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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챙.
각종 병기가 쉼 없이 부딪치는 울림이 메아리쳤다.
“으아악.”
“아악.”
그 뒤를 고통이 밴 비명들이 따랐다.
야스하루는 오른손에 쥔 검을 지면으로 늘어뜨리고 서서, 전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끄는 50여 명의 료닌 야스하루의 관점에서는 료닌, 고려인들 입장에서는 왜구 중 일부인 30여 명이 호족 김씨 가문의 가병들과 교전 중이었다.
다른 20여 명은 월곡 현 곳곳으로 흩어져 한창 노략질 중이다.
맞서 싸우는 가병들 너머로 우람한 기와지붕들이 몇 보였다.
월성 김씨 가문의 장원.
마을에 있는 가옥들이 대부분 초가임을 염두에 둘 때, 척 봐도 약탈할 것이 많은, 신분이 높아 보이는 자의 집 같아 30여 명의 료닌과 함께 급히 이동했다.
한데, 이르자마자 장원의 대문이 열리며 60여 명의 가병이 쏟아져 나왔다.
가병들 대부분은 검을 들었다.
삽시간에 30명의 료닌과 60명의 가병이 맞붙으며 뒤엉켰다.
수적으로 가병들이 우위를 점했다.
야스하루는 입매를 비틀었다.
픽.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교전은 대등했다.
개개인의 무력은 료닌이 가병들을 압도했다. 료닌들은 오랜 전쟁으로 자연스레 집단전을 위한 진형을 형성했다.
반면 가병들은 개개인으로 싸웠다.
일정한 진형을 형성하고 싸우는 료닌들은 수적 열세를 상쇄하며 제각각인 가병들을 맹렬히 공격했다.
가병들이 가진 이점인 수적 우위와 료닌들이 가진 이점인 개인 무력의 우위.
양측은 공히 대등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까, 까앙.
검과 검이, 창과 검이 부딪쳤다.
“やっつけろ.”
“気をつけてね.”
료닌들은 격한 목소리로 상대인 가병들을 가차 없이 죽이라고 고함치며, 침착하게 공격해 오는 가병들을 상대했다.
“죽여라.”
“이놈들. 예가 어디라고.”
가병들은 왜구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고래고래 고함쳤다.
다들 자신만만했다.
비록 섬기는 월성 김씨 가문 대문 바로 앞이지만, 왜구들은 겨우 수십여 명에 불과하다.
갑절로 자신들의 수가 많다. 그러니 질 리가 없다.
밥 먹고 하는 일이 주로 검술을 익히는 것이라, 죄다 검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자부한다.
가병들의 얼굴, 움직임, 공격 등등.
일련의 모든 것에서 자만이란 감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흐읍.”
한 왜구가 검을 들어, 공격하는 한 가병의 검을 막았다.
채앵.
검날과 검날이 부딪치며 짤막한 경쾌성이 일었다.
왜구는 양손으로 잡은 왜검을 목 높이로, 가로로 높이 들었다.
가병은 검을 내리치던 터라 세로였다.
왜구는 쥔 왜검을 밀어 올렸고, 가병을 그대로 힘주어 검을 내리그으려 하였다.
끼이익.
검날과 검날이 서로 엇갈리며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왜구의 우측 옆구리에서 한 자루 창이 불쑥 뻗어 나왔다. 창날은 창졸간에 가병의 배를 깊이 파고들었다.
푹.
가병은 창날이 배를 찌르자 상체를 숙이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왜구는 왼발로 상체를 숙인 가병의 오른 발목을 걷어찼다.
빡.
외마디 울림과 함께 비명을 지르던 가병이 휘청거렸다.
창을 쥔, 가병의 배를 찌른 다른 한 왜구가 날렵하게 창날을 뒤로 뺐다.
그러자 가병의 배에서 선홍빛 선혈이 콸콸 흘러나왔다. 가병은 곧 맨땅으로 꼬꾸라졌다.
“크아악.”
창을 쥔 왜구는 기다렸다는 듯 창을 비스듬히 높이 들더니, 삽시간에 넘어진 가병을 다시 내리 찔렀다.
확인이었다.
가병의 숨이 끊어졌는지 아닌지, 창날이 꼬꾸라진 가병의 목을 깊이 파고들었다.
가병은 몸을 들썩이며 사지를 이리저리 떨쳤다.
흡사 죽기 싫어 발버둥 치는 모습 같아 보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검을 쥔 왜구는 창을 쥔 동료가 가병을 재차 찌르는 사이, 주변을 돌아보며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혹여 공격해 오는 가병이 없는지 세심하게, 주의 깊게 살폈다.
2인 1조로 상호 도움을 주고받으며 손발을 맞춰 합공하는 두 왜구들의 행동은 매우 능숙했다.
그와 같은 광경이 주변 곳곳에서 일어났다.
상당한 세월 동안 몸에 익은 듯 능란하게 상대하는 가병들을 차례대로 죽여 나갔다.
씩.
야스하루는 눈에 보이는 다수의 광경에 득의가 밴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얼마 안 걸리겠군.’
