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39화 (39/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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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남경을 거쳐 개경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현대 같으면 두어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인데, 걷고, 말을 타며 가는 터라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게다가 묵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늘 노숙을 해야 했고, 밥을 지어 먹어야 했다. 그 때문에 묵이 짐이 실린 서너 마리의 나귀를 끌었다.

노숙을 할라치면 묵이 11명이 먹어야 하는 밥을 혼자서 다 지어야 했다.

아무도 묵을 도와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다시금 신분제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보다 못해 내가 나서서 도와주었다.

길을 갈 때, 내가 탄 말에 묵이를 태웠다.

나는 묵이가 끄는 나귀들을 이은 줄을 손에 쥐고 걸었다. 양심상 나보다 한참 어린 묵이가 나귀를 끌며 걷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걷는 것이 마음 편했다.

“나리.”

묵은 매우 난처하다는 얼굴로 애타게 날 보았다.

“마! 잔말 말고 앉아 있어. 나이도 어린놈이.”

일부러 성난 척하며 묵이에게 대꾸했다. 그런 내 언행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서윤은 마뜩지 않아 했고, 서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날 보았다.

이규보, 풍, 땡중 해심, 5명의 가병.

그들의 시선 역시 서윤, 서풍 형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 짐짓 그들의 시선을 못 본 척하며 걷고 또 걸었다. 움직이는 속도는 걷는 이들에게 맞춰졌다. 그 때문에 매우 느렸고, 자주 쉬었다.

간혹 기와집이라도 보일라치면 다들 반색했다.

가지고 온 짐 중에서 얼마간 양식과 면포를 건네주고 끼니를 해결하는 한편, 이슬을 피할 잠자리를 마련했다.

‘망할.’

조선 시대에는 주막이라도 있지만 고려 시대에는 그런 것도 없다.

큰 마을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따뜻한 아랫목이 있고, 두툼한 이불이 있으며, 방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다른 사람들은 별반 감흥이 없었지만, 현대를 살았던 내게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생에 고생을 해 가며 남경에 당도했다.

옛 서울.

그러니까 조선 왕조가 창업하며 한양이 되기 전의 남경은 상당히 번화하고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못해도 수만여 명이 상주하는 것 같았다.

고풍스러운 기와집들이 나란히 이어졌고, 길은 널찍널찍했다.

다수의 사람이 길을 오가고, 가끔 소가 끄는 수레가 지나갔다.

나를 포함한 일행들은 한강, 그러니까 한수라 불리는 강을 낀 포구 인근으로 향했다.

물자가 오가는 포구 인근이 번화가인 듯했다.

마포 나루라 불리는 유명한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포구 인근은 사람들이 상당히 붐볐다.

여각에 짐을 풀고 방에 들었다.

길을 오는 내내 여독이 쌓여 목욕이 간절했다. 다른 사람들은 별로 목욕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넌지시 묵에게 말했더니, 재빨리 목욕 준비를 해 주었다.

허름한 곳간 같은 곳에 큼지막한 나무통을 갖다 놓고, 데운 온수를 부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서둘러 옷을 벗고 냅다 나무통에 들어가 앉았다. 묵이 내 목욕 시중을 들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돈 아니지. 베와 쌀이 실질적인 화폐였지. 끙.’

삼한통보나 동국통보, 백금, 은병 등.

다수의 화폐가 통용되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류층, 그러니까 귀족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일반 양민들은 양곡과 베를 주요 화폐로 삼아, 일종의 물물교환으로 필요한 것을 구했다.

상하가 따로 놀았다.

난 고개를 가만히 내저었다.

절레절레.

이놈의 고려 무신 정권 시대는 적응이 영 안 된다.

슬쩍 뒤에 서 있는 묵을 돌아보았다.

“쌀 많이 줬냐?”

“조금요.”

묵이 대답하며 살며시 웃었다.

“암튼 수고 많았다.”

시선을 바로 하며 뜨뜻한 온수에 몸을 푹 담갔다.

묵이 고운 명주 천으로 벗은 내 상체를 밀기 시작했다. 어색했다.

내가 언제 목욕 시중을 받아 봤어야지.

