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28화 (28/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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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아챈 듯 재빨리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 그래.”

난 말을 더듬거리며 고개를 까닥였다.

언제 애를 부려 본 적이 있어야지.

나이가 든 다 큰 놈이라면 분대원 다루듯 하겠지만 이제 갓 애티를 벗은 소년이니.

‘이거 참.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선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사이 김명수를 따라 묵이 밖으로 나갔다.

타이라노 번의 포구.

포구에는 수십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척당 40~50명이 타는 제법 큰 배에 수십여 명의 인부들이 달라붙어 한창 수리 중이었다.

다카요시는 정박한 배들을 둘러보았다. 뒤로 요시미츠가의 가신들이 따랐다.

가신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이제 곧 있을 출정이 요시미츠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가장 속도가 빠르고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 배들로 준비해라.”

다카요시는 가신들에게 지시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카요시 사마, 저희들의 목숨을 걸고 완벽하게 배를 준비하겠습니다.”

“낭인들은?”

“각지에서 속속 모여들고 있습니다.”

“무기와 식량 그리고 물도 넉넉히 실어라.”

“네.”

다카요시는 가신들의 대답을 들으며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었다.

산 같은 크기의 배가 눈에 들어왔다.

일찍이 야마토에 조선술을 전한 것은 백제였다.

기록에 보면 백제의 조선공이 만든 크고 튼튼한 배를 ‘백제의 배’라고 불렀다는 구절이 있다.

즉, 백제가 일본에 조선술을 전하지만 않았어도 왜구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 열도와 한반도를 오갈 수 있는 조선 시대가 되어서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게 뻔하다.

결국 지들 섬 내에서 지들끼리 치고받으며 죽고 죽이는 전쟁을 계속해 나갔을 것이다.

뭐하러 백제가 일본에 조선술을 비롯한 각종 문화를 전해 주었는지, 그 때문에 후손들이 얼마나 일본에 시달리고 당했는지 선조님네들이 알란가 모르겠다.

썩을!

배를 올려다보는 다카요시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발했다.

‘반드시.’

다카요시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전대 가주였던 형 키요하라가 고려로 출정하여 만족스러운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 바람에 노한 번주 류켄이 형에게 할복을 명했다.

그 결정에 별다른 감정은 없다.

형이 죽음으로써 자신이 요시미츠가의 가독을 이으며 가주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죽을 때까지 평생 형의 신하이자 가신으로 살았을 것이다.

형이 죽고, 자신이 가주가 됨으로써 타이라노 번 최고의 미녀라는 형수 나나에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지 않은가?

그것만 해도 어딘가?

‘칙쇼!’

다카요시는 분했다.

막부와 천황의 갈등과 암투는 한껏 고조되고 있었다. 타이라노 번 인근에 있는 타 번들은 죄다 막부파 아니면 천황파다.

타이라노 번도 두 세력 중 하나에 가담해야 한다.

그 시기는 어느 쪽이 확실한 우세를 점하는지 눈에 보일 때다.

그 전까지 힘을 축적하고 타 번의 침략을 막을 준비를 완벽하게 갖춰 놔야 한다.

그러자면 군량미와 전비로 쓸 재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당장 번의 백성들의 배를 채울 수 있는 양식이 가장 절실한 형편이다.

타 번에 비해 산과 해안이 많은 타이라노 번은 농사를 짓기에는 열악한 환경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바다로 나가지 않을 수 없다.

자국 일본, 야마토라 불리는 열도의 해안가를 함부로 휩쓸고 다니며 약탈하다가는 곧장 타 번들에 의해 타이라노 번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

규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들과 너무 가까워, 그들도 배가 있어 자칫하면 번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고려.

가장 만만하고 후환이 없는 나라다.

쳐들어가 양식을 약탈하고 재물을 노략질해 온 덕에 지금까지 그럭저럭 타이라노 번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노략질해 온 양식으로 번의 백성들이 배불리 먹으며 번주가를 칭송했다.

약탈해 온 재물로 타이라노 번의 재정은 부족함이 없었다.

잡아 온 계집들을 희롱하여 잠자리의 안락함을 더했다. 종으로 부리기도 하고 일부는 타 번에 팔아 번의 재정에 보태기도 했다.

인구가 부족한 번의 인구를 늘리는 데 고려에서 잡아 온 계집들이 유용하게 쓰였다.

