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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다음 날, 평소 서양헌이 서가의 잡다한 업무를 보는 전각에 양광도 남부와 중부의 한다하는 지방 호족들이 모였다.
널찍한 탁자 좌우에 앉은 호족들은 내 설명에 이어, 서양헌의 도움을 청하는 말에 분분히 각자의 의견을 내놨다.
“왜구가 복수를 위해 올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놈들은 본시 노략질을 하려 들 것이니.”
복수하러 올 가능성이 낮지 않느냐?
그런 의도의 말을 쏟아 냈다.
“이제까지 다들 각자 알아서 해 왔는데, 난데없이 힘을 합치자는 것이 그리 가슴에 와 닿지 않소이다그려. 각 가문의 가병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오. 설사 하나로 모은다고 해도 누가 그들을 이끈단 말입니까?”
몇몇 호족들이 서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의견을 내놓았다.
각 호족이 가진 가병들을 이끈다는 것은 은연중에 호족들의 수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지방 호족들은 각자 알아서 지금껏 해 왔다. 그런 이유로 무리를 짓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피력했다.
자신들 머리 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매우 꺼렸다.
호족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각자의 의견을 내놓으며 질질 시간을 끌었다.
“잠시 여러 장자님들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탁자 중앙에 앉은 서양헌의 우측에 있던 이규보가 일어났다.
나는 탁자 좌측 끝, 말석에 앉아 있었다. 일어나는 이규보를 쳐다보는데.
순간.
“어!”
놀라, 당황했다.
이규보는 내 거처에 있던, 내가 며칠 전부터 밤마다 머리를 쥐어짜 낸 결과물이 적힌 다수의 종이를 탁자에 흩트려 놓았다.
“한번 보시지요.”
이규보는 다수의 종이를 앉은 호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 양반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 제기랄!
좀 더 관리에 신중했어야 했는데.
종이에 쓰인 것이 뭔지 누가 알까?
내 거처에 누가 몰래 들어올까?
등등…….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이!’
이규보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도둑!’
도둑질 아닌가?
이규보는 내 시선을 느낀 듯, 은연중에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모습이 딱이다.
이규보는 호족들에게 이민호가 쓴 종이를 나누어 주며, 이민호를 흘낏거렸다.
‘후후.’
일전에 본 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집사 김명수를 시켜 가져오게 했다.
‘조금 께름칙하지만, 다 모두를 위한 일이니. 일이 잘 풀린 후, 잘 얘기하면.’
이규보는 이민호가 이해해 줄 것이라, 너그러이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이, 이건 노가 아닙니까?”
“삼시 연발법이라니, 그게 뭡니까?”
“허.”
“새, 새로운 소금 제조법 같습니다만.”
호족들은 다양한 반응을 내놓았다.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 놀라는 사람 등등.
차츰 호족들의 이목은 적잖은 재물을 손에 쥘 수 있는 소금에 모아졌다. 왜구라는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로 대변되는 잿밥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서양헌은 눈을 반짝이며 배석한 호족들을 돌아보았다.
“그 제조법이면 이전보다 더 많은 소금을 싼값에 얻을 수 있습니다. 하니, 왜구들에 맞서 싸우는 데 소요되는 전비는 충분히.”
재정은 아무 문제가 없다.
서양헌은 그 점을 피력했다.
호족들은 너나없이 서양헌을 쳐다보며 말을 쏟아 냈다.
“서 장자長者, 지금 당장 개경으로 사람을 보냅시다.”
“그렇습니다. 교정도감敎定都監의 허락을 받아 염전을 만들면, 족히 수백 만금의 재물은 모을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하.”
“어디서 이런 신통방통한 것을 생각하셨소이까, 서 장자?”
호족들은 왜구를 막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들 교정도감의 허가 및 묵인을 얻어 재물을 모으려 하였다.
몇몇 호족은 종이에 쓰인 무기와 병법에 흥미를 보였다.
“이 무기들을 만든다면 일당십은 충분히 될 듯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삼시 연발법만 해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병술입니다.”
강효유를 필두로 그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며 병기의 제작을 조심스레 꺼냈다.
일어서 있는 이규보는 답답해했다.
양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앉은 여러 호족들을 돌아보았다.
“지금 소금 때문에 여러 장자님들을 이리 모신 것이 아닙니다. 왜구를 막자고 여러 장자님들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신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였지만, 호족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죄다 소금에 관한 것을 입에 올렸다.