“됐어. 내가 할 테니 넌 나가서 쉬어.”

“네?”

묵은 어리둥절했다.

“그냥 나 혼자 있게 해 달라고.”

“나리, 그럼 시중은요?”

“필요 없어.”

“그래도.”

묵이 말을 흐렸다.

안 나갈 것 같아, 일부러 화난 척 목소리를 높였다.

“나가!”

“예에에.”

묵은 머리를 숙여 굽실거리며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곧 고갤 숙여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딱 민속촌이구만. 하아아아.”

정말 막막하다.

그저 눈앞이 아득 그 자체다. 어떻게 12세기 고려에서 살아야 할지 암담하기만 하다.

“마아앙하아아아알!”

길게 소리쳤다.

날이 저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달랐다. 일찌감치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기록이 맞는 것 같다.

고려와 조선 시대는 해가 떨어지면 일찍 자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라이프 스타일이라더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묵이 놈도 일찍 자는지 보이지 않았다. 줄레줄레 여각 밖으로 나갔다.

가만히 방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다.

이부자리에 들어가 누워, 말똥말똥 줄곧 천장만 바라보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는 것이 꽤 곤욕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에 밤 마실이나 할까 했다.

내 눈에 들어오는 남경의 밤거리는 딱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하는 세트장이었다.

길 양쪽으로 여각과 객주로 보이는, 기와지붕이 얹어진 가옥들이 정연하게 위치해 있었다.

거리에는 밝은 유등이 내걸려 제법 운치 있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을 구경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십十자 형태의 갈림길 우측에 있는 3층 기와 전각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왁자지껄.

떠들썩해, 궁금했다.

“뭐지?”

난 의아해, 몰려 있는 사람들을 향해 빠른 걸음을 내디뎠다.

“저, 저.”

“저런 무뢰배들을 보았나?”

“세상에 어찌 저런 무도한 놈들이!”

사람들이 앞을 바라보며 손가락질했다. 다들 격한 얼굴이었다.

3층 기와 전각을 등지고, 손에 검을 든 다수의 무사가 서 있었다.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딱 조폭이었다.

“응?”

어리둥절했다.

무사들 중 일부로 보이는 5명의 무사가 땅에 쓰러진 한 중년인을 개 패듯 구타하고 있었다.

퍼퍼퍽.

각자 손에 쥔 검집으로, 발을 들어 무작스럽게 중년인을 팼다.

‘허얼.’

그 광경이 난 어이없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좀 많은가? 그런데도 그 많은 이목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을 두들겨 패다니.

무슨 무법 천하도 아니고.

내 눈에 보이는 구타당하는 중년인은 평민인 듯했다.

품이 넓은 하의와 얼핏 개량 한복이 생각나는 상의를 입었다.

머리에는 띠로 고정하는 머리쓰개를 했다.

중년인은 서른둘셋쯤 되어 보였는데, 얼굴과 몸이 엉망이었다.

주룩.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코피를 줄줄 흘렸다. 얼굴에 몇몇 퍼런 멍이 들었고, 적잖게 부풀어 올랐다.

몸에는 흙먼지가 가득 묻었으며, 조금이라도 덜 맞기 위해 중년인은 굽은 새우처럼 몸을 말았다.

그 모습이 보기에 여간 애처로운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보고 있자니 절로 혀 차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으으으…….”

중년인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중년인을 패는 무사들 외에, 3층 기와 전각을 등진 무사들은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안 꺼져!”

“죽고 싶어! 엉!”

“흩어져.”

무사들은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위협 조로 고함쳤다.

몰려든 사람들을 흩어 놓으려 하였으나, 사람들은 쉽사리 흩어지려 하지 않았다.

겁먹긴 하였으나, 무사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았다.

일종의 반발이라고나 할까. 몰려든 사람들에게서 그런 감정이 엿보였다.

난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저기.”

옆에 있는 한 사람에게 말을 붙였다.

“뭐요?”

“여기에 왜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겁니까?”

“이 사람이. 보고도 모르시오.”

옆에 서 있던 서른네다섯 되어 보이는 양민으로 보이는 이가 날 나무랐다.

그래도 제법 친절하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자세히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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