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44화 (4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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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이가 내게 이르렀다.

“잠시 서 있어.”

“아, 네에.”

묵이는 대답하며 나와 만전을 번갈아 보았다. 얼굴에서 다수의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당황, 곤혹, 불안, 두려움 등등.

묵이를 흘겨보며 난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후후.’

왼발을 놀려, 서 있는 만전의 무릎오금을 차례로 눌렀다.

“어헉.”

만전은 당황하며 맨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털퍼덕.

이규보, 서윤을 비롯한 일행들과 최양백을 위시한 무사들이 그 광경에 흠칫하며 당황했다.

“흑.”

“무슨?”

난 검을 묵이에게 건넸다.

“겨누고 있어. 움직이려고 하면 그대로 목을 찔러 버려.”

“예에에.”

묵이는 화들짝 놀랐다.

“그럼, 내가 검을 들고 어떻게 이놈을 묶어?”

말하며 눈짓으로 만전을 가리켰다.

묵이는 내 말에 당혹스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난 거침없이 검을 묵이에게 건넸다.

“뭐해.”

“네. 네에에.”

묵이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검을 받았다.

난 최양백을 쳐다보았다.

“거리 일곱 걸음.”

최양백은 움찔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만전을 죽이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당신이 내게 다가와 날 죽이는 것이 빠를까?”

말하며 피식 웃었다. 일부러 자신감에 찬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최양백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속내를 드러내며 날 죽일 듯 쏘아보았다.

매서운 눈초리였다.

최양백은 은연중에 잔떨림을 흘렸다.

파르르.

이규보, 서윤, 서풍, 땡중 해심, 5명의 가병.

그들은 날 쳐다보며 극구 만류했다.

“이보게.”

“지금 뭐하자는 것인가?”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소?”

다들 겁먹었다.

만전은 서자이긴 하지만 최충헌의 손자이고, 장자인 최우의 아들이다.

지금껏 저지른 짓만으로도 내 목이 날아가기에는 족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일행들 역시 목이 떨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여주 서가가 멸족의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겁내는 것이 당연하다.

나에게 고함치며 말리려는 것이 지극히 온당하다.

나는 신속하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묵이에게서 건넨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었다.

고래고래.

그 와중에도 고함치는 만전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 날렵하게 양손과 몸을 꽁꽁 묶었다.

만전을 결박하며, 내 시야에서 최양백과 무사들을 놓치지 않았다. 계속 주시하며 만에 하나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제기랄!’

썩을이다.

일단 모든 상황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였다. 한데,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와 같이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우라질. 뭔 수로 만전이 놈을 개경으로 데리고 가서, 최우를 만나는 발판으로 삼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다.

개경에 도착하기까지 수삼일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동안 최양백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필시 무사들을 움직일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속을 모르는 일행들은 극구 날 말렸다.

만전을 풀어 주고 머리 숙여 깊이 사죄하고 또 사죄해라.

‘웃기시네.’

일행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최씨 정권은 무려 60년, 그러니까 1세기에 걸쳐 절대 권력을 형성했다.

그러니 최충헌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되면.’

일행들을 믿을 수 없다.

개경으로 만전을 데리고 가는 동안 일행들 전부나 일부가 내 뒤통수를 때릴지도 모른다.

만전을 풀어 주며 미안하다고, 자신은 나와 상관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며 내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 것이 틀림없다.

‘아주 지랄맞네, 이거.’

나와 함께 움직이는 일행들을 믿을 수 없다?

그건 내게 아주 불리한 상황임을 의미한다.

함께하면 내가 위험해진다!

난 속으로 썩은 계란을 씹어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만전이 목이 쉬어라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네놈이 무사히 죽을 수 있을 성싶더냐?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져…….”

“아새키, 목청도 좋네.”

묵이가 들고 있던 검을 다시 받아 손에 쥐며, 오른발을 들어 만전의 등을 눌렀다.

꾸욱.

만전은 상체를 숙였다.

난 발의 위치를 바꾸어 만전의 머리를 밟았다.

신분이 높다고 거들먹거리는 놈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아아악.”

만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날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탔다.

적대감을 넘어선 분노는 살의로 이어졌다.

널 죽이겠다!

만전은 나에 대한 살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빠드득.

