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회: 1-22 -->
번주 류켄은 가신들을 돌아보며 오른손에 쥔 부채를 옆으로 휘둘렀다.
“조용!”
노한 외침이었다.
가신들은 흠칫거리며 일제히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숙였다. 하야마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주군이 노하셨다!
그에 대한 두려움에 다들 머리를 숙여 순종함을 나타냈다.
다카요시는 머리를 숙인 채 힘주어 소리쳤다.
“주군, 형님이 주군의 명으로 할복하였습니다. 저 또한 마땅히 할복함으로써 주군의 은혜를 저버리고 주어진 명을 수행하지 못한 불명예를 씻어야 합니다. 하나! 그럴 경우 저희 요시미츠가는 대가 끊어집니다.”
“…….”
번주 류켄은 다카요시의 말에 흠칫하며 나나에를 힐끗거렸다.
나나에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머리를 숙이고 말없이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남편에게 맡기는 전형적인 일본 여인상이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류켄의 눈동자가 무릎 꿇은 나나에의 전신을 빠르게 위아래로 훑었다.
몸을 가린 풍성하고 긴 장옷 속에는 그야말로 숨 막히게 하는 아름다운 나신이 숨어 있을 것이다.
류켄은 나나에가 키요하라에게 시집가기 전, 우연히 훔쳐본 나나에의 나신을 회상했다.
‘으으음.’
숨이 막혔다.
류켄은 갖고 싶다는 강한 충동과 그 짓(?)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억제하기 힘들었다.
냉철한 이성으로 내면에서 고개를 쳐드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상징하는 감정들을 힘겹게 내리누르며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다카요시가 말을 이었다.
“이번 출정으로 저희 요시미츠가의 가병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제가 할복하면 요시미츠가는 끝입니다. 주군, 부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번의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 번의 창고를 재물로 가득 채우겠습니다. 그 각오의 정표로서 요시미츠 나나에를 주군께 맡기고자 합니다.”
“뭐라?”
번주 류켄은 당혹감이 밴 어조로 반문했다.
“제가 출정하여 죽으면 어차피 저희 요시미츠가는 대가 끊깁니다. 그렇게 되면 나나에를 비롯한 요시미츠가의 여인들은 주인 없는 꽃이 됩니다.”
다카요시의 목소리에서 비장이라는 감정이 물씬 배어 나왔다.
가주가 없고, 무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가병이 없는, 번에서 내쳐진 가문의 여인들?
살아가려면 딱 몇 가지 경우밖에 없다.
다른 가신들이 거두어 주거나 사창가로 팔려 가거나, 그도 아니라면 굶어 죽거나, 불문에 출가하거나.
주군을 섬기는 가신가의 여인은 신분에 걸맞지 않는 자와는 함께할 수 없다.
함께하는 것은 가문을 모독하는 것이며, 죽은 가주를 욕보이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종종 가주가 할복하여 대가 끊기거나, 번에서 내쳐져 료닌이 되는 경우, 속한 가문의 여인들은 집단으로 자진하거나 출가하곤 한다.
“주군. 저! 요시미츠 다카요시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나에를 포함한 저희 요시미츠가의 여인들을 거두어 주십시오.”
다카요시는 숙인 상체를 더 숙여 이마를 방바닥에 붙였다.
자신이 고려로 출정하여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거나 고려에서 죽으면, 그것으로 요시미츠가는 끝이다.
다행히 무사히 번주 류켄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지고 돌아오면 요시미츠가는 기사회생한다.
‘제발.’
다카요시는 출정에 대한 허락과 번의 지원을 내심 기대하며 조마조마했다.
뒤에 무릎 꿇은 형수 나나에가 전날 밤 지금과 같은 계교를 내놨다.
“다카요시 사마, 이대로 내일 등청하시면 번주께서는 틀림없이 할복을 명하실 겁니다. 그리되면 우리 요시미츠가는 끝장입니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주의 아내답게 나나에는 재차일거在此一擧의 계책을 내놨다.
그것도 자신을 미끼로 말이다.
하야마와 가신들은 다카요시의 말에 놀란 기색을 띠며 속으로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으으음.’
단 한 번의 승부!
가문의 모든 것을 건 일전.
요시미츠가의 가주인 다카요시의 절박한 심중이 절절히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야마와 가신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번주 류켄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결정권자이자 타이라노 번의 지배자였다.
번주 류켄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요시미츠가의 운명이 결정된다.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느냐? 아니면 이대로 허무하게 사라지느냐?
그 가부가 번주 류켄의 손에 달린 것이다.
“…….”
류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심유한 눈빛을 띠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머릿속으로 다카요시가 걸어온 승부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내치며 할복을 명할지, 두 결정으로 자신과 번에 어떤 이득과 손실이 생길지 가늠했다.
