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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김씨 가문은 엄청난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빠, 빨리.”
가문을 이끄는 수장인 장자 김일로는 아내와 딸 그리고 첩들을 데리고 다급히 도망치려 하였다.
쉰 어림의 풍성한 몸을 자랑하는 아내 홍 씨는 귀한 패물과 값진 재물을 작은 함에 담기 바빴다.
두 딸은 문밖에 왜구들이 몰려와 있는 상황에 잔뜩 겁먹어 경황이 없었다.
“꺄악.”
연방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나리이! 나리이이!”
세 첩은 김일로에 의지하려 하였다.
언제 쌌는지, 동작 하나는 기가 막혔다. 가슴에 보퉁이를 안고, 세 첩은 김일로를 찾아 집안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종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각기 살길을 찾아 달아났다.
“우아아아.”
“빨리 도망쳐.”
종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뛰었다.
챙, 챙, 챙.
병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울림이 끊이지 않고 허공에서 들렸다.
“으아아악.”
“크악.”
들리는 울림 사이사이로 다수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김일로는 혼자 살고자 집 뒤뜰로 뛰었다.
타다닥.
마누라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고 또 말했으나, 마누라는 값진 것을 챙기느라 경황이 없었다.
두 딸은 어디로 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첩들은 관심 밖이다.
살아남기만 하면 다시 첩을 둘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다.
다른 것은 논외다.
김일로는 뒤뜰에 이르러 여타의 다른 담장보다 낮은 후원에 있는 담을 넘으려 낑낑거렸다.
여의치 않았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아, 뒤뚱거리는 오리처럼 살이 잔뜩 오른 몸으로 담장을 넘기란 매우 요원했다.
“허, 헉.”
김일로는 연거푸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몇몇 땀방울은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마음이 급해서일까?
뜻대로 되지 않아 자연스레 끙끙거렸다.
김일로는 귀에 들리는 비명에 뒤돌아보았다.
“크아악.”
“으아아아아.”
가까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왜구들이 집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김일로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를 어쩌지?”
마음이 더 급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며 서 장자의 말을 새겨들을걸.”
김일로는 서가에서 있었던 지방 호족들의 모임을 생각했다.
그때 서양헌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암담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김일로는 후회하며 황급히 서너 걸음 물러나 섰다.
뚫어져라 담장을 응시하며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아아아.”
김일로는 있는 힘껏 입을 벌리고 기합을 내질렀다.
담장을 향해 죽어라 뛰었다.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며 담장이 가까워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힌 김일로는 담장에 이르러, 혼신의 힘을 다해 훌쩍 담장 위로 뛰며 양손을 내밀었다.
김일로는 담장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담장에 매달렸다.
“끄으으응.”
안간힘을 쓰며 오른발을 담장으로 들었다.
김일로는 한일자에 가까운 자세로 담장에 매달렸다.
담장을 넘으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기에 꼴불견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는 김일로의 모습에 절로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 순간.
쉬이이이이.
무엇인가가 김일로를 향해 날아갔다.
퍼억.
김일로는 등에 박히는 무엇인가가 주는 통증과 아픔에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
고통 때문에, 김일로는 힘없이 매달린 담장에서 떨어졌다.
김일로는 땅에 쓰러지며 다시금 느껴지는 통증에 입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딱 돼지 멱따는 소리였다.
작은 아픔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아픔이라도 되는 양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너무 한심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8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야스하루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큭큭큭.”
집 안에 들어서며 제일 먼저 한 일이 눈에 띄는 사람을 붙잡아 장원의 주인인 김일로의 행방을 묻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김일로가 뜰로 달아났다는 것을 금방 알고는 서둘러 뒤뜰로 향했다.
야스하루는 땅에 쓰러져 비명을 마구 질러 대는 김일로를,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벅.
발을 떼어 천천히 김일로를 향해 걸어갔다.
옥사경.
지형이 우물을 닳아 그런 지명이 붙은 고개를 일단의 왜구가 신속히 지나가고 있었다.
미나토 타치바나를 선두로 300여 명의 료닌은 연일 강행군 중이었다.
목적지인 광주목으로 한시라도 빨리 도착, 점령해야 했다. 그 때문에 주야를 불문하고 뛰었다.
미나토 타치바나는 숨이 턱에 차올라 연방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학, 하악.”
말을 탈 수도 있었지만, 행여 말 울음소리로 인해 이동이 들킬까 저어했다.
대동한 300여 명의 료닌 중 말을 탈 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왜에서 말은 번주나 번주의 최측근 가신들만이 탈 수 있는 일종의 전용물이다.
그런 이유로 기마술을 하는 자가 매우 희귀하다.
타치바나는 대동한 료닌들과 함께 뛰어, 자신 역시 똑같은 고생을 한다는 것을 료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 사기를 올리고, 단결시켜 일사불란한 체계를 세우려 했다.
