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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기-22화 (2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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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찬이 의아하기 짝이 없는 활을 가지고 내게 왔다.

활대는 어린아이 손목처럼 굵었고, 크기는 각궁보다 1.5배 정도 컸다.

시위는 명주실을 꼬아 만든 것이 아니라 무슨 짐승의 가느다란 힘줄을 꼬아 만든 듯 빛바랬다.

무척 오래되어 보여, 의구심이 들었다.

“대체 이 활은 뭡니까?”

“서 장자께서 자네에게 주라고 하신 것이네. 내가 알기로는 서희 그분이 소손녕에게서 선물받은 거란의 활이라고 하네.”

“서희 그분이?”

이정찬은 나보다 연배가 위라 그런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이 활이라면 그리 쉽게 부러지지 않을 것이네.”

나는 입을 다물고 이정찬이 내민 활을 받아 들었다.

‘거란이라면 요인데. 흠. 소손녕이 선물한 활이라.’

무척 오래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동안 관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정찬의 말대로라면 쉽게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왼손에 활을 쥐고 오른손으로 시위를 가만히 당겨보았다.

“웃.”

시위가 만만치 않다.

당기는 것이 의외로 힘들어 나도 모르게 인상 쓰고 말았다.

이정찬은 활을 들어 시위를 당기며 인상 쓰는 내 모습에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소하다.

그런 속내가 은근히 묻어났다.

난 미처 이정찬을 돌아보지 못했다. 잘 당겨지지 않는 시위에 신경과 이목이 미쳤다.

‘으음. 이 정도라면 탄성이 보통이 아니겠는데.’

화살의 관통력이 장난이 아닐 것 같다. 힐긋 표적 판을 보았다.

‘한번 해볼 만하겠어.’

호기심을 느꼈다.

북방 계통의 활은 대체적으로 휴대가 간편하고 관통력이 높다.

북방은 농사를 짓기에 부적절한 자연 조건이라, 천생 말과 양 같은 가축을 방목하여 기르는 목축이 주 생업 수단이다.

그런 이유로 가축을 노리는 짐승이나, 약탈을 일삼는 타 북방 민족을 항시 경계해야 한다.

또한 북방은 날씨가 춥고, 기온이 낮으며 허허벌판과 같아 도저히 도보로는 이동이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말이 주요 이동 수단이다.

그런 까닭에 마상에서 적을 공격하는 주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활과 같은 병기가 무척 발달했다.

그런 활 중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고구려의 맥궁이다.

“으음.”

나는 침음을 흘리며 표적 판을 향해 돌아섰다.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의 이목이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다수의 시선이 주는 따가움이라고나 할까? 괜히 신경이 쓰인다.

‘이게 뭐라고.’

조금 어이가 없다. 이런 것에 내가 긴장감을 느끼다니. 나, 참.

활을 쥔 왼손을 일직선으로 내뻗으며 오른손으로 시위를 잡고 있는 힘껏 잡아당겨 보았다.

추우우우욱.

천천히 시위가 당겨지며 만월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우욱.’

시위를 당기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유도 선수들이 훈련할 때, 대형 트럭의 타이어를 재활용한 고무 띠를 어깨로 잡아채곤 한다.

그 띠보다 시위가 더 강한 것 같다.

시위가 절대 당겨지지 않겠다고 내게 무언으로 고함치는 기분이다.

“이!”

이를 악물었다.

자연 잇몸이 드러나고 험한 인상이 쓰였다. 시위를 당기는 손등과 팔에 힘줄이 돋아나고 눈에 힘이 갔다.

치켜뜬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바들바들.

오른손이 현저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우욱. 주, 죽겠다.’

팔이 끊어질 것 같다. 이 정도로 시위가 강할 줄이야. 예전의 나라면 절대 시위를 당기기 못했을 것이다.

‘다, 달라졌어.’

내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혹시 머리도 좋아졌으려나.’

가능성이 있다.

나도 모르게 다소 어이가 없어 슬그머니 웃고 말았다.

조금 전이었다.

막 이민호가 시위를 당기는 순간, 서양헌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광경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상당한 충격을 받은 까닭에 입을 쩌억 벌리고 허무맹랑하다는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어, 어떻게!’

조상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에게 선물받은 활은 일종의 조롱이었다.

너희 고려에 이 활의 시위를 당길 만한 자가 있느냐?

그런 물음이 선물한 활에 깃들었다.

노련한 외교관이었던 조상 서희는 잘 알고 있었다. 활을 선물받으며 짐짓 그와 같은 것을 모르는 척했다.

-이 고려에 이 활을 당길 만한 장수가 있다면 활을 그에게 주어라. 이 활은 우리 고려에는 치욕이나 마찬가지이니.

조상 서희는 그런 유언을 남기며 몹시 분하게 여겼다.

문인이라, 활을 당길 만한 근력이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자니, 활에 숨어 있는 소손녕의 물음이 생각나 화가 치밀었다.

서양헌은 이민호가 활을 부러뜨리자, 조상이 남긴 예의 활이 생각났다.

설마 이민호가 그 활의 시위를 당길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일종의 시험을 겸해 치기 어린 충동이 일어 활을 내주었다.

그런데 이민호가 활의 시위를 당겼다.

서양헌은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광경에 말을 잃었다.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신반의했다.

한편,

서윤과 서풍은 허무맹랑하다는 속내를 얼굴에 내비치며 눈을 치떴다.

놀랐다는 것이 한눈에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 저 활을.”

“형님, 제가 지금 헛것을 보는 것은 아니지요?”

두 형제는 망연해했다.

황 씨 부인과 김 씨 부인 역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가에 시집온 며느리인 까닭에 선조 서희가 남긴 활의 유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활시위를 당기지 못했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한 젊은이가 활시위를 당기다니.

황 씨 부인과 김 씨 부인은 상당한 충격을 받아 활시위를 당기는 이민호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서혜는 눈을 치켜뜨며 놀란 마음을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저, 저어.”

오른손 검지를 들어 이민호를 가리켰다.

시비들과 이정찬 그리고 조규를 비롯한 가병들은 입을 쩌억 벌리고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민호의 손에 들린 활에 관해 들은 바가 있는 까닭이다.

티이이잉.

시위를 놓았다.

슈아아아아아앙.

화살이 표적 판을 향해 일직선의 경로로 쏘아져 나갔다.

통상 화살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데, 시위의 탄성이 여느 활시위를 압도하는지 경로가 곧았다.

화살촉은 풍압과 공기의 저항을 뚫고 빛살처럼 공중을 가로질렀다.

가히 광선 같은 빠르기였다.

번쩍이는 양광처럼 일순간 화살이 표적 판에 다다랐다.

그사이 공터에 서 있는 이들의 시선이 날아가는 화살을 뒤쫓았다.

한순간.

쿠와아앙.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표적 판이 산산이 부서졌다.

뒤로 날아가며 흩어지는 수많은 표적 판의 파편에, 표적 판에 화살이 정확히 명중했는지 그 여부는 알기 어려웠다.

당연히 명중을 알리는 ‘관중’이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공터는 깊은 산중인 양 고요해졌다.

다들 입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 망연자실했다.

몇몇 이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살을 단지 쏘았을 뿐이다.

그런데 표적 판에 적중되는 순간 우레와 같은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공터에 서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믿기지 않아 멍했다.

따악.

내가 쏘았지만 믿기지가 않아 입을 크게 벌렸다. 놀라 고개를 숙여, 왼손에 쥔 활을 보았다.

‘뭐, 뭔 활이!’

내가 아는 그 어떤 전통 활도 지금 내가 왼손에 쥔 활을 압도하지 못한다.

궁금했다.

내가 왼손에 쥔 활의 내력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다.

8장

화려한 다수의 비단 천이 늘어뜨려진 방은 호사로웠다.

좌우에 있는 벽에는 각종 서화와 검들이 걸려 있었고, 정면에 있는 출입문 양옆에는 허리에 검을 찬 4명의 무사가 무심히 서 있었다.

네 무사는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출입문 맞은편, 비단 천들이 늘어뜨려진 벽을 등지고 푹신한 비단 보료에 한 장년인이 앉아 있었다.

장년인은 서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앞쪽 좌우에는 다수의 가신들이 한일자로 입을 다물고,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들 비스듬히 머리를 숙이고 방바닥을 응시하는 모습이 사뭇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서늘한 눈빛을 띤 장년인 타이라노 번의 번주 타이라노 류켄의 정면,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외눈의 한 가신이 다른 이들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다카요시.”

“핫!”

다카요시는 힘주어 대답했다.

번주 류켄은 오른손에 든, 서너 개의 색이 입혀진 둥그스름한 부채를 얼굴로 가져갔다.

“얼마 전에 있었던 출정에서 왼쪽 눈을 잃었다지?”

“죽여 주십시오, 주군.”

“네놈이 죽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문제는 가져와야 할 것을 네놈이 가져오지 못해 번의 백성들이 지금 굶주리고 있다는 것이야. 지난가을에!”

류켄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네 형 요시미츠 키요하라가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한 탓에 내가 할복을 명했다. 그리고 동생인 네놈에게 요시미츠가의 가독을 이으라고 명했다. 한데, 네놈들 형제가 이렇게 날 실망시키다니.”

류켄은 화내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하야마.”

“핫.”

좌측에 앉아 있는 머리가 허연 백발의 노인 노부스케 하야마는 힘주어 짧은 외마디를 내뱉었다.

가신들의 우두머리인 가로로, 류켄을 포함 벌써 3대째 타이라노 번의 번주를 충심으로 섬긴 원로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번주 류켄의 물음에 하야마는 머리를 들며 양손을 무릎에 가만히 얹었다.

상체를 꼿꼿하게 펴며 천천히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시미츠가를 번에서 내쳐, 섬기는 주군 없이 세상을 떠도는 료닌이 되게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다카하시는 머리를 번쩍 들며 목 놓아 소리쳤다.

“도노!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왼쪽 눈을 가린 안대가 왠지 모를 오싹함을 불러일으켰다.

출번 그리고 낭인.

무사에게는 둘 다 치욕이다.

“기회?”

번주 류켄은 다카요시를 응시하며 반문했다.

“핫!”

다카요시는 힘주어 소리쳤다.

낭인이란 무사로서의 긍지를 잃은 밥버러지와 같다.

섬기는 주군이 있는 번의 가신 가문이 번주에 의해 내쳐져 낭인으로 떨어지는 것은 차라리 할복하는 것만도 못한 불명예 중의 불명예다.

무사로서 수치 중의 수치다.

차라리 배를 가르고 죽는 할복의 예로써, 주군을 섬기는 자로서의 최후를 맞는 것이 좋다.

그것이 무사에게는 최고의 선이다.

“다카요시!”

하야마는 다카요시를 쳐다보며 언성을 높였다.

가로이고 원로다. 번주 류켄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2인자다.

그런데 다카요시가 감히 반박하고 나섰다.

다카요시는 하야마의 고성에도 불구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마주한 번주 류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야마를 무시하는 행위이자 가신에게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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