이를 갈았다.

“내! 기필코!”

만전은 아주 날 갈아 마시려 했다.

난 히죽 웃었다.

“깝치지 마라. 응! 너, 그러다 명줄 끊어져. 알겠어!”

내 조롱에 만전은 고성을 지르며 최양백을 쳐다보려 했다.

“으아아아아아! 최양백. 나는 상관하지 말고 이놈을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아아아!”

만전은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최양백은 주저했다.

‘이익!’

오만상을 짓고, 이민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이민호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만전이 죽을 수도 있다.

섬기는 주인 최우에게 아들은 오직 둘이다.

만종, 만전.

그런 이유로 두 형제가 도에 지나친 일을 벌일 때마다 그 점이 부각되어 무마되곤 했었다.

비록 서자이긴 하지만 아들.

만전이 자신을 향해 지르는 고성에도 불구하고 최양백은 움직일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만전이 죽는다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이익!’

최양백은 속에서 치솟는 울화에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움직이고 싶은데,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주는 강한 답답함에 최양백의 가슴은 분노로 들끓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민호에게 다가가 소지한 검을 높이 빼 들어, 단숨에 천참만륙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최양백은 이민호에게 질질 끌려가는 상황이 정말이지 죽기보다 싫었다.

이규보, 서윤, 서풍, 땡중 해심, 5명의 가병, 묵.

그들은 암담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이민호를 보았다.

5명의 가병은 침묵했다.

돌아가는 상황의 추이를 눈여겨보며 여차할 경우 서윤과 서풍 형제를 보호하려 하였다.

그런 이유로 다섯 가병은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 탓에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땡중 해심은 돌아가는 추이를 보며, 즐기는 듯 미소 지었다.

씨익.

서윤, 서풍 형제는 몹시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연방 이민호에게 소리쳤다.

“당장 그 검, 치우지 못하는가?”

“멈추라니까.”

이규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이민호를 보았다.

‘저 사람이.’

뭔가 좀 이상하다.

자신이 아는 이민호는 저렇게 무모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무모하게 행동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만전에게 저리 수모를 주며 그를 결박하다니. 이후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거…….

‘서, 설마!’

이규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에 떠오르는 한 상념.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격동했다.

이규보는 급히 고개를 돌려 땡중 해심을 보았다.

홱.

최우의 부인 정 씨의 일가라, 기대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정 씨 부인이 만나 주지 않는다면.

정 씨 부인이 남편인 최우와 만나게 해 준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이규보는 이민호를 돌아보았다.

그때.

“이 거사께서 이제야 눈치채셨나 봅니다.”

땡중 해심이 이규보를 쳐다보았다.

이규보는 귀에 들린 땡중 해심의 말에 흠칫하더니, 해심을 돌아보았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스님?”

땡중 해심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만큼 얻는 것도 큰 것이 세상 이치이지 않습니까?”

해심은 미소 지었다.

“허.”

이규보는 땡중 해심을 보며 다소 어이없다는 기색을 띠었다.

두 사람의 대화 아닌 대화에 서윤, 서풍 형제는 흠칫했다.

서윤, 서풍 형제는 이규보와 해심을 번갈아 보며 영문을 몰라 했다.

“무슨 말씀들을 나누시는 겁니까?”

서풍이 물었다.

서윤은 알 수 없는 것이 주는 의아함에 이규보에게 물었다.

“연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규보는 서윤을 마주 보며,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자 특유의 묘한 눈빛을 띠었다.

지적 우월감과 쾌락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잠시 뒤.

서윤, 서풍 형제는 이규보의 설명에 놀라워하면서도 불안해했다.

“너무 위험천만합니다.”

“무모하지 않습니까?”

땡중 해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나는 내게 이모님뻘이 되는 그분에게…… 흐, 흠.”

과거 사고를 쳐, 그 무마를 위해 출가했다. 그러니 정 씨 부인이 안 만나 줄 수도, 내칠 수도 있다.

서윤은 가만히 이민호를 응시했다.

‘지모가 있는 듯 보이긴 하지만, 너무.’

아슬아슬하다.

만에 하나라도 예상과 다른 일이 생긴다면.

서윤은 아득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내리감고 말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민호에게 일임하고 지켜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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