대부분 밭인 번의 농사를 짓는 데도 쓰임새가 무척 유용했다.

다카요시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할복자살한 형에 이어 자신도 출정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다카요시는 고개를 바로 하며 왼손을 들어, 왼쪽 눈에 댄 안대를 만졌다.

너무 간지러웠다.

마구 긁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지금도 눈이 멀쩡하게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한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에 다카요시는 강한 분노를 느꼈다.

‘그놈!’

다카요시는 화살로 자신의 눈을 앗아 간 이민호를 생각했다.

분명 고려 놈일 것이다.

상당히 먼 거리였음에도 정확히 자신의 왼쪽 눈에 화살을 박아 넣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입은 옷은 양민 같았는데.

‘갈가리 찢어, 네놈의 간을 질겅질겅 이빨로 씹어 삼키고야 말리라.’

다카요시는 가슴 가득 살의를 품었다.

번의 동년배 무장 중 자신이 최고라고 여겼다. 형 키요하라도 검술에 있어서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보도 듣고 못한 웬 자에게 당하고 말았다. 허리에 찬 검을 빼 들어 보지도 못했다.

검을 휘둘러 보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변변한 공격조차 못 해 보았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그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

10장

다수의 지방 호족이 여주 서가를 찾았다.

호위병들을 대동하고 말을 타고 온 호족도 있었고, 마차를 타고 온 호족도 있었으며, 가마를 타고 온 호족도 있었다.

서가는 많은 손님들을 맞아 분주했다.

주인 서양헌의 아내 황 씨 부인과 장자 서윤의 아내인 김 씨 부인을 필두로 아녀자들이 집 안 곳곳에 솥을 내걸고 각종 음식 장만에 여념이 없었다.

서가의 가병들이 집 안 곳곳에서 엄중한 경계를 섰다.

마구간은 호족인 장자들과 그들이 데리고 온 이들이 타고 온 말들로 가득 찼다.

여자 종인 시비들이, 장자들이 대동하고 온 이들이 묵을 방을 바삐 걸레로 훔쳤다.

평소 가병들이 무예를 익히는 수련장에는 천막이 쳐지고, 남자 종인 하인들이 바삐 술 단지를 날랐다.

가려 뽑은 여자 종들이 고운 옷을 입고 넘실넘실 춤을 추며 흥을 돋웠다.

회합의 첫날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날이다.

본격적인 회합은 다음 날에 열리며, 결론을 도출하면 다시 하루 동안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관례다.

자주 없는 호족들의 회합이고 보니 영락없는 잔칫집이었다.

굶주린 백성들과 거지들이 음식 냄새에 이끌려 서가의 대문을 기웃기웃거렸다.

장자인 서윤과 차남인 서풍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찾아온 장자들에게 인사하기 바빴다.

장자들 중 몇은 아들과 딸을 대동한 까닭에 별도로 젊은 사람들만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타 호족들에게 아들과 딸을 내보여 혼처를 구하는 의미의 대동이라, 부친과 함께 서가를 방문한 남녀는 한껏 치장한 모습이었다.

음주 가무가 담장을 넘었고, 서가의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좀처럼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맛깔스러운 술에 취하였다.

어지러운 바깥세상과는 동떨어진 호족들의 풍요가 엿보이는 잔치 아닌 잔치에 모두들 들뜰 대로 들떴다.

심지어 이규보까지.

술을 좋아한다고 하더니만, 술고래 중의 술고래였다.

유일하게 담담하게,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은 이는 나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천민촌에 있어 보았기에, 그들의 삶을 눈으로 봤기에, 서가의 풍요로움이 영 마뜩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저 바다 너머에서 왜구들이 다시 쳐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호족들의 안일함이 정말 싫다.

싫어!

그때였다.

“나리.”

뒤에서 누군가가 날 불렀다.

놀라 몸을 흠칫거렸다.

홀로 거처 뒤뜰에 서 있었는데.

누가?

뒤돌아보았다.

“훗.”

묵이었다.

묵은 작은 소반을 들었는데, 하얀 천이 소반을 덮었다.

제법 천이 부푼 것으로 보아 무엇인가 큼지막한 것이 소반에 담겨 있는 모양이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헤헤. 적적하실 것 같아.”

묵이 말하며 소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말없이 미소 지었다.

씩.

봐하니, 서가의 여인들이 장만한 음식을 조금 가져온 모양이다.

묵은 제법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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