타다다다닥.
타치바나와 300여 명의 료닌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최대한 빨리 광주목으로 이동하여 공격하려 하였다.
그런 이유로 자신들을 감추기 위해서 일절 불을 피우지 않았다.
불빛과 연기 그리고 냄새로 자신들이 드러날까 봐 몹시 꺼렸다.
함께 이동 중인 료닌들 중 몇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타치바나가 료닌들과 똑같이 이동 중임을 피력하자, 입을 다물었다.
불만은 곧 수그러들었다.
의도한 바가 성공적이라 타치바나의 얼굴빛은 무척 밝았다.
“후, 후욱.”
타치바나는 어두침침한 외진 길을 뛰며 주군 다카요시가 내린 명을 생각했다.
-타치바나, 최대한 빨리 광주목을 점령하고 공격해 올 고려군을 맞을 채비를 해라. 네가 광주목을 점하고 고려군을 상대하는 동안, 우린 광주목 뒤쪽에 있는 모든 지역을 훑으며 번으로 가져갈 각종 물자를 모을 것이다.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하다. 네가 광주목에서 버텨 주는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소중하기 이를 데 없다. 모은 것을 소벌포에 정박한 배로 옮기고, 쓸모 있는 장인들과 계집들을 배에 태울 때까지 최대한 오랫동안 네가 광주목에서 버텨 줘야 한다. 고려군과의 실질적인 전선은 광주목임을 명심해라……. 야스하루가 고려군에게 던진 1차 재물이라면, 대원으로 이동한 이토가 이끄는 10여 척의 배는 2차 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야스하루가 이끄는 200여 명의 료닌은 버린다. 이토는 충주목을 점령하는…… 모든 것은 시간이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시간을 끌며 버티느냐에 따라 이번 출정의 성패가 결정된다. 타치바나, 난 너를 믿고 그와 같은 병략을 세웠다. 부디 날 실망시키지 마라.
타치바나는 몸이 천근만근 같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으득.
마음속으로 굳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기필코.’
생각이 야스하루와 이끄는 200여 명의 료닌에게 미쳤다.
광주목 바로 아래에 있는 충주목으로 향하며, 이동 경로 상에 있는 모든 고을을 죄 약탈할 것이다.
고려군은 무지비한 살육과 약탈을 행하는 야스하루와 200여 명의 료닌에게 정신이 팔릴 것이다.
고려군이 야스하루와 그가 이끄는 200여 명의 료닌들을 공격, 섬멸하는 동안, 자신은 광주목을 점령하여 장기전을 염두에 둔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
야스하루와 200여 명의 료닌은 버리는 사석死石이다.
고려군은 바보가 아니다.
실질적인 전투력이 약하다고는 하나 수적으로 자신들보다 우위에 있다. 그 때문에 최대한 오랫동안 고려 중부 양광도에 머물며, 만족스러운 성과를 위해 무조건 오래 버텨야 한다.
긁어모을 수 있는 한계치까지, 배에 실을 수 있을 만큼, 타이라노 번으로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모든 것을 가져가야 번주 류켄을 크게 만족시킬 수 있다.
도합 1,300여 명.
그 병력으로는 고려군을 장기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다. 알려지기로는 고려의 중앙군은 2군二軍 6위六衛로 이루어져 있다.
2군 6위는 1,000여 명으로 이루어진 령領이란 군사 단위가 기본으로, 총 45령이다.
즉, 총병력이 4만 5,000여 명이 되는 것이다.
각 영의 지휘 체계는 정4품의 장군, 중랑장, 낭장, 별장, 산원, 교위 등으로 이어진다.
한편.
타치바나와 300여 명의 료닌들이 한창 이동 중일 때, 소벌포에서는 우에스기 케이지로가 300여 명의 요시미츠가에 속한 가병을 이끌고 인근 진위군을 비롯한 각 속현을 공격,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케이지로는 약탈한 값진 물건들과 장인 그리고 여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죄다 소벌포로 옮겼다.
소벌포에 정박 중인 20여 척의 배에 물건과 사람들이 차례, 차례 실렸다.
강제로 배에 태워지는 장인과 여자들은 울부짖었다. 그로 인해 포구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케이지로는 잔인하게도 말을 듣지 않거나 협조하지 않는 자들을 본보기로 무자비하게 죽여 공포심을 자아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잔뜩 겁에 질려 어쩔 수 없이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 몇몇 사람은 강제로 시키는 까닭에 약탈한 물건을 배로 옮기는 짐꾼 노릇을 해야 했다.
휘어지는 여강 상류.
해가 져 어둑어둑한 강을 이토가 이끄는 10여 척의 배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쏴아아아.
배가 강물을 가르는 낮은 소리가 울렸다. 배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10여 척의 배는 조용히 강물을 가르며 내륙 깊숙이 스며들 듯 나아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한 쌍의 눈동자.
