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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는 속보로 걸으며, 연이어 뒤돌아보았다.
힐긋힐긋.
조금 전에 이민호가 얼굴을 내밀며 빨리 걸으라고, 두 시비와 묵이를 떨어뜨려 놓자고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순간, 망설였다.
그런데 이민호가 덥석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는 빠르게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서혜는 이민호에게 끌려가며 얼굴을 붉혔다.
남자가 먼저 여자의 손을 잡는 것은 고려 풍속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손을 잡는 것 자체가 매우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서혜는 내심 부끄러웠다.
남자처럼 갑주를 입고 검을 차고 전장에 나설 정도로 활달하고 적극적이지만, 여자는 여자다.
언덕배기에서 아무 저항 없이 이민호에게 입술을 내준 그 시점부터 자신은 이민호의 여자라는 등식 아닌 등식이 성립해 버렸다.
입술을 내준 것은 마음을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고려 여인들은 자유로운 연애결혼이 아니라 가문 대 가문이 결합하는, 부친이 관여하는 정략혼이라고 볼 수 있는 혼인 관계가 많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연애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분제 사회인 고려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자유로운 연애결혼이 성행했다.
두근두근.
서혜는 왼손을 들어 가슴에 대며, 자신을 끌고 뛰는 듯 걸어가는 이민호를 보았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며 마구 뛰었다. 주체할 수 없는 떨림과 흥분이라는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일었다.
몇몇 호족 가문과 집안끼리 왕래가 있었다.
만나는 타 가문의 이들은 죄다 문인 성향을 띠었다. 곧잘 당시 같은 것을 읊으며 자신을 돋보이려 노력했다.
그런 이들만 보던 서혜에게 21세기 연애 스킬을 구사하는 이민호는 매우 색다르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사람이다. 무슨 블랙홀처럼 자신을 마구 끌어당겼다.
서혜는 얼굴을 붉힌 채, 이민호가 끄는 대로 이끌려 빠르게 걸었다.
자고로 연애 스킬 중에 로망이라는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몇 있다.
으슥한 담.
달빛이 살며시 스며들듯 비추는 협소한 소로에 서혜와 이민호가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서혜는 이민호가 자신을 벽에 살며시 밀어붙이고는 얼굴을 내미는 것에 내심 크게 당황했다.
‘어, 어떻게 해.’
슬쩍 옆으로 얼굴을 돌리고, 자신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는 이민호의 대시에 서혜는 살며시 눈을 내리감았다.
가슴이 미친 것처럼 쿵쾅거리며 마구 뛰었다.
쿠쿠쿠쿠쿠쿵.
이대로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렜다.
혈관을 따라 도는 피의 흐름이 급격히 거세졌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희열과도 같은 요상한 감정이 일어났다.
‘학, 하악.’
서혜는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어, 속으로 가쁜 숨을 쉬었다.
뭐랄까?
자신이 살얼음인 양 스르륵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파르르.
서혜는 그 느낌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 순간.
무엇인가가 서혜의 입술에 닿았다.
이민호의 입술.
서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넋이 나간 듯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다.
서혜는 잔떨림을 흘리며 양손을 어정쩡하게 들었다.
내린 것도, 든 것도 아닌 팔은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떨렸다.
이민호가 얼굴을 떼더니, 자신의 우측 귀에 다시 얼굴을 살며시 갖다 댔다.
작은 소곤거림이 귀에 들렸다. 그와 함께 이민호의 숨결이 귓불에 닿았다.
서혜는 몸에서 힘이 쭈욱 빠지는 것에 서 있기 힘들었다. 그저 몸을 떨며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민호에게 내맡겼다.
나는 확실히 내 여자로 마침표(?)를 찍어 놓은 서혜와 함께 한 전각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한일자의 긴 탁자가 보였다. 탁자에는 다수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왁자지껄.
제법 시끄러웠다.
죄다 양광도 남부와 중부에서 목에 힘깨나 주는 지방 호족 가문의 자녀들이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앉은 자리를 즐겼다.
탁자 중앙에는 서가의 장자 서윤이 앉아 있었다.
