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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 모처럼 각 가문의 자녀들이 만난 뜻깊은, 좋은 자리올시다. 다들 그쯤 하고 한잔들 하십시다.”
애늙은이 같은 어투로 좌중의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서윤은 그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강 공의 말이 지당하십니다. 자, 자! 우리 다 같이 한잔 드십시다. 이 사람이 주인 된 몸으로 일배를 권하겠습니다.”
서윤은 앞에 놓인 잔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앉은 이들을 둘러보았다.
앉은 이들은 저마다 앞에 놓인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풍은 잔을 집어 들며 옆에 앉은 이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강 공.”
금천 강씨 가문의 장자 강희상은 잔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소리를 다 하시네.”
강희상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잡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빙긋.
서혜는 왼손을 들어 가슴에 대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왼편에 앉은 동년배의 여인, 안산 김씨 가문의 차녀 김수경은 잔을 드는 척하며 서혜를 돌아보았다.
“오늘 네 옷차림이 이상한 것 같은데, 혜야.”
서혜는 그사이 앞에 놓인 잔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다 멈칫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자들의 잔에 담긴 것은 술이지만, 여자들의 잔에 담긴 것은 차다.
남녀가 동석한 자리에다 남녀 공히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타인이 없는 공히 부부만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인 까닭에 별도로 차가 준비되었다.
서혜는 좌중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며 김수경에게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중에.”
큰오빠 서풍의 내자, 그러니까 올케 언니가 안산 김씨 가문의 사람이다.
김수경과는 사돈 관계다.
김수경은 나중에 얘기하자는 서혜의 답변에 수긍하는 듯 침묵했다.
“…….”
난 잔을 들지 않았다.
‘썩을!’
이럴 것 같아서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옆에 앉은 서혜를 흘낏거렸다.
‘아우. 진짜.’
내 속도 모르고 불필요한 일을 만든 서혜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도 없고.
‘앓느니 죽지.’
불편한 것은 사양이다.
서혜가 후대를 염두에 두고 인연을 만들어 두라, 나를 청하며 함께 배석하도록 배려했지만, 나는 더는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스윽.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입에서 뗀 잔을 탁자에 내려놓던 이들이 일어나는 날 쳐다보았다.
귀에 당황한 서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일어나는 거예요?”
서혜의 옆에 앉은 김수경은 의아해하며 서혜를 보았다.
‘얘가?’
그녀가 아는 서혜가 평상시와는 달라도 너무 많이 달라 당혹스러웠다.
난 서풍을 향해 돌아서며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이 사람이 몸이 불편하여 이만 자리를 뜨고자 합니다.”
대번에 서윤을 비롯하여 앉은 이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정색하며 불쾌한 낯빛을 띠었다.
너희들끼리 놀아.
난 너희들과 놀기 싫어.
그 말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대번에 이겸창이 말하고 나섰다.
“지금 뭐라 말했는가?”
난 이겸창을 보았다.
“말한 대로입니다. 몸이 불편하여 더는 자리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이!”
이겸창은 험상스러운 인상을 쓰며, 앉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성질깨나 난 모습이었다.
그로 미루어 보아 한 성격 하는 자 같다. 맞은편에 앉은 강희상이 재빨리 이겸창을 만류했다.
“이 공, 보내 줍시다. 공연히 흥만 깰 것이오. 아니 그렇소.”
“에이.”
이겸창은 불쾌감을 표출하듯 다시 의자에 앉더니, 오른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그때였다.
“소인 김 집사이옵니다.”
문밖에서 김명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흠칫하더니 문을 쳐다보았다.
“들어오게.”
“예에.”
대답과 함께 그리 오래지 않아 방문이 열리며 김명수가 들어섰다.
김명수는 문을 등지고 서서, 서윤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서윤이 묻자, 김명수는 머리를 들어 멍하니 서 있던 날 슬쩍 바라보았다.
“장자 어른께서 이 공을 찾으십니다.”
“아버님께서?”
서윤은 어리둥절했다.
난 김명수의 말에 움칫했다.
‘혹시?’
짚이는 것이 있다.
내가 광주 이씨라고 했으니 확인하려고 시도를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 서가에 양광도에서 한다하는 지방 호족들이 대거 모여 있으니 좋은 기회가 아닌가?
어쩌면 광주 이가의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후우.’
난 속으로 심호흡했다.
예상하고 준비했지만 과연 서양헌에게 먹혀들지 모르겠다.
‘제발 내가 기억하는 이름이 통해야 할 텐데.’
나는 마음속으로 걱정했다.
그동안 필사적으로 아버지에게 들었던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 짜냈다.
서혜는 나와 김명수를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했다. 다소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김수경은 서혜를 유심히 돌아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 무심했다.
서가의 가병들이 수련하는 공터에 시끌벅적한 각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공들이 제각기 각자의 악기를 연주했고, 공터 중앙에는 가려 뽑은 여종들이 춤을 추었다.
공터를 마주 보는 정동향에는 한일자의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에는 다수의 장년인이 앉아 연회를 즐겼다.