여강 좌측, 도끼를 서너 번 내리친 듯한 기암절벽에 매달려 있는 두 약초꾼.
그들은 허리에 굵은 동아줄을 매고 절벽에 매달려, 귀하디귀한 석이버섯을 한창 따던 중이었다.
채취가 어려운 만큼 값을 비싸게 쳐주는 석이버섯은 산삼 못지않은 효능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보소, 영감님이오! 저 배 이상하지 않습니꺼?”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약초꾼의 말에 우측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노인이 약초꾼에게 고개를 돌렸다.
둘둘 만 끈으로 머리를 질끈 묶은 노인은 핀잔을 주었다.
“한데 눈을 팔지 말고 버섯이나 따그라. 낼 아침꺼정 향리 나리께 약속한 양을 갖다 안 주면, 고마 태형을 맞는다 아이가?”
노인은 무리하는 중임을 입에 올렸다.
이미 날이 저물어 평소 같으면 따지 않았을 석이버섯이다. 하지만 향리가 내일까지 석이버섯을 관아에 가져오라 엄명을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태형을 맞는다.
향리가 그리 위협했다.
관에 내는 공물 탓에 노인과 중년인은 목숨을 걸고 석이버섯을 채취 중이다.
아차 하다가 한눈을 팔기라도 하면 그 즉시 까마득히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그리되면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하기란 매우 어렵고 어렵다.
그만큼 관에 내는 공물은 양민의 고혈을 쥐어짰다.
서른 초반의 약초꾼 무돌은 노인 양 영감의 말에 힐긋 강을 곁눈질했다.
‘이상한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이 저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어렴풋이 배의 형상이 짐작되었다.
평소 봐 왔던 배와 달랐다.
삐쭉 튀어나온 선두와 길게 뻗은 듯 보이는 선미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심중 의문이 들었다.
“니 지금 뭐하노. 싸게싸게 버섯 안 따나? 얼른 따고 돌아가야 안 하나. 조금만 더 날이 어두워지면 버섯 못 딴다.”
양 영감은 화냈다.
마음이 그만큼 급했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석이버섯을 따, 양을 채운 후 돌아가야 했다. 이렇게 절벽에 매달린 채 질질 시간을 끌 겨를이 없었다.
무돌은 양 영감이 화를 내자, 울컥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다소 높였다.
“보라니께요, 내사 마, 저런 배는 처음 본다 아이요.”
“이놈아가.”
양 영감은 무돌이 자신에게 화내는 것 같아, 역정 냈다.
나이가 어린 놈이 연장자에게 목소리를 높인 것에 눈을 치켜떴다.
무돌은 양 영감을 쳐다보며 고함쳤다.
“아, 보라니께요. 보고 나서 말하시라니께요, 영감님.”
“이!”
양 영감은 성난 표정을 지으며 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순간.
“…….”
양 영감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렸다.
자신이 뭘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속내가 얼굴에 떠올랐다.
양 영감은 눈에 힘주었다.
눈을 부릅뜨며 강을 저만치 스쳐 지나가는 10여 척의 배를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돛이었다.
돛의 높이, 크기, 형태 등 일련의 정보를 눈을 통해 뇌리로 받아들였다.
양 노인의 머리에 한 상념이 번쩍였다.
왜구!
자신이 열일고여덟쯤 되었을 때, 왜구가 쳐들어왔었다. 눈앞에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왜구들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 후 홀로 살아남아, 왜구를 피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골백번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그때의 기억은 절대 잊지 못한다.
‘트, 틀림없어!’
자신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는 왜구의 배!
양 영감은 급히 왼쪽 허리에 매단 둥그스름한 대광주리를 끌렀다.
미련 없이 광주리를 집어 던지고 양손으로 허리를 둘러 묶은 줄을 붙잡았다.
휘, 휙.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양 노인은 절벽 위로 향했다.
“여, 영감님.”
그 광경을 본 무돌이 양 노인을 불렀다.
이해할 수 없다.
무돌의 얼굴에 그런 속내가 떠올랐다.
“영감님, 버섯 안 캐십니까?”
고함쳤다.
양 노인은 정신없이 줄을 당기며 바삐 절벽을 올라갔다.
“영감님, 영감님.”
무돌이 쉴 새 없이 양 영감을 불렀다.
“…….”
양 영감은 대꾸하지 않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다.
‘알려야 혀. 싸게 알려야 하는겨.’
마음이 몹시 급했다.
내륙 깊숙이 왜구가 배를 타고 들어왔다.
보나 마나다.
해안가 어촌을 노략질하다가 별 소득이 없으니, 이젠 내륙 깊이 들어와 사람을 마구 죽이고 노략질을 하려는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이 왜구에 의해 죽을 것이 뻔하다.
양 노인은 사람들에게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관에 속히 가서 말해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 때문에 밧줄을 잡아당기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