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40화 (40/247)

<-- 40 회: 2-11 -->

최우의 두 서자 만종, 만전 형제가 무사들을 대동하고 이틀 전에 남경에 왔단다.

기록에 전하는 것처럼 천하에 다시 없을 개차반답게 온갖 패악질을 다했다.

남경의 행정을 관할하는 수장인 남경유수南京留守도 모른 척했다고 한다.

두 싸가지 없는 놈들 뒤에 최충헌의 장자인 최우가 있으니, 안 봐도 뻔하다.

만종, 만전.

이 두 놈이 3층 기와 전각 난간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무심코 길을 보았는데, 때마침 지나가는 한 부부를 보고, 아내가 예쁘장하다 하여 강제로 전각으로 끌고 들어갔다고 한다.

아내가 끌려가는 것을 본 남편이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항의했지만 만종, 만전 두 형제를 호종하며 함께 남경에 온 무사들에게 저렇게 두들겨 맞고 있다고 한다.

아내는 지금쯤이면 3층 기와 전각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 상황을 말해 준 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형제가 아주 개망종이라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록대로구만.’

만전.

나중에 중이 되었다가 최우의 뒤를 이어 최씨 무신 정권의 세 번째 권력자가 되는 최항이다.

계모 대 씨를 비롯,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통해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런 한편으로 죽은 지 아버지 최우가 아끼던 소실을 그만 꿀꺽(?)해 버린 천하 개상놈이다.

그것도 상복을 벗지 않은 채.

‘옛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하더니만.’

죽을 때까지 패악질로 일관한 최항.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눈을 반짝였다.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만종, 만전 형제를 발판으로 보다 쉽게 최우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잘만 하면 최우로부터 어느 정도 양보(?)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땡중 해심을 통해 최우의 부인인 정 씨를 만나, 최우와 자리를 함께하는 것은 성사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미정이다. 하지만 지금 만종, 만전 두 형제를…….

‘흠.’

나는 내심 짤막한 침음을 흘리며 머리를 굴렸다.

최우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두 서자 만종, 만전.

‘끼어들어야 할까? 이대로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기회가 좋은데.’

신중해야 했다.

타인의 약점을 잡는 것도, 약점을 빌미로 양보를 얻어 내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상대에게 반감을 주게 되면 도리어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상대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최충헌의 장자 최우라면 신중하고도 신중해야 한다.

‘전하는 기록을 보면 최우의 그릇이 상당히 크긴 하지만, 반면 사치가 극심했고 남다른 권력욕을 가진…… 알 수 없지. 자신에게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아들에 관한 일이니까 말이야.’

전해 내려오는 기록만 믿고 덥석 일을 저지르기에는 조금 꺼림칙하다.

최우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매우 크게 엇갈리는 자다.

그런 이유로 후세의 평가가 제각각이다.

그래도 나름 괜찮은 집권자였다.

몽고의 침입으로 백성들이 죽어 나감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즐긴 부패한 권력자.

최우는 그런 호불호가 갈리는 사람이다.

나는 숙고하려 하였다.

‘잘 생각해야 해. 덥석 일을 저지르기에는 부담스러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사람 살려요. 여보오오!”

난데없이 여자의 자지러지는 외침이 들렸다.

난 흠칫했다.

주변에 몰려서 있는 사람들과 공히 동일하게 고개를 들어 3층 난간을 보았다.

만종, 만전 형제를 호종한 12명 어림의 무사들과 구타당하던 중년인들 역시 3층 난간을 올려다보았다.

성인 허리 바로 밑까지 올 듯한 높이의 난간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난간에 바짝 붙어 몸을 숙여 아래를 보았다.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 어깨와 등으로 길게 늘어뜨린 여인은 서른 안팎으로 보였다.

불어오는 바람 탓인지, 아니면 몸을 흔들기 때문인지, 삼단 같은 머릿결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여인의 외모는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상당했다.

아주 뛰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여느 여인들보다는 뛰어났다.

100명에 1명 있을까 말까 한 미모랄까?

여인들 중 치장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부류가 기녀들이다.

여인은 기녀들 못지않았다.

한데.

괴이하게도 얼굴에 다수의 구타 흔적이 역력했다. 심하게 얻어맞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입은 부어터졌으며 왼쪽 귀에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고, 상의는 찢어지고 벌어져 가슴의 두 수밀도 일부가 보였다.

