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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사람은 죽는다. 차이가 있다면 오직 하나다. 남보다 빨리 죽느냐? 아니면 남보다 늦게 죽느냐? ……늦게, 아주 늦게 죽고 싶으면 그냥 인적이 드문 산 좋고 물 좋으며 공기 좋은 곳으로 가서 살아. 근심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살라고. ……빨리 죽고 싶으면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만 골라 하고.
강석우가 PX에서 내게 한 말을 생각했다.
‘얍삽한 인간. 간만에 월급으로 비엔나 소시지에다 콜라로 입에 기름칠을 하려고 하는 순간 나타나 초를 친 주제에, 지가 무슨 도통한 도사라고. 큭큭.’
강석우.
참 희한한 인간이다.
그 인간이 내게 해 준 말이.
-어차피 우리는 운명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에 묶여 이리저리 몸부림치며 사는 마리오네트 인형과 같아. 죽음이라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겠어. 싸악 잊고,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하며 살 수밖에.
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운명.
눈에 보이는 그 것을 느낀다.
21세기를 살던 내가 12세기 고려 중기 말, 무신 정권의 시대로 떨어진 것이 운명이 아니면 뭐겠는가?
‘강석우, 그 인간 말대로 내가 발버둥 친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어. 될 대로 되겠지, 뭐.’
지금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간 제대로 못 잔 잠이나 이번 기회에 실컷 자 두자.’
난 맘 편하게 생각했다.
오른쪽 어깨의 상처가 신경 쓰이지만, 고려 시대로 넘어오며 변한 내 몸이라면, 금방 아물 것이다.
‘이상하긴 해.’
통증이 상당할 텐데. 내가 느끼는 통증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확실히 내 몸과 뇌가 변하긴 엄청 변했다.
드르렁.
수레에 늘어져 자는 이민호의 코골이에, 좌우에서 수레와 나란히 걷던 무사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힐끔힐끔.
허무맹랑하다!
무사들은 그런 속내를 내비쳤다.
개경에 당도하면 그 즉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죽음이 목전인데, 태연히 수레에 드러누워 코를 골며 자다니.
이게 말이 돼?
허어?
무사들은 너나없이 이민호를 쳐다보며 황당해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이민호의 그와 같은 작태가 앞쪽에서 길을 가던 최향에게 전해졌다.
최향은 호위장 권호렴과 함께 말을 몰아, 수레로 다가왔다.
또각또각.
호위장 권호렴은 수레에서 자는 이민호를 보고는 우거지상을 지었다.
“이! 이자가 감히!”
매우 화냈다.
얼토당토않다는 말이 있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얼토당토않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당치도 않은 모습이라, 권호렴은 일순 노성을 터트리려 하였다.
“내버려 둬라.”
권호렴은 최향의 말에 흠칫했다. 급히 고개를 돌려 최향을 보았다.
“주군.”
“…….”
최향은 말없이 수레에 누워 자는, 결박된 이민호를 바라보았다.
권호렴은 다시금 최향을 불렀다.
“주군.”
최향은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권호렴은 최향을 보며 난감한 기색을 띠었다.
섬기는 주인 최향을 또 다시 부르는 것은 무례일 것 같아, 심중 주저되었다.
권호렴은 최향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최향은 눈에 보이는 이민호의 모습에 이채를 띠었다.
‘괴이한 놈이로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참으로 특이한 자가 아닌가?
이규보의 말로는 광주 이가, 즉 지방 호족의 식솔이라 했다. 하면, 그 신분은 문벌 가문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한데,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도저히 문벌 가문의 이 같지가 않다.
문벌 가문의 이들은 어려서부터 흔히 말하는 공맹의 도, 즉 유학을 배우고 익혀 언동이 틀에 박혀 있다.
갑갑하리만치 그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격식과 허례를 넌더리가 날 정도로 따지고, 공맹만이 이 세상 유일의 진리라는 헛된 믿음에 젖어 있다.
세상에 길은 많다.
그 길의 끝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문文, 무武, 상商 등등 세상에 퍼져 있는 수많은 길 중 문은 그저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문벌 귀족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길은 오직 하나! 공맹지도孔孟之道뿐이다!”
문벌 귀족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자신은 그런 속설을 알기에 수춘후의 딸과 혼인, 보성백이 되어 그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훗날을 위한 포석으로 말이다.
“으음.”
최향은 이민호를 잠시 뚫어지게 보았다.
“훗.”
짧은 웃음을 흘리며 말 머리를 돌렸다.
“주군.”
“됐다. 내버려 두어라.”
“네?”
권호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의 배를 가볍게 발로 차는 최향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는 최향의 언동에, 권호렴은 멍했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수레에 누워 있는 이민호를 보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형부形部.
법률과 사건 발생에 따른 소송 그리고 죄에 대한 형벌을 관장하는 중앙 관청이다.
수장인 종1품 판사判事를 필두로 정3품인 상서尙書 1명, 종3품의 지부사知部事 1명, 정4품인 시랑, 정5품인 낭중, 정6품인 원외랑 2명 등.
다수의 관리가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 시대의 형벌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등 총 다섯 가지다.
이전에도 다섯 가지의 형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정비하여 하나의 법으로 규정한 것은 고려 시대 때부터다.
독특한 것은 화형이나 거열형 또는 능지처참과 같은 형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형벌을 조정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확실히 감옥이란 현대나 과거나 달갑지 않은 곳이다.
“크!”
난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숙였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앉아 있는 주변은 온통 더러운 짚투성이였다.
흙을 다져 벽을 만든 것 같아, 호기심에 몇 번 건들어 보았다.
의외로 양쪽 벽은 단단했다.
“끄응.”
난 앓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옥에 처넣었으면 몸을 결박한 밧줄이나 좀 풀어 주든지.
“썩을!”
툴툴대는데, 내가 갇혀 있는 옥으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낮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난 움찔거리며 우측을 돌아보았다.
“응?”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척 봐도 화려한 옷차림새라,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가만히 그를 보았다.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외모였다. 그런데 눈동자가 의외로 밝고 깊었다.
‘누구지?’
난 걸어오는 이의 양손을 보았다.
‘음…….’
손에 굳은살이 없다. 귀하게 자라 힘든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자다.
한데 어딘가 모르게 께름칙했다.
뭐랄까?
왠지 모르게 조심스러워지는 분위기를 연출한다고나 할까?
난 옥 너머에 다다라 날 향해 돌아서는 자를 보았다.
“난 최우라 한다.”
순간.
“…….”
난 입을 따악 벌렸다.
누가 봐도 엄청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최우를 보았다.
최우에 대한 기록을 떠올렸다.
‘참 호불호가 갈리는 자란 말이야.’
눈을 반짝였다.
최우는 부친인 최충헌에게는 효자다. 성격도 꽤 호탕하고 인자하며 의외로 그릇이 크기도 하다.
자신의 애첩을 김준에게 내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배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집에 정방을 설치하는 한편, 즐기는 격구를 위해 대력 3만 평에 이르는 격구장을 만들었다.
그 격구장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양민들의 집이 허물어졌다.
강화도로 천도한 후에도 자신의 집을 화려하게 치장했으며, 말년에는 주색에 깊이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최우는 날 응시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내 두 아들놈이…….”
난 최대한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먼저 그대가 나서서 만전이 놈의 악행을 막아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딱딱 부러지는 말투였다.
피식.
난 싱겁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