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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난 고소를 머금었다.
최충헌이나 최우나 바보는 아닐 것이다. 고려와 금은 사대 관계를 맺고 있으니, 응당 북방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10년 내에 고려로 쳐들어올 겁니다.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 두어야 합니다.”
“자, 자네.”
최우는 매우 큰 충격을 받은 듯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상국, 그 어른은 이미 고령입니다. 몽골을 맞아 싸우기에는 힘에 부칩니다. 그러면 그 어른의 후계자가 몽골에 맞서 싸워야 하는데, 최향은 군사적 식견이 전무합니다. 또한 그들과 맞서 싸우기에는 역량이 부족합니다. 필시 머리를 숙여 화의를 청하려 할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금과 우리 고려가 비록 사대를 하고는 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인…… 한낱 오랑캐에 불과한 몽고족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최우는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난 씩 웃었다.
“그들은 강합니다. 서하를 공격할 때 수십여 만에 이르는 기마를 동원했습니다. 기마 1기가 최소 보승保勝 10명과 맞먹습니다. 또한 조만간 왜에서.”
난 왜구의 준동을 입에 올렸다.
최우는 내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구가 그리 기승을 부린단 말인가?”
몰랐던 눈치다.
“조정에서 관심이 없으니. 아니죠. 교정도감에서 왜구를 하찮게 여기고 별것 아니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까닭입니다만, 백성들은 왜구에.”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대로 왜구들을 내버려 두면, 겁을 상실한 왜구들이 개경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조금 겁을 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감히 왜구 따위가 개경을.”
최우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난 싱겁게 피식 웃었다.
“왜구는 배로 고려로 옵니다. 그놈들이 예성강을 거쳐 벽란도로 오지 않는다고 무엇으로 장담하십니까?”
“우리 고려의 수군이 결코 허용치 않을 것이네.”
“정중부가 보현원에서 난을 일으킨 이래 수군을 단 한 번이라도 정비한 적이 있습니까? 훈련다운 훈련 한번 해 보지 못했을 겁니다. 2군 6위의 중앙군 역시 무신들의 사병으로 전락하여 엉망진창이신 것을 정녕 모른다 말할 참이십니까?”
“자, 자네.”
최우는 당황했다.
내 말은 부친인 최충헌에게 책임이 있다 말하는 것이기에 자식 된 몸으로 듣기 힘들 것이다.
“상국, 그 어르신은 그리 오래 사시지 못합니다. 하면 누군가가 그분을 대신하여 고려를 이끌어야 합니다. 나는 공이 가장 적합하다 생각합니다.”
“…….”
최우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심중 동요하는 눈치다.
“돌아가셔서 잘 생각해 보십시오. 부친의 뒤를 이어 이 고려를 다스리는 자리에 앉고 싶은지, 아니면 최향이 그 자리에 앉아 공의 생사를 한 손에 틀어쥐는 것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지.”
난 말하며 입을 굳게 다문 최우를 보았다. 반신반의하는 모양이다.
최우의 안색이 흐려진 걸 보면 내심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며칠 후.
난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서 있는 정면 단상에 지긋한 연배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보료로 보이는 푹신한 것에 몸을 내맡긴 노인.
최충헌!
당대 고려를 말 한 마디로 호령하는 지배자다.
왼쪽 옆에 서 있는 얍삽해 보이는 중년인.
‘김덕명?’
난 중년인을 흘낏거렸다.
머릿속에서 고려사절요에 적혀 있는 한 내용이 떠올랐다.
[문서]충헌이 준문을 불러, 집에 두고 종으로 부리다가 마침내 대정 벼슬을 내리고 나날이 총애하고 신임하였다.
준문은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 낭장 김덕명과 더불어 충헌의 보좌가 되었다.
충헌이 병이 나자 네 사람이 꾀하기를…… 공이 세상을 하직하면 우리는 반드시 최우에게 가루가 될 것이다. 향은 담력이 남다르고 큰일을 맡길 만할뿐더러, 그간 우리를 후대하였으니…….
