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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고 무신 정권이고 죄다 거기서 거기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그 부분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전 세계를 통틀어 30년 가까이 끈질기게 원에 저항한 나라는 고려뿐이다. 그러니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라. 너희의 선조들은 그처럼 위대하셨다.”
염병하셔요.
백성들이 어떤 고난과 고초를 겪었는지, 얼마나 삶이 피폐했었는지는 단 하나도 안 가르쳐요.
그렇게 대단한 나라가 항복하고 부마국이 된 이후, 간 쓸개를 죄다 원나라에 다 내줬냐?
허이고.
어처구니가 없어요.
그러니까 정도전과 이성계에게 쫄딱 망했지. 니들은 그렇게 당해도 싸. 싸다고.
이민호는 풀피리를 멈추며 입에서 뗐다.
옆으로 던지는데, 앉아 있는 서혜가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풀피리를 불던 것을 멈춘 이유를 물었다.
“갑갑해서요.”
나는 서혜를 돌아보았다.
“갑갑하다고요?”
“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혈혈단신으로 고려 땅에 왔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할지,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제 처지는 이곳 고려 땅에 정착하여 살아가야 하는…… 뭐랄까? 삶의 목표 같은 것을 잃어버렸다고나 할까요.”
서혜는 이민호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정중부를 아세요?”
난 흠칫했다.
“아, 압니다.”
“정중부는.”
서혜는 정중부, 이의민을 비롯한 무신 정권의 권력자들을 차례대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신분이 비천한 무장 출신들이었어요. 하지만 힘으로 일어나 고려라는 천하를 손에 쥐었죠. 말 한 마디로 고려를 호령하며 왕보다 더한 권세를 자랑했어요. 지금의 우리 고려는 무신들의 나라예요.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죠.”
난 내심 긴장했다.
‘이 여자, 위험한 사상을 가진 것 같은데.’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서혜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있는 강을 보았다.
“남자라면 한 번쯤 그런 꿈을 꾸어 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천하를 손에 쥐고 호령하며 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고, 태평성대의 시대를 열어 뭇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원대한 꿈을 말이에요.”
난 가만히 서혜를 바라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서혜의 눈동자는 눈부시게 빛났다.
무엇인가를 좇는 듯 한껏 젖어 있었다.
“우리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예요.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늘 옛 고구려의 영광과 고토 수복을 국시로 내세우며 지금에 이르렀죠. 하지만 그런 국시는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권세를 잡은 이들의…… 다들 세상이 바뀌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요. 예가 사라진 지 오래고 법도 역시 보기 힘들죠.”
서혜는 말하며 이민호를 돌아보았다.
생긋.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때요. 꿈이 없다면 세상을 바꾸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그런 꿈을 꿔 보는 것이.”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뚫어져라 서혜를 바라보았다. 내가 살던 현대에 태어났다면 미스 코리아나 연예인이 되었을 미모다. 성격도 화통하고, 스스로 갑주를 입고 허리에 검을 차고 전장에 나설 만큼 적극적이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어야 할 여자야.’
나도 모르게 머리에 떠오른 상념에 살며시 웃었다.
씨익.
서혜가 일순간 움칫하더니 얼굴을 붉혔다. 슬그머니 머리를 숙이며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려 했다.
‘아…….’
머릿속이 흐려졌다.
남성 호르몬이 과다 분비된 게 분명하다. 여자나 연애 경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신체 건장한 대한민국 남자다.
남자의 종족 번식 본능이란 정말 무섭다.
순간.
스윽.
난 손을 들어 정면을 돌아보려는 서혜의 얼굴을 살며시 잡았다.
흠칫.
서혜는 멈칫거리며 당황하는 기색을 띠었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천천히 서혜의 얼굴에 내 얼굴을 갖다 대고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휘이이이이잉.
겨울바람이 불었다.
나와 서혜를 스쳐 지나가는 겨울바람은 차가운 기운, 한기를 머금었을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전혀 한기를 느끼지 못했다.
서혜는 나를 밀치며 내 귀싸대기를 올려칠 법도 한데, 살며시 눈을 감으며 가만히 있었다.
날 잡아 잡숴.
서혜의 태도에 난 용기백배했다.
살며시 몸을 서혜에게 들이대며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가슴에 올라탔다.
수컷의 본능이 날 지배했다.
서양헌은 이규보와 함께 탁자에 앉아 다수의 종이를 살폈다.
“서 장자님, 보시면 아시겠지만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은 지금껏 없던 것들입니다. 만약 쓰여 있는 것을 모두 갖출 수만 있다면 왜구쯤은 가볍게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전비도 거뜬히 충당할 수 있지요. 귀 가문이 어쩌면 양광도 남부를 호령하는 대가문으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규보는 서양헌을 설득했다.
이민호를 적극 후원해라.
이참에 왜구를 깨끗하게 섬멸하여 두 번 다시 노략질을 하지 못하게 하자.
이 정도면 곧 있을 호족 모임에서 다들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이전처럼 자신들만 살겠다고 이기적인 행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등등 이규보는 꽤나 많은 말을 하며 서양헌의 신색을 살폈다.
“…….”
서양헌은 침묵했다.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무심한 얼굴로 다수의 종이를 보며 이규보의 말을 듣기만 했다.
서양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긴 하다.
단지 자신의 속내를 결코 드러내지 않고 감추기만 해서 그렇지.
내가 거처로 돌아왔을 때는 해 질 녘이었다.
원탁에는 내가 적다 만 종이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아 등을 젖히며 양손을 들어 깍지를 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참.’
눈을 감으며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한창 혈기 왕성한 시기의 나다. 남성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인해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다.
“휴우.”
한숨을 내쉬는데.
“안에 계십니까?”
방문 밖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출입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들어오십시오.”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돌아섰다.
드륵.
문이 열리며 마흔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들어왔다.
서가의 집사執事 김명수.
부친이 서가의 오랜 가신이었다고 하는데 그 속사정은 잘 모르겠고, 암튼 서가에서 말발이 제법 센 자였다.
김명수를 따라 열여섯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년이 들어왔다.
김명수는 내개 다가와 서며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들었다.
난 마주 인사하며 물었다.
“어쩐 일로.”
“네. 장자 어르신이 말벗이나 하시라며.”
김명수는 말하며 오른쪽으로 쪼르르 다가와 서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뭐해.”
“네, 집사 어른.”
올망졸망하게 생긴 소년이 날 보더니 넙죽 머리를 깊이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리. 묵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나리의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말하는 것이 제법 의젓했다.
난 영문을 몰라 김명수를 보았다.
“저희 서가에 처음이시라…… 묵이가 앞으로 시중을 들 것입니다. 궁금하신 것이나 시키실 일 같은 것이 있으시면 묵이를.”
적극 활용해 달라.
난 어리둥절했다.
‘어라.’
한마디로 말해 내 조수 내지는 길잡이라는 말인데. 영 내키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묵이를 데리고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다.
김명수가 재빨리 말하고 나서며 내 말을 막았다.
“장자 어른의 호의입니다.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이 양반이.
쩝.
할 수 없을 것 같다.
눈칫밥 먹는 식객 주제에 주인의 호의를 거절하기가 조금 난감하다. 그리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겠다 싶다.
서가에 관해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 지난 며칠 동안 종종 길을 잃고 서가 내부를 한참 동안 헤매곤 했다.
“그럼.”
“아, 예.”
돌아서며 문을 향해 걸어가는 김명수에게 인사했다.
“저는 나가서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나리.”
묵이라는 녀석의 눈치가 보통 빠른 게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