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회: 2-16 -->
다들 저마다의 입장과 당면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김인준이 일단의 무사와 관병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김인준은 발로 만전을 밟고 있는 이민호를 보고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크게 놀랐다.
“저놈을 잡아라.”
김인준의 고함에 대동한 무사와 관병들은 신속히 이민호와 옆에 서 있는 묵을 에워싸려 했다.
최양백이 그 광경을 보고는 급히 소리쳤다.
“멈춰.”
김인준은 최양백을 돌아보았다.
“양백!”
“만전 님이 다치실지 모르네.”
최양백은 말하며 만전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김인준은 흠칫하며 만전을 보았다. 그제야 상황이 인지된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되네. 첫째도, 둘째도 만전 님의 안전이 우선이네.”
“이!”
김인준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쉬이이이이이.
긴 파공성이 울렸다.
이어, 한 줄기 양광陽光처럼 눈부시게 빠른 빛살이 서 있는 이민호를 향했다.
서 있는 모든 이들이 귀에 들리는 파공에 움찔움찔했다.
이민호에게 날아드는 빛살에 다들 눈을 치뜨며 의문이라는 감정을 담았다.
창졸간이었다.
일련의 모든 상황이 이루어지고 끝나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크아아악.”
“나리이이!”
묵의 외침이 길게 울렸다.
반응이 느렸다.
예상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귀에 들린 파공에 보다 빨리 반응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오른쪽 어깨에 화살이 박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살에 실린 힘은 강하고도 강했다.
내 어깨에 박히는 순간 그대로 화살이 뚫고 지나갔다.
“크악.”
난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오른쪽 어깨를 뚫고 나온 화살은 핏방울을 뿌리며 맨땅바닥에 박혔다.
퍼억.
비스듬히 박힌 화살 깃이 위아래로 격렬히 흔들렸다.
난 충격에 휘청거리다가 맨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과당탕.
딱딱한 맨땅바닥을 구르며, 격한 통증에 의식이 아찔했다.
‘비, 빌어먹을!’
21세기에서 이런 꼴을 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12세기에 와서 우라질.
나가떨어지는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밀면 미는 대로.
자연스럽게, 순리라는 이치에 따라 모든 것을 내버려 두었다.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나는 맨땅을 서너 번 뒹군 후, 구르는 힘을 이용해 벌떡 일어났다.
순간
휘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고 말았다.
“크흐흑.”
난 한쪽 무릎을 땅바닥에 꿇었다.
털썩.
왼손을 들어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나리이이.”
묵이 소리치며 내게 달려오려 했다.
“움직이지 마!”
내 외침에 묵이 움찔했다.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은 내 왼 손가락 사이에서 서너 개의 붉은 핏줄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으으음.”
난 입술 사이로 신음을 흘렸다.
이를 악물고 참으려고 했는데. 빌어먹을.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흐려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눈앞이 하얀 것이 온 세상이 다 백색이 된 그런 느낌이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고 몸에서 힘이 빠졌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렇다고 맨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을 수만도 없다. 지켜보는 눈들이 너무 많아, 앉기에는 자존심이 쪼까 상한다.
다들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수십여 개에 이르는 화살들이 날아들어, 움직이려는 자들의 발치에 깊이 박혔다.
퍼퍼퍼퍼퍽.
다들 화살이 날아온 뒤를 돌아보았다.
손에 활을 든 일단의 무사가 천천히 말을 몰아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말을 모는 이들은 잽싸게 양쪽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레 한 사람이 나타났다.
장년의 연배에 이른, 말을 탄 이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종2품 참지정사參知政事, 보성백寶城伯 최향.
다들 최향의 등장에 놀라워하며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이규보, 서윤, 서풍, 땡중 해심, 5명의 가병, 묵.
일행들은 최향의 등장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몰라 숨죽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양백과 김인준 그리고 두 사람이 이끄는 무사들과 관병들은 일제히 허리를 깊이 숙였다.
“보성백을 뵙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만전은 최향의 등장에 흠칫했다. 당혹스러워하는 것이 한눈에 다 보였다.
‘제엔장.’
만전은 최향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명백히 자신에게는 숙부가 되는 최향이다. 하지만 부친 최우와 함께 조부 최충헌의 후계를 다투는 경쟁자다.
꼬투리를 잡히면 부친 최우에게 불리하면 불리했지, 이롭지 않다.
만전은 슬쩍 뒤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저놈 때문이야.’
만전은 자신이 굴욕적인 모습으로 엎드려 있음을, 온몸이 결박되어 있음을 잠시 잊었다.
그럴 정도로 최향의 등장은 뜻밖이었고, 몹시 당혹스러웠다.
또각또각.
낮은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향은 나와 세 걸음 남짓 떨어진 곳에 이르러 말을 세웠다.
히힝.
말이 나지막한 울음을 흘렸다.
최향을 따르는 무사들이 신속하게 좌우로 흩어져, 한일자로 늘어섰다.
최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만의 남경 나들이에 반기는 이들이 참 많군그래.”
히죽 웃은 최향의 얼굴에서 비아냥거림이 느껴졌다. 우연한 등장은 아니었다.
뭘 노리고 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의도적인 등장 같아 영 께름칙했다.
‘뭐지?’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자가 최향이라는 것에 속으로 크게 놀랐다.
보성백.
최향에게 내려진 귀족 작위다. 뭐 중세 유럽의 공후백남으로 이어지는 귀족 작위와 유사하다.
자신이 남다르고, 높고 고결한 신분임을 입증하는 듯한 화려하고 멋들어진 복색을 한 최향은 왼쪽을 돌아보았다.
최양백과 김인준 그리고 두 사람이 거느린 가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깊이 숙인 모습이, 보기에 썩 나쁘지 않았다.
“오래만이다. 김인준, 최양백.”
감정을 배제한 최향의 말에 김인준과 최양백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간 무양하셨사옵니까, 보성백님?”
그 모습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절도라는 것이 물씬 풍겼다.
“…….”
최향은 말없이 김인준과 최양백을 보았다.
입매가 뒤틀리듯 이지러지는 것이 비웃은 것 같았다. 본시 김인준과 최양백은 최우의 가노, 즉 종의 신분이다.
그러니 최향이 신분이 천하다고 할 수 있는 김인준과 최향을 비웃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최양백과 김인준은 머리를 들지 않았다.
‘우라질!’
‘어떻게 보성백이 여기에?’
최양백과 김인준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동일한 의문을 가슴에 품었다.
최향이 여기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필시 의도적인 등장일 터.
‘음.’
최양백은 불안했다.
섬기는 주인 최우는 배포가 크고 너그러우며 그릇이 여느 사람보다 남다르다. 또한 부친인 최충헌에게 효를 다하는 효자라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한다.
그에 반해 최향은 명예에 집착하고 권력을 추종하며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다.
일각에서는 최충헌의 사후 후계자는 최향이 될 것이라 말한다.
중앙군을 거의 다 장악하고 지방 곳곳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 두었으며, 왕족과 혼인함으로써 조정과 고려 왕실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해 두었다.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이겠는가?
경쟁자인 최우.
자신이 섬기는 그분의 약점 중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만종, 만전 형제다.
‘안 돼!’
최양백은 마음속으로 고함쳤다.
이대로 만전이 최향에 의해 끌려가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면 주인 최우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