누가 책임지고 염전을 만들 것인가? 이익은 얼마나 될까? 얻은 이익을 어떻게 배분할까?
김칫국을 있는 대로 다 마시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난 기가 막혔다.
‘이 작자들이.’
더 볼 것도 없었다.
“…….”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서양헌은 밖으로 나가는 이민호를 보며 침중한 기색을 띠었다.
‘흠.’
이세존을 통해 이가의 사람임이 입증되었다.
‘이거 참.’
서양헌은 앉은 호족들을 휘둘러보았다.
다들 소금을 언급했다.
모든 것이 이민호에게서 나왔다.
그런데 당사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데, 제3자인 호족들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모든 것이 다 결정된 양 떠들고 있었다.
서양헌은 밖으로 나가는 이민호가 신경 쓰였다.
엄연히 이민호의 것이다.
사전에 양해를 구하거나 이해를 청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주인 몰래 종이들을 가져와 호족들에게 공표해 버렸다.
서양헌은 이민호의 것을 훔친 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다.
이규보를 보았다.
‘흠.’
무턱대고 자신에게 가져와 이런 사단을 만든 장본인이다.
서양헌은 작은 이채를 띠며 곤혹스러워했다.
앉은 주변에서는 호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 탓에 소란스러웠다.
그사이 우측 중간 어림에 앉아 있던 이세존이 일어났다. 옆으로 돌아서며 탁자를 벗어나 출입문으로 향했다.
전각을 나온 내 귀에 호의가 밴 친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게 서 보게.”
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다.
이세존이 날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게는 몇십 대 위의 선조가 되는 터라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이세존은 그새 내게 다가와 서며, 말을 건넸다.
이가로 가자.
가서 촌수를 따져 족보에 이름을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말이었다.
난 정중히 뒤로 미루었다.
왜구와 싸워야 한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죽으면 굳이 족보에 이름을 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살아남으면 그때 이가를 찾겠다.
족보는 그때 정리하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세존은 내게 왜구와 싸우지 말고 이가로 가자고 강권했다.
난 정중히 권유를 물리치고, 이세존과 헤어졌다.
“제기랄.”
서가의 가병들이 수련하는 공터로 향하며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속에서 천불이 날 정도로 화가 났다.
“그게 지들 거야, 뭐야.”
물론 내 거라고 할 수도 없다. 21세기의 지식이니 말이다. 하지만 기분이 더러운 것은 분명하다.
난 가슴에서 이는 울화를, 화풀이하듯 몸을 움직여 풀려 했다.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며 굵은 땀방울을 흘리면 울화가 다소나마 가실 것이다.
“차앗.”
“헙.”
씩씩한 기합이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따다다닥.
나무로 만든 각종 병기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여남은 명 남짓의 서가 가병들이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서로 대치한 채, 각자 손에 쥔 목조 병기들을 휘둘렀다.
격검이었다.
가병들의 동쪽 끝에는 목검을 손에 쥔 조규가 서서, 눈을 반짝이며 한참 격검 중인 가병들을 지켜보았다.
다소 떨어진 주변에는 이정찬이 20여 명의 가병을 데리고 습사習射 중이었다.
퍼, 퍼, 퍽.
사람 형상으로 뭉쳐 만든 짚 뭉치에 가병들이 쏜 다수의 화살이 박혔다.
적중률이 형편없었다.
20여 명이 쏜 이십여 개의 화살 중 짚 뭉치에 박힌 것은 겨우 열두 개 남짓이었다.
나머지는 짚 뭉치 주변 땅바닥에 떨어졌다.
명중률이 6할이었다.
“이!”
이정찬은 발끈했다.
화난 얼굴로 좌측에 나란히 서 있는, 활을 든 20여 명의 가병을 돌아보았다.
“활을 쏜 지 수삼여 년인데, 여태까지 뭘 했기에 똑바로 적중시키지 못해에에!”
쩌렁쩌렁한 노성을 터트렸다.
가병들은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활이 그리 녹록한 병기가 아니다. 쏘고, 쏘고 또 쏘아 적중시킬 때의 감각을 체득해야 한다. 또한 과녁에 화살을 명중시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적정 각도를 잡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화살을 쏘아야 한다.
일련의 모든 것을 몸에 익혔다고 해도 수시로 활을 쏘는 수련을 게을리하면 그 결과가 현저히 나타난다. 명중률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이정찬은 가병들을 쳐다보며 씩씩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