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52화 (52/247)

<-- 52 회: 2-23 -->

‘살아 있네!’

난 속으로 장난스레 중얼거렸다.

내 눈에 보이는 최충헌은 풍채가 여느 사람과 달라도 많이 달랐다.

위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은연중에 풍겼다.

나이 탓인지 늘어진 자세가 노환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지만, 눈빛은 나이와 무관하게 맑고 깊었다.

살아온, 여느 사람과 달라도 많이 다른 굴곡진 삶이 주는 연륜이란 것이 물씬 느껴졌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네.’

난 마음속으로 슬며시 작은 미소를 씩 머금었다.

‘곧 죽어도 집권자는 집권자지. 후후후.’

최충헌이 음서로서 하급 관원으로 벼슬길을 시작한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무자비한 숙청이란 이름의 피 비린내 나는 칼을 얼마나 휘둘러 왔는지도 잘 안다.

그때.

“내, 우를 통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 그대에게서 직접 다시 듣고 싶어 이리 불렀네.”

최충헌이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일순.

난 흠칫하며 가볍게 몸을 양쪽으로 움직였다. 머릿속에서 ‘테무친’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최충헌은 내가 최우에게 말한 칭기즈칸에 대해 알고 싶은 모양이다.

‘훗.’

마음속으로 실소했다.

최우에게 잔뜩 겁을 줄 요량으로 칭기즈칸에 대해 말했는데, 그 얘기가 최충헌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전혀 예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우에게 말할 때 응당 최충헌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음을 미루어 짐작했다.

난 왼쪽에 서 있는 김덕명을 보았다.

“주변을 물리쳐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합하閤下와 독대하고 싶습니다.”

내 말에 최우는 흠칫했다.

김덕명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속내를 드러내듯 당황했다.

서둘러 앉은 최충헌을 쳐다보았다.

“합하, 저자는 듣도 보도 못한…….”

김덕명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다들 물러가라.”

최충헌이 중후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그 모습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세를 손아귀에 쥔 권력자의 면모가 물씬 풍겼다.

최우는 공손히 상체를 숙였다.

“예에, 아버님.”

김덕명은 당혹감을 금할 수 없었다.

“합하.”

최충헌을 부르며 나와 최충헌의 독대에서 빠지지 않으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어허.”

최우가 상체를 바로 하며, 서 있는 김덕명에게 무언의 주의를 주었다.

언짢다는 속내가 최우의 얼굴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주춤.

김덕명은 최우의 얼굴을 보고는 난감해했다.

신분상으로 최우에게 밀린다. 아들과 측근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다. 더욱이 이미 최충헌이 명을 내리지 않았는가?

‘이런!’

김덕명은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속으로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필시 최향이 물을 것이다.

형 최우가 왜 아버지 최충헌과 독대하였으며,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이민호라는 자의 독대를 왜 막지 못하였으며, 어떤 대화가 부친 최충헌과 이민호 사이에 오갔는지.

최향은 알고자 할 것이다.

한데 자신은 그 물음에 답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김덕명은 속으로 난감해하며, 물러나는 최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최충헌과 독대를 하고 나오자, 그새 밖은 어둑어둑해져 곳곳에 땅거미가 짙게 깔렸다.

최충헌의 거처를 등지고 잠깐 서 있는데.

“이보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난 움칫거리며 목소리가 들린 동북향을 돌아보았다.

“풋.”

살며시 웃고 말았다.

이규보가 날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이규보가 내 앞에 이르러 섰다.

“어떻게 되었는가?”

이규보는 궁금해하며 눈짓으로 내 뒤에 있는 전각, 최충헌의 거처를 가리켰다.

최충헌과의 독대가 만족스러웠느냐?

그런 속내가 담긴 물음이었다.

“그럭저럭.”

난 건성으로 대답하며, 행여 이규보가 귀찮게 다시 물을까 내심 염려했다.

“그런데 최 부사가 안 보입니다.”