서윤의 좌측에는 차자인 서풍이 있었고, 맞은편과 옆에는 다수의 남녀가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서혜와 들어서며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동안 탁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은 자리는 문 맞은편에 있는 두 자리뿐이었다. 달리 선택이 없어, 서혜와 함께 남은 두 자리로 향했다.
저벅저벅.
앉아 있는 남녀들의 시선이 나와 서혜에게 모여들었다.
남은 두 자리 왼쪽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서혜와 동년배로 보이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서혜를 그녀의 옆자리로 유도하며, 앉을 의자 뒤에 섰다.
난 서혜를 돌아보며, 내가 양손으로 잡은 의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서혜는 엉거주춤 서서 탁자에 앉은 이들의 눈치를 보았다.
남존여비 사상이 있는 고려 사회에서 내 행동은 몹시 당혹스러운 것이라, 서혜는 잠시 망설였다.
“앉아요.”
내가 재촉하자, 서혜는 앉은 이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의자로 다가왔다.
나는 서혜가 앉으려 하자, 살며시 의자를 밀어 넣어 주었다.
21세기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레이디 퍼스트니까 말이다.
서혜는 불편해했다.
무엇보다도 큰오빠 서윤이 못마땅한 속내를 가감 없이 얼굴에 드러내며 매섭게 쳐다보았다.
둘째 오빠 서풍 역시 눈살을 찌푸려, 서혜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남존여비는 유교 사상의 근간 중 하나다.
탁자에 앉아 있는 이들이 나에 대해 진한 꺼림과 옅은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서윤의 우측에 앉은, 서윤과 두어 살 남짓 나이 차이가 나 보이는 이가 날 보며 언성을 높였다.
“어디서 오랑캐의 풍습을 배워 와 내 눈을 어지럽히는가?”
언성이 상당히 커, 대번에 좌중이 싸해졌다.
탁자에 앉은 남녀 모두의 시선이 나와 언성을 높인 이에게 쏠렸다.
‘뭐야?’
난 어안이 벙벙했다. 언성을 높인 이를 바라보았다.
서윤은 흠칫했다.
서가에서 여는 모임이라, 자연 자신이 좌장이 되었다. 그런데 우측에 앉은 인주 이가의 장자 이겸창이 화냈다.
어찌 보면 자신을 무시하는, 서가를 욕보이려는 언동이라 심중 불쾌감이 일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말석에 앉은 이민호는 자신의 가문 서가의 식객이다.
자고로 개를 때리는 것은 그 주인을 욕보이는 짓.
이겸창의 언동은 서가에 대한 무례로 충분히 간주될 수 있다.
한데, 이겸창이 언급한 것이 오랑캐의 풍습이다.
유교 사상에 젖은 서윤으로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겸창이 언성을 높이자, 탁자에 앉은 다른 이들이 너나없이 항의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가 어디라고.”
“듣기로 광주 이가 사람이라는데, 어찌 저와 같은 행동을 할 수가 있답니까?”
“참으로 못 볼 것을 보았음이 아닙니까?”
꽤 시끄러웠다.
‘아, 이것들이 근데.’
난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눈치챘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내 왼편에 앉은 서혜를 곁눈질했다.
서혜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좌불안석이었다.
난 느긋하게 앉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 최초로 말을 꺼낸 이겸창을 보았다.
“뉘십니까?”
사극 톤으로 물었다.
이겸창은 자부심이 충만한 목소리로 내게 대꾸했다.
“나는 인주 이가의 장자 이겸창이다.”
“…….”
나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듣긴 들었는데 생각이 안 나네. 이거 참.’
인주 이가.
분명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난다.
‘망할.’
점잖게 이겸창에게 말을 건넸다.
“소생이 살았던 곳이 대식국이라…… 아직 고려의 풍습을 많이 알지 못하는 탓이니, 가히 허물치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영 거북하다.
편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극 톤으로 조심조심 말하려니, 내 성질을 마냥 눌러야만 하는 까닭에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쌓인다.
마음 같아서는 화악! 그냥.
“에이.”
“진정 이가의 사람이 맞는 것입니까?”
다들 못마땅한 기색을 띠었다.
서풍의 우측에 앉은 이가 좌중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