김덕명은 최우를 죽이는 데 앞장서다가 나중에는 최향을 배신하고 최우에게 붙는 박쥐 같은 자다.
“이름이 민호라고?”
최충헌이 가만히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단상 오른쪽에 서 있는 최우가 재빨리 말하고 나섰다.
“집안이 광주 이가라고 합니다, 아버님.”
“그래.”
최충헌은 아들 최우를 흘낏 보았다가 날 주시했다.
‘으음.’
난 유심히 최충헌을 보았다.
풍채가 장난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순이 넘은 고령임에도 눈빛이 살아 있었다.
절로 오금이 저린다고 할까?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무슨 면도날처럼 서늘했다.
사람을 죽여도 숱하게 죽인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살벌하기 짝이 없는 오싹한 기운을 내뿜었다.
‘아우 충수, 생질 박진재와 함께 미타산에서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었지.’
내가 기억하는 최충헌에 관한 것을 상기하며 지그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머리를 숙이고 싶어졌다.
‘사내 쇠키 존심이 있지, 부모님과 스승 외에 무신.’
자존심을 세웠다.
내가 아는 최충헌은 냉혈의 지배자다. 결코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새삼 강석우 교관이 고맙다.
그 양반이 날 굴려 준 덕을 톡톡히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다.
최충헌은 내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 보자 작은 이채를 반짝였다.
9장
난 단상에 앉은 최충헌을 보며 내심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최충헌은 겉모습일 뿐이다. 냉정하게 돌아가는 추이를 살피면.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노환에 시달리는 최충헌은 갈수록 약해졌다. 그런 한편으로 차자 최향이 부친 최충헌의 측근들을 회유, 포섭하며 권세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반면 장자인 최우는 아우인 최향에게 밀려 서서히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는 형국이었다.
최충헌은 일련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자와 차자 공히 모두 자신의 아들이라, 짐짓 모른 척하며 지켜보기만 했다.
아비로서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주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쩝, 뭐. 늙은 호랑이도 호랑이이긴 하지.’
아무리 늙은 호랑이라고 해도 호랑이는 결코 풀을 먹지 않는다!
단상에 앉은 최충헌은 내게 무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겉으로는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실상은 죽을 날을 받아 놓은 다 늙은 노인 최충헌.
하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아직 고려 조야朝野에 최충헌의 입김이 미치니. 우봉 최씨 가문의 무단 정치는 아직 살아 있다.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음…….’
최충헌은 마음속으로 신음을 흘리며 단상 아래에 서 있는 이민호를 보았다.
이어, 우측에 서 있는 아들 최우를 흘낏거렸다.
힐긋.
뜻밖이었다.
그간 아들 최우가 한 사람을 만나 달라 자신에게 청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아들을 통해 들은 얘기가 무척 충격적이라, 형부의 옥에 갇혀 있는 이민호를 불렀다.
‘이제 서른 안팎쯤으로 보이는데.’
최충헌은 서 있는 이민호를 위아래로 훑으며 찬찬히 뜯어보았다.
깊고 그윽한 도자기가 풍기는 멋을 음미하듯 바라보는 심미안이 생각나는 최충헌의 시선.
한편 좌측에 서 있는 김덕명은 이민호를 흘낏거리며 진한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대체?’
의문을 느꼈다.
듣도 보도 못한 자다. 생면부지인데.
난데없이 최우가 최충헌을 찾아와 독대를 청했다. 그리고 얼마간 대화를 나눈 후, 전격적으로 이민호를 불렀다.
‘부사의 사람 같긴 한데.’
김덕명은 서 있는 이민호가 최우의 사람이라 여겼다. 머릿속에 최향이 신신당부한 것이 생각났다.
‘아버님의 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내게 말해 주시오. 내 그대의 공을 결코 잊지 않을 터이니.’
김덕명은 심중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훗훗.’
최향은 대세다.
부친 최충헌의 뒤를 이어 교정도감의 주인이 된다면 자신은 크게 영전하여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아닌 말로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터.
김덕명은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거렸다.
잘 보고 잘 들어야 최향에게 자신이 무척 큰 공을 세웠음을 넌지시 알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