료닌들이 가병들을 없애는 것은 시간문제다. 수가 많다고는 하나, 가병들은 제 잘났다고 제각기 싸우려 했다.
그 모습이 보기에 여간 가소로운 것이 아니다.
숱하게 전장에서 적들을 상대하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료닌들의 상대로는 부족해도 너무 많이 부족한 가병들이다.
야스하루는 눈에 보이는 장내의 상황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훗.”
료닌들이 승기를 잡고 빠르게 가병들의 수를 줄여 나가고 있었다.
야스하루는 교전이 이어지는 장내 너머를 보았다.
시야에 월성 김씨 가문의 장원이 보였다.
값진 것들이 많을 것이고, 계집들 역시 많을 것이다. 출세를 하자면 재물을 많이 모아야 한다.
언제까지 낭인으로 있을 수는 없다.
‘이왕이면 타이라노 번에.’
야스하루는 눈을 반짝였다.
큰 공을 세우면 타이라노 번에서 자신을 하급 무사로 받아줄지 모른다. 아니면 많은 재물이나 팔아먹을 수 있는 여자와 아이들을 많이 바친다면, 그 공을 보아서라도 타이라노 번의 시종으로 삼아 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출세한 다음에는.’
야스하루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번주.
무사의 정점이자 꿈이다.
특정 지역을 자신 마음대로 다스리고 세금을 거두는 지위.
번은 하나의 작은 나라나 마찬가지다.
그 번을 다스리는 번주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여느 료닌과는 다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을 세워야 한다.
야스하루는 자신이 낭인들을 이끄는 지휘권을 가진 자라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순간.
움찔.
야스하루는 문득 머리에 떠오른 요시미츠 다카요시의 얼굴에 몸을 미미하게 양쪽으로 움직였다.
‘뭔가 께름칙한데.’
찜찜하다.
자신이 다른 료닌들보다 강하다고는 하나 료닌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번의 무사나 병사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것이, 심한 차별의 대상이 떠돌이 낭인 료닌이다.
그런데 이번 출정의 최고 지휘자인 다카요시가 자신에게 무려 200여 명의 료닌을 맡겼다. 그리고 광주목이라는 곳을 공격, 점령하라 명하며 마음껏 약탈해도 좋다, 약탈한 것들을 마음대로 해도 무방하다 언질을 주었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과하다 싶을 정도의 재량권을 주었다.
처음에는 신 났다.
하늘을 날아갈 듯한 기분에 200여 명의 료닌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밤을 낮 삼아 부지런히 광주목을 향하며, 지나치는 몇 개의 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노략질을 일삼으며 쏠쏠한 재미(?)를 만끽했다.
본토에서는 가뭄에 콩 나듯 즐기는 계집을 원 없이 실컷 품었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즐겼다.
야스하루는 지나쳐 온 몇 개의 현이 생각나자, 곧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クソ.’
빌어먹을이다.
일단 약탈에 나서자 죄다 재물과 계집들에게 눈이 멀어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마구 날뛰는 료닌 몇을 본보기로 죽여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랬다가 료닌들이 대거 반발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혼자서 무려 200여 명의 료닌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자신도 료닌이기에 료닌의 습성을 잘 안다.
약탈에 있어, 즐기는 데 있어 방해를 받으며 이성을 잃고 방해한 자를 죽여 버리는 것이 바로 료닌이다.
값진 재물을 약탈하고 계집을 즐길 때는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득불 통제하기 쉽게 200여 명의 료닌을 넷으로 나누어, 마음껏 약탈하고 즐기며 광주목으로 오라 했다.
약속한 날짜에 오는 무리와 합류하여 광주목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오면서 몇 번 싸워 본 고려 놈들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죄다 쭉정이고 싸울 줄도 모르는 약한 놈들이라, 이젠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가병들과 싸우는 30여 명의 료닌에게 미리 각자 알아서 싸우라고 말하며 내버려 두었다.
명색이 지휘자라 이렇게 멀찌감치 떨어져 교전을 음미하듯 감상하는 재미가 꽤 좋다.
차후에는 약탈한 재물들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을, 끌고 온 계집들 중 가장 아름답고 지체가 높은 계집을 차지할 것이다.
왕이 부럽지 않다.
분명히 항의하며 반발하는 료닌들이 몇 있을지도 모른다.
‘까짓, 그런 놈들은 그냥.’
야스하루는 음험한 미소를 머금었다.
씨이익.
단칼에 베어 죽일 것이다.
자신이 무서운 사람임을.
죽음의 혈투에서 살아남은 최종 승자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고 뇌리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로 삼을 것이다.
자신의 명에 따르도록, 군말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위엄이라는 것이 설 터.
그렇게 하면 보다 수월하게 약탈한 것들 중에서 가장 값진 것과 가장 예쁜 여자를 자신이 독차지할 수 있을 테니.
무작정 풀어 놓는 것도 좋지만, 자신을 무서워하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후후.”
야스하루는 들뜬 얼굴빛을 띠며 맛있는 먹잇감인 월성 김씨의 장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자신이 이끄는 낭인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갈 것이다.
그럼, 마음껏 빼앗고 즐길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