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회: 2-24 -->
고래부터 중원이 통일되고 강력한 왕조나 세력이 들어서면 어김없이 한반도로 해당 왕조와 세력이 쳐들어왔다.
그럼 어김없이 전쟁이 일어났었다. 하여, 한반도의 권력을 쥔 집권자들은 항시 중원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며 귀추를 모았다.
금이 중원을 통일할 줄 알았다.
하나, 금은 잠시 반짝하더니 급격히 국력이 흐트러졌다. 문란한 정치와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상대적으로 피폐해지는 백성들의 삶.
건국 초기의 강성함을 금나라는 빠르게 잃어 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남송은 끈질기게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며 악착같이 명맥을 이었다.
최충헌은 자신이 통치하는 고려를 돌이켜 보았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벌 귀족 가문들의 대농장과 자신을 포함한 무신들의 집권으로 고려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권력 기반이 무신인 까닭에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
최충헌은 얼굴빛을 흐렸다.
머릿속에서 자신의 두 아들 최우와 최향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 다 자신의 친아들이다.
이제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후대가 마음에 걸렸다.
행여 두 아들이 권력을 눈앞에 두고 골육상쟁을 벌이지나 않을까 가슴 깊이 걱정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장자 최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싶지만, 차자 최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뻔하다.
최향이 알게 모르게 자신의 측근에 있는 무신들을 회유, 포섭하며 세력을 모으고 키우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최향은 현재 모은 세력을 공고히, 충실히 다지며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점이 심중 언짢았다.
마치 자신이 빨리 죽기를 원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만약.”
최충헌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근심이라는 눈빛을 띠었다.
장차 최우를 장자 승계라는 원칙에 따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다면, 차자 최향이 당장 군을 움직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형제간에 피를 보게 되고, 지배자로서 자신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설혹 차자 최향이 권력을 쥐게 된다고 해도 형을 죽였다는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도덕성에 크게 타격을 받을 것이고, 항시 정통성 논란에 휩싸여 권력 기반이 불안정해질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그리되면.”
최충헌은 우려했다.
머릿속에 자신이 차마 없애지 못한 심복우환心腹憂患이 떠올랐다.
황실.
최충헌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황상 폐하를 중심으로 한 복황파들이 뒤통수를 칠 수도 있음이야.”
내분을 걱정하는 중얼거림.
고려는 황제의 나라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래 황위에 오른 이들은 모두 폐하라 지칭되었다.
그것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자부심이자 고려가 중원의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런 황실이 이의방이 보현원에서 난을 일으킨 후 유명무실해졌다.
그럼에도 다시 황실의 위엄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반무신 세력, 이른바 복황파가 황실과 황제를 중심으로 어둠 속에서 암약하고 있다.
무신 정권이 치명적인 틈을 보이면 복황파는 그 즉시 무신 세력을 척살, 황실을 다시 세우고자 할 것이다.
“아니 될 말!”
최충헌은 힘주어 중얼거렸다.
문치 위주의 고려는 결코 강성해지지 않는다. 고려는 내부적으로 약화되고 부패하고 만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라 귀족계에 속한 김부식이지 않은가?
“무과를 열지 않고 음서를 위주로 무신들을 등용한다 하여 무武와 무신들을 업신여긴 문신들이 득세하게 하여서는 아니 돼!”
최충헌은 확고부동한 의지를 실어 다시금 중얼거렸다.
과거를 통해 출사한 문신들은 음서로 출사한 무신을 업신여기며 괄시했다.
무신들은 문신들에게 늘 수모와 조롱을 받아 내면서 문신과 문신을 감싸는 왕에게 강한 불만을 품었다.
그 불만이 쌓이고 쌓여 의종 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아직 잊지 않았음이야.”
최충헌은 잔잔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현원에서 대장군 이소응이 문신 한뢰에게 뺨을 맞았고, 그 이전에 정중부의 수염을 김부식의 아들 내시 김돈중이 촛불로 태웠다.
어디 그뿐인가?
의종이 문신들과 함께 미주가효를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길 때, 무신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의종과 문신들을 호위하였다.
무신의 난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고, 온몸이 결박된 채 커다란 솥에 집어넣어져 익사한 의종의 죽음 역시 당연한 것이다.
“만약 문신들이 다시 득세하면 필히 그렇게 될 터.”
황실과 문신들이 그간 당한 것을 무신들에게 되갚아 주려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되면 수많은 무신이 죽어 나갈 것이고, 종국에는 죽은 자신이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라는 치욕을 당할 터.
‘결코 허용할 수 없음이야.’
최충헌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머리를 숙였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향이보다는 우야.’
최충헌은 두 아들 최우와 최향을 상기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정권을 안정시키고 이끌어 나가기에는 인심을 잃지 않으려 늘 애쓰는 원만한 장자 최우가 적합하다.
차자 최향은 지나치게 명예에 집착하고 자신처럼 과격한 측면이 없잖아 있다. 주변에 무신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문신들을 거두어들이고 은전을 베풀어 반감을 줄여야 할 때야.”
최충헌은 정국이 팽팽하게 잡아당길 때가 아니라 느슨하게 풀어 줘야 할 때라는 인식에 얼굴빛을 흐렸다.
장자 최우는 문신들을 끌어안으며 무신들을 다독일 수 있다. 하지만 차자 최향은 무신들을 가까이 할지언정 문신들을 가까이하는 성정이 아니다.
문신들과의 반목으로는 현 고려를 이끌 수 없다. 어느 정도는 문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문신과 무신을 화합시켜 미구에 닥쳐올 전쟁이란 재앙에 대비하자면 차자 최향보다는 장자 최우가 지금 자신이 앉은 자리에 합당하다.
최충헌은 속으로 한 저울을 연상하며, 장자 최우와 차자 최향을 저울에 올리고 재 보았다.
무게 추는 장자 최우에게 빠르게 기울어졌다.
최충헌은 시름이 그득한 한숨을 쉬었다.
“휴.”
차자 최향의 반발이 마음에 걸린다. 장자 최우에게 차자次子 최향과 맞설 힘이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효자긴 효잔데.”
아비인 자신에게 도리가 아니라 하여 한사코 몸을 사리며 주위로 사람이 몰리는 것을 경계했다.
차자 최향에 비하면 마음 든든하기 그지없는 큰아들 최우다.
예전에는 그것이 믿음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근심이었다.
“흠.”
최충헌은 작은 이채를 반짝이며, 얼마 전 문객으로 들인 이규보를 상기했다.
‘범상치 않은 사람입니다. 오래전에 사라진 노를 만드는 법을 비롯…… 삼시 연발법이란 병법도 아는 것을 보면…….’
이민호.
자신과 독대했던 광주 이가의 사람이라는 젊은이.
“나 못지않은 식견에다가 안목, 게다가 병략까지…… 우의 곁에서 큰 힘이 되어 줄 터.”
최충헌의 생각은 북방의 맹자로 급부상 중인 몽고에 미쳤다.
당장은 아니지만 후일 일전이 불가피할 것이다.
“으으음.”
최충헌은 깊은 시름이 그득한 침음을 흘렸다.
자신의 사후가 될 것이다.
죽고 난 다음의 후대에 연연하는 것은, 놓아야 할 것을 놓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최충헌은 고즈넉한 정청에 홀로 앉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지나온 자신의 삶을 나름 정리하기 시작했다.
피식.
최충헌은 이민호와의 독대가 머리에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웃고 말았다.
“인물이로고.”
감탄이란 감정이 밴, 최충헌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잔잔하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문신보다는 무신에 가까운 자 같아 공감하는 바가 적잖았다. 그런 이유로 마음 한구석에 호감이란 감정이 자리 잡았다.
이규보는 문객으로 최충헌의 집에서 묵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최우의 집 빈청에서 기거하였다.
귀빈들이 묵는 빈청은 호사스러웠다.
방은 물론 공짜로 주는 옷과 음식까지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서풍이 최우의 서녀 최여심과 혼담이 오가는 것이 십분 감안한 대우인 듯 보여 내심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루 이틀, 시일이란 시간을 보내며 나는 모종의 포석을 깔았다.
무엇보다도 최양백, 김인준. 두 사람과 친해지려 노력했다.
한데 쉽지 않았다.
최양백과 김인준은 노골적으로 날 멀리하며 거리를 두려 하였다. 두 사람은 훗날 최우의 아들 최항을 추대하는 핵심 인물이 된다.
그것을 감안하여 두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 두려 하였다.
만전, 최항.
그놈이 최씨 정권의 3대 집권자가 되는 것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
만약 놈이 3대 집권자가 되는 날에는 온 고려가 아주 개차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 국토와 만백성이 엉망진창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골치 아프네, 이거. 내가 다가가는 만큼 뒤로 물러나니. 나, 참.”
최양백과 김인준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와 12세기 고려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확실히 달랐다.
다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난 잠이 오지 않아 소지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21세기의 사람인 나는 휴대폰 중독이었다.
하루 몇 시간이라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지 않으면 불안해서 원.
그런데.
“내가 미쳐.”
난 준상이가 내 생일 선물로 준 수동 충전기의 레버를 열심히 돌렸다.
빙글빙글.
그동안 밤마다 레버를 돌려 휴대폰을 충전했다. 손아귀가 얼마나 아픈지.
“최대한 휴대폰을 아껴 써야지. 흐흑.”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이 날 것 같다. 휴대폰을 항시 꺼 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켰다.
밤마다 레버를 돌리는 것이 너무 싫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