“자네와 상국 어른의 독대가 길어져 기다리다가 돌아갔네.”

“그렇습니까?”

난 고개를 가볍게 까닥였다.

“문객 생활은 어떠십니까?”

난 이규보에게 최충헌의 사저에서의 생활을 물었다.

얼마 전에 최우의 주선으로 이규보는 최충헌의 문객이 되었다.

내가 최충헌의 곁에 박아 놓은 스파이.

그게 이규보의 역할이다.

“말도 말게. 모든 것이 낯설다 보니 이것저것 불편하네.”

“하하하. 그렇습니까? 하지만 유랑하실 때보다는 편하실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난 주변을 훑으며 넌지시 이규보에게 말을 건넸다.

“김덕명을 주시해 주십시오. 그자는 최향의 사람입니다.”

이규보는 내 말에 흠칫하더니, 몸을 미미하게 양쪽으로 움직였다.

조금 놀란 기색을 띠는 것이 몰랐던 눈치다.

“그, 그런가?”

나는 말을 더듬거리는 이규보에게 낮은 목소리로 몇몇 당부를 남겼다.

이규보는 내 말을 조용히 정청靜聽하며 주변을 살폈다.

행여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매우 신경 쓰는 눈치라, 난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이거 참.’

제대로 스파이 활동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심히 걱정되는 이규보다.

후후…….

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사시巳時.

최충헌은 정청政廳에 홀로 앉아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주변에는 갓난아이 팔뚝만 한, 굵은 황촉들이 저마다의 불빛을 밝혔다.

빛이 짙고 강하면 그에 비례하여 그늘 역시 짙고 길어지는 법.

황촉이 밝히는 주변은 밝았으나 그 너머는 어두컴컴했다.

최충헌은 오연히 앉아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마음속에서 오만가지 상념이 일고, 수많은 감정이 봇물이 터진 양 치솟았다.

‘살 만큼 살았지만, 남들보다 영화는 실컷 누린 삶이지만.’

뼈아픈 것이 몇 있다.

동색 충수와 생질 김진재를 비롯하여 다수의 혈육지친을 자신의 손으로 무자비하게 죽였다.

손에 쥔 권력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죽을 날이 그리 머지않다는 생각이 들자, 지나온 삶이 매우 마음에 걸렸다.

그런 이유로 죽기 전에 뭔가 속죄 삼아 남기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최충헌은 천천히 양손을 들며 머리를 숙였다. 양 손바닥을 번갈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피에 젖을 대로 젖은 이 손.”

회한에 젖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정청에 퍼졌다.

최충헌은 고개를 우로 돌렸다. 시야에 보이는 자그마한 동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슥.

동경을 손에 쥐고는 자신의 얼굴 가까이 댔다. 빛바랜, 오래된 동경 표면에 추레한 노년의 얼굴이 비쳤다.

척 봐도 노인의 얼굴이다.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듯 얼굴 군데군데 핀 검버섯.

생기를 잃고 쭈글쭈글한 피부, 얼굴을 가득 뒤덮은 잔주름들.

최충헌은 망연한 표정을 지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고개를 바로 하며 우측 옆에 동경을 내려놓았다.

최충헌은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천천히 깊은 상념에 들었다.

뒤를 봐주는, 남송과 금나라를 오가는 고려의 대상인들을 통해 중원의 정세를 늘 듣고 있었다.

대상인들은 줄곧 정치 자금을 대어 주며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다.

그것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며 상인들을 십분 활용, 외교에 관련된 정보를 모아 왔다.

고려 전역을 한 손에 쥔 지배자로서 중원의 동향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 탓에 상당한 정보를 모았다.

송의 쇠락, 급격히 기우는 금의 국력, 상승일로로 치닫는 몽고의 급성장 등.

최충헌은 몽고의 급성장에 주목하여 꾸준히 관련 정보를 모으려 노력해 왔다.

“으음.”

최충헌은 시름에 찬 신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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