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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서가.
여주 일대의 막대한 전답을 바탕으로 거대 농장을 경영하는 문벌 가문이다.
서희로 인해 무신이 난을 일으켰을 때도 다행히 그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 말 몇 마디로 강동 6주를 손쉽게 넘겨받은 서희에 대한 존경심이 무장들 사이에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수만 평은 족히 넘을 듯한 대지에 빼꼭히 들어선 전각들이 서가의 위세를 말없이 나타냈다.
널찍한 탁자 중앙에 있는 교의에 앉은 서가의 주인 서양헌은 근엄한 표정으로 우측에 앉아 있는 이규보를 보았다.
이규보의 우측 옆에는 이민호가 앉아 있었다.
이민호의 맞은편, 서양헌의 좌측에는 서풍이 앉아, 부친 서양헌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출정에 대한 일종의 보고였다.
서양헌은 아들 서풍과의 대화를 끝내며 이규보를 보았다.
“삼혹호 선생의 높으신 고명을 오래전부터 들어 한번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활짝 미소 지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보잘것없는 이 사람을 이리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잘것없으시다니요. 삼흑호 선생의 고명하신 시재는 알 만한 사람이라면 다 압니다. 하하하하.”
서양헌은 고개를 들며 웃었다. 그 모습이 호인好人이라 보기에 좋았다.
‘젠장,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난 아주 거들떠도 보지도 않네.’
난 속으로 투덜댔다.
잠시 뒤 서양헌은 사람을 불러 이규보를 거처로 안내한 후 극진히 대접하라 명했다.
이규보는 나가며 날 돌아보았다.
“그럼, 나중에 보세.”
알듯 모를 듯 요상한 작은 미소를 짓는 것이 날 약 올리는 것 같아 다소 얄미웠다.
이규보가 나간 후, 서양헌은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흐음, 식객이라.’
서양헌은 속으로 묘한 감흥과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서쪽 해안가를 돌던 둘째 아들 서풍이 이끌던 일백여 명이 왜구를 격멸해 크게 민심을 얻어 무척 기뻤다.
그런 둘째 아들 서풍이 데리고 온 식객이 되고자 하는 생면부지의 젊은이 이민호.
“광주 이가의 사람이라고.”
“네. 오래전에 조상님이 포로로 거란인들에게 끌려가…….”
난 서양헌의 물음에 대충 둘러댔다.
‘내가 광주 이씨 가문의 사람이 맞긴 하지만.’
곤혹스럽다.
미래에서 온 내가 과거의 우리 이씨 가문의 족보에 이름이 적혀 있을 리 만무다.
‘아버지.’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젠장맞을.’
어릴 때, 날 무릎에 앉히시고 여타의 다른 아버지들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 열변을 토하셨다.
‘그때 좀 열심히 들어 둘걸.’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우리 광주 이씨의 가계와 족보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 없다.
잠시 서양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주로 서양헌이 질문하고 내가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서풍은 부친인 서양헌과 나의 대화를 들으며 입을 꾹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얼마 뒤.
“한데, 왜 이씨 가문으로 가지 않고 우리 가문에서 식객 노릇을 하고자 하는가?”
서양헌이 내게 물었다.
난 서양헌을 쳐다보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대식국에서 산 지 백 년이 넘습니다. 제가 이씨 가문의 사람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왜구의 노략질에 의분을 느껴, 그 무도한 자들과 맞서 싸우고자 잠시 귀 가문에 몸을 의탁하고자 합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사극 드라마에서 본 장면을 최대한 흉내 냈다.
“흠.”
서양헌은 손을 들어 가슴을 향해 내리뻗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힐긋.
좌측에 앉은 아들 서풍을 보았다.
“저 사람은 예까지 데려온 것을 보니, 식객으로 맞아들이고 싶은 것 같구나.”
서풍은 부친을 쳐다보며 공손히 대답했다.
“천광 대사님이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카요시의 왼쪽 눈에 화살을 박아 넣었다고 하자, 서양헌은 놀란 기색을 띠었다.
“그래.”
서양헌의 얼굴에 불안과