가슴속에서 냉철한 이성과 달리 수컷의 본능이 깨어나 머리를 들고 강한 욕념과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나나에를 가질 좋은 기회다.
확실한 명분이 있지 않느냐?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나나에를 가질 수 없다.
악마의 속삭임인 양 음욕이라는 악귀가 마음속에서 속삭이며 자신을 유혹했다.
뿌리치기 힘든 유혹에 류켄은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한편.
슥.
나나에는 머리를 숙인 채 시선을 돌려 부친 하야마를 보았다.
‘아버지. 제에발.’
부친이 시댁 요시미츠가를 도와주었으면,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 하야마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나에는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도움을 청하는 신호였다.
하야마는 딸의 신호에 움찔하며 황황급급히 주변에 앉아 있는 가신과 번주 류켄을 돌아보았다.
‘휴우우.’
답답했다.
일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하야마는 질끈 눈을 감으며 상체를 숙였다. 앞쪽에 양손을 내밀어 방바닥을 짚었다.
“주군!”
낭랑하지만 심상치 않은 기운이 서린 하야마의 목소리에 번주 류켄을 위시한 가신들이 흠칫했다.
“주군, 번은 잃을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다카요시에게 할복을 명하실 예정이었습니다. 요시미츠가의 대가 끊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번의 백성들이 지금 굶주리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막부와 천황의 갈등이 심각하다는 것을 상기해 주십시오.”
가신들은 주춤거렸다.
막부.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지 20여 년 가까이 지났다.
하지만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죽고 처가인 호조가가 막부의 대권을 장악,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천황가는 막부의 존재 자체를 몹시 싫어했다.
그로 인해 호조가를 중심으로 한 막부와 천황가의 갈등이 매우 극심해 한차례 무력 충돌이 예고되고 있는 상황이다.
번주 류켄은 하야마의 말에 움찔했다.
전비!
이제 곧 닥쳐올 호조가를 중심으로 한 막부파와 천황파 사이에 있을 전쟁.
그 전쟁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여타의 다른 번에 비해 모든 것이 열악한 타이라노 번으로서는 고려로 출정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러지 않으면 그 어디에서도 양식과 재물이 나올 곳이 없기 때문이다.
“으음.”
번주 류켄은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침음을 흘렸다.
‘번을 위해서는 다카요시의 출정이 불가피하다. 만약 다카요시가 출정하여 고려에서 죽는다면 나나에는 내 여자가 된다. 무사히 돌아온다면 나나에를 다시 내주는 대신 번은 부유해진다.’
류켄은 냉철한 이성을 번득이며 득실을 따졌다.
자신은 번주다.
개인감정에 앞서 번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권력 쟁투와 전쟁에서 패한 번주는 무조건 죽음밖에 없다. 패한 번은 철저히 승리한 타 번에 의해 뜯어먹힌다.
번주의 모친, 정실부인, 소실들, 딸, 누이 등등.
패한 번의 여인들은 승리한 번의 번주와 가신들의 차지다. 백성과 영지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남고자 한다면 강해져야 한다.
약하면 타 번에 먹힌다.
철저한 약육강식만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야마토다. 인륜이니 천륜이나 하는 것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강자!
그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류켄은 고개를 들며 호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요시!”
좋다.
그 말에 하야마, 가신들, 다카요시, 나나에가 본능적으로 머리를 들어 번주 류켄을 보았다.
류켄은 사나운 안광을 번쩍였다.
“출정하라! 다카요시 네가 무사히 돌아와 번의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 번의 창고를 그득 채운다면 그에 합당한 상을 받을 것이다. 하나! 반대로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나에를 포함하여 요시미츠가의 모든 것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핫!”
다카요시는 머리를 숙이며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야마와 가신들은 나름 수긍했다.
다들 조금 전에 가신들의 우두머리인 가로 하야마가 언급한 막부파와 천황파 사이의 알력을 염두에 두었다.
주변에 있는 여타의 번에 비해 작고 약한 타이라노 번의 생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시미츠 나나에는 출정을 명한 번주 류켄과 지금은 남편이 된 다카요시를 슬며시 번갈아 보았다.
‘난 잃을 것이 없어.’
다카요시가 무사히 돌아오면 요시미츠가의 안주인으로서 생을 이어 나갈 것이다.
만약 다카요시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번주 류켄의 여인이 되어 장차 자신이 낳은 아들로 하여금 류켄의 뒤를 이어 타이라노 번의 번주가 되게 할 것이다.
방긋.
요시미츠 나나에는 속으로 미소 지으며 부친 하야마를 힐긋거렸다.
오래전에 부친과 단판 승부(?)를 한 적이 있다.
야마토는 남자들의 천하다.
그 천하에 여인으로서의 야망을 풀어 놓을 것이다.
여자 쇼군이라 불리는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