여인은 울며불며 도움을 청하는 한편, 남편으로 보이는 중년인을 쳐다보며 연방 소리쳤다.

“여보오오.”

안타까움이란 감정이 그득 실린, 도움을 청하는 음성이 메아리쳤다.

그 모습이 보기에 여간 애처로운 것이 아니다.

곧 여인의 뒤에 험상궂게 생긴 한 사내가 나타났다. 상체를 벌거벗은 사내는 난간에 서 있는 여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리낌이라곤 없었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울고 불며 소리치는 여인의 뒤에서 손을 뻗었다.

와락.

사내는 여인의 머리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이년이.”

성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돌아섰다.

“아아악.”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사내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여보오오오.”

안타까움과 깊고 깊은 비애가 그득 담긴 여인의 외침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난간 아래 길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그 광경을 고스란히 다 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몇몇 남녀가 비명과 규탄의 고성을 내질렀다.

“꺄아악.”

“저, 저런.”

“저런 죽일 놈을 보았나?

다들 말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3층 기와지붕의 전각을 등지고 선 12명 어림의 무사를 향했다.

적의가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무사들은 너나없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사들은 시선을 좌우로 돌려 동료들을 보았다.

어쩌지?

그들의 행동에서 그런 속내가 엿보였다.

무사라 그런지, 대가 세 보이는 몇몇 무사가 몰려 있는 사람들을 향해 두어 걸음 내디뎠다.

은연중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맴도는 눈으로 몰려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꺼려.”

“이놈들이.”

“흩어지란 말이야.”

거친 목소리로 고함쳐,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꼼짝하지 않자, 몇몇 무사는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을 띠며 허리춤에 찬 검으로 손을 뻗었다.

채, 챙.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나지막한 소리들이 잠시 울렸다.

몇몇 무사는 다시금 몰려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서너 걸음을 내디디며, 위협할 요량으로 각자 빼 들어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휘, 휙.

두서없이, 불규칙하게 휘두르는 검에 몰려 서 있는 사람들은 움찔했다.

검을 휘두르는 위협에 겁먹은 모습들이었다.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힉.”

“흐윽.”

다들 꺼리는 얼굴빛을 띠며 무사들과 거리를 벌리려 했다.

난 그사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화가 난다. 상놈의 자식이란 말이 절로 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 말은 여인의 머리를 움켜쥐고 질질 끌어 3층 안쪽으로 사라진 놈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호위하는 무사가 12명이다.

무사들은 죄다 검을 소지했다. 반면 나는 빈손이다.

이렇다 할 무기가 없다.

내가 무슨 절대 고수도 아니고 빈손으로 검을 든 12명을 상대한다?

사양하고 싶다.

용감한 것과 무모한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타임 워프를 하며 12세기 고려 무신 정권 시대로 떨어지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내게 변화가 생겼다.

왜구를 상대할 때처럼, 용감무쌍하게 뛰쳐나가 미친 듯이 무사들과 싸우면 까짓 무사 열둘쯤 못 죽일까?

뭐 그 과정에서 나도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해야 할 그런 깊은 상처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무사들은 왜구가 아니란 점이다.

비록 만종, 만전. 두 개호로자식을 호종하긴 했지만 엄연히 고려인이다.

왜구처럼 마구잡이로 죽이기에는 껄끄럽다.

뭔가 희생을 줄일 만한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없을까?

나는 주변으로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다.

시야에 조금 떨어져 있는 한 좌판이 보였다. 좌판을 보는 순간 머리에서 뭔가가 번쩍 떠올랐다.

사극 드라마를 보면 늘 귀부인이 나온다.

왕후나 비빈들.

그녀들의 머리, 흔히 가채라고 말하는 것에는 각종 장식물이 꽂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떨잠과 머리꽂이다.

달리 반자, 보요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장식물 중에는 끝이 송곳이나 포크처럼 날카롭고 양쪽으로 갈라진 것이 몇 있다.

머리 깊숙이 꽂아 고정하는 화려한 문양의 장식물은 민간에도 유포되어, 부유한 세도가의 부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었다는 기록이 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돌아서며 서둘러 좌판을 향해 뛰었다.

타닥.

표창 대용으로 그만일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