중앙에는 서양헌이, 양쪽 옆으로는 친분과 교분에 따라 자리 배치가 이루어져, 다수의 지방 호족이 앉아 있었다.
다들 음주 가무를 음미하듯 만끽하며 정담을 나눴다.
난 서양헌이 앉은 탁자 우측.
공터 북향에 있는 탁자를 마주 보며 섰다.
탁자 좌측 끝, 두 번째 의자에 앉아 있는 원만한 얼굴의 장년인.
광주 이가의 수좌 이세존.
이세존은 손에 빛바랜 서책을 들고, 매서운 눈초리로 날 보았다.
이세존의 좌측에는 척 봐도 무척 오래되어 보이는 몇 권의 서책이 쌓여 있었다.
“그래.”
이세존은 의심스럽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내가 광주 이가를 사칭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빤히 보이는 몇몇 질문을 퍼부었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것을 회상하며 힘겹게 대답을 이어 나갔다.
마음 한구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하지만 각자의 행복을 위해 이혼한 양반들이라, 고등학생 때부터 혼자 자취하며 살아온 터라, 가능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빌어먹을.’
울적해졌다.
이세존에게 대답하는 사이 머릿속에서 한때 단란했던 우리 가족의 과거가 떠올랐다.
죄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만 하지 않았어도, 어머니가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지치지만 않았어도.
‘이제 와 뭘 어떻게 하겠다고.’
난 마음속으로 체념하며 이세존을 보았다.
이세존은 내내 내게 날카롭게 질문했다.
“자네가 말한 분은 살수에서 거란군에 의해 죽은 분이시네. 그런데 그분이 실은 살아 있었고, 거란군에 포로로 끌려가 대식국으로 팔려 갔다는 자네 말은 믿기 어렵네.”
난 반문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속으로 중얼거렸다.
‘할배, 내가 당신의 자손이란 말입니다.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드실 겁니까?’
답답해도 이만저만 답답한 것이 아니다.
마주 보는 이세존은 내게는 몇십 대 위의 할아버지뻘일 게 뻔하다.
이세존은 냉정한 목소리로 내게 요구했다.
“자네가 우리 이씨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자네 말을 믿기는 어렵네.”
이 양반이 진짜.
뭔 놈의 증거가 있…… 그, 그렇지.
난 눈을 반짝이며 급히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서양헌을 비롯한 탁자에 앉은 지방 호족들이 내 행동에 어리둥절했다.
“저, 저.”
“지금 뭐하는 짓인가?”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옷을 벗는단 말이냐?”
몇몇 고성이 귀에 들렸다.
서양헌의 우측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는 강효유는 탈의하는 이민호를 주시하며 눈을 반짝였다.
고개를 좌로 돌려 앉은 이규보를 보았다.
“이가 사람이 맞긴 한 겁니까, 삼혹호 선생?”
이규보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제가 보기에는 맞는 것 같습니다만, 이가 사람임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만, 엄연히 이가의 내부 일이고 보면 함부로 나서기가 꺼려지는군요. 강 장자님.”
이규보의 가문은 엄연히 양광도에 근거를 둔 지방 호족 출신이다. 그런 이유로 동일한 양광도의 지방 호족들과 나름 친분이 있다.
서가와는 오랫동안 교분을 나눠 왔다.
강효유는 안면이 있는 이규보의 말에 궁금증이 생겨 얼마 전에 이민호를 찾아가 한번 보았다.
“맞긴 한 것 같은데.”
강효유는 거란군에 포로로 끌려가 먼 대식국에서 자손을 낳았다는 것이 기실 긴가민가했다. 대식국에서 온전히 피를 지키며 자손을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까닭이다.
그사이 나는 웃옷을 벗고 왼쪽 어깨를 이세존을 향해 내밀었다.
삼각형의 형태로 모인 세 점.
이세존은 내가 왼쪽 어깨를 내밀자, 눈에 들어오는 삼성점에 놀란 기색을 띠며 상체를 내밀었다.
“그, 그것은…….”
“아버님이 그러셨습니다. 서너 대를 두고 우리 집안에 이렇게 삼성점을 갖고 태어나는 이들이 몇 있다고 말입니다.”
“…….”
이세존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서둘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를 벗어났다. 내게 달려오더니, 면전에 서서 내 왼쪽 어깨를 요리조리 자세히 살폈다.
난 점을 세심히 보는 이세존을 보며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우.’
독특한 유전인자에 마음속으로 감사했다.
‘아, 진땀 나.’
이세존은 격동이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트, 틀림없네. 자네 말대로 우리 이가 사람들은…… 맞네. 자네 틀림없이 우리 이가 사람이 맞아.”
천만다행이다.
‘아, 씨이. 이가 후손이 그럼 이가지 최갑니까? 내가 비록 몇백 년 후에 태어나긴 했지만, 엄연히 광주 이씨 가문 자손이란 말입니다.’
사람 머리 돌게 만든다.
정말.
아! 이마에서 진땀 나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