬기는 터라, 곤경에 처한 이상평의 모습이 딱해 보여 조심스레 나섰다.
심중 최향이 아량을 베풀 것이라 여겼다.
그리 하면 최향의 평판이 한결 높아질 것이고, 사람들이 지금의 일을 듣는다면 다들 최향에게 호의를 느낄 것이다.
권호렴은 내심 그런 판단을 내렸다.
최향은 의구심이란 감정을 얼굴에 띠며 호위장 권호렴을 유심히 보았다.
‘혹?’
권호렴과 이상평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수하 권호렴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말하고 나설 이가 아닌데.
대체 왜 나서서 이상평을 감싸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최향은 깊은 의문과 언짢음을 느꼈다.
권호렴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호위장이라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권호렴이 이상평을 돕고자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마음속에서 일종의 강한 반감이라고 할 수 있는 역정이 일었다.
‘이 놈이.’
권호렴이 나섬으로서 자신의 권위와 위신이 실추된 듯한 느낌이다.
이상평의 입에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장의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어서 드시지요.’ 그런 말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권호렴이 나섬으로서 산통이 죄다 깨져버렸다. 그 때문에 최향의 심중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권호렴은 머리를 들어 이상평을 보았다.
“이 중랑장은 상국 어른을 모신지 햇수로 칠년이 됩니다. 감히 상국 어른의 명을 빙자하여 일을 만들 사람이 아니오니 부디 혜량해 주십시오.”
최향은 권호렴의 말에 험상스런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네, 감히.”
성난 얼굴이었다.
지켜보는 이목이 꽤 많다.
한데, 수하 중의 수하인 호위장 권호렴이 자신을 망신주려 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들어 심중 화가 났다.
“…….”
권호렴은 매우 당황해 말을 잊었다.
최향이 화내고 있었다.
최측근에서 모셔 최향을 잘 안다 내심 자부한다. 자신이 나서며 최향이 너그러이 이번 일을 넘길 것이라, 껄껄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마무리 지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최향의 반응이 예상 밖이라, 심중 당황이라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권호렴은 한 가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권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제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이라고 해도 결코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달리 역린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권호렴은 자신이 최향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 서 있는 이들 모두 권호렴과 별반 다르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분위기인지, 다들 갈피를 잡지 못해 은연중에 우왕좌왕했다.
바로 그 순간.
“거기 서 있는 것이 아우님 아니신가?”
최향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움찔거리며 뒤돌아보았다.
뚜벅뚜벅.
최우였다.
뒤로 서윤, 서풍 형제와 이민호 그리고 최양백이 이끄는 여남은 명의 가병이 걸어왔다.
정색하듯 최향의 얼굴이 급변했다.
“형님.”
최향은 최우를 향해 돌아서며 반색했다.
크게 반기는 모습이었다. 서둘러 걸어오는 형 최우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애 깊은 형제라, 주변에 선 이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허무맹랑한 광경이라 할 말을 잊었다.
4 장
수십여 평에 이르는 교정도감 내부에 있는 길이가 몇 척 尺은 넘을 널따란 탁자에 수십여 명의 문신과 무신이 앉아 있었다.
죄다 조정 문무 대소 신료들이다.
사실상 최충헌과 함께 현 고려를 이끄는 이들이라, 분위기는 매우 근엄하고 경직되었다.
미닫이문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좌측에는 검을 허리에 찬 다수의 중급 무장이 일렬횡대로 서 있었다.
정 6품의 무관 낭장郎將들.
낭장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우측에 있는 벽에도 낭장들이 나란히 서 있어, 은연중에 묵직한 그 무엇이 신료들을 압박했다.
그와 같은 낭장들의 시립은 일종의 심리전이나 심리 전술 같았다.
그도 아니면 단상에 앉은 최충헌이나 교정도감을 돋보이게 하여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일지도.
탁자 정면에 있는 대여섯 개의 계단 위에 있는 제법 높다란 단상.
최충헌은 비단 보료에 오연히 앉아, 탁자에 둘러앉은 신료들을 굽어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왕과 같아, 자연스레 권위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만연히 일었다.
“추밀원주.”
최충헌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탁자 좌측 세 번째에 앉아 있는 마흔 후반의 한 사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속하게 일처리를 할 것 같은 날렵한 외모의 중년인.
추밀원주樞密院主 나경필.
왕명의 출납과 군사 기밀 및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는 추밀원의 수장인 나경필은 최충헌을 향해 돌아서며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집권자에 대해 예를 표하는 행동이었다.
나경필은 자세를 바로하며 탁자에 앉은 신료들을 둘러보았다.
다음, 자신의 앉았던 탁자 앞에 놓인 두루마리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나경필은 완만한 동작으로 두루마리를 들어 펼쳤다.
“양광도 절도사節度使가 보내온 급보입니다.”
현종 때 안무사로 호칭이 바뀐 지방 장관 절도사는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 격이다.
나경필의 말에 앉아 있는 문무 대소 신료들은 흠칫했다.
‘급보?’
‘어떤 급보이기에 이리 조정 문무 대소 신료들을 모두 도감으로 불러들인단 말인가?’
‘설마?’
‘또 다시 피란 말인가?’
신료들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최충헌이 집권하며 그간 숱한 변란이 있었다.
천민, 승려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이들이 최충헌의 집권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최충헌은 운이 좋게도 일련의 모든 변란을 무력으로 강경 진압하며 변란이 있을 때마다 굳건히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왔다.
나경필은 두루마리를 힐긋거리며 일련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왜구의 대규모 준동.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신료들은 모두 동일한 수순을 밟았다.
놀람, 당혹, 분노, 피를 원하는 갈구 등등.
일련의 감정이 신료들의 얼굴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최종 종착점은 분노였다.
나경필은 설명을 끝내고 손에 든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긴급히 군병들을 양광도로 차송하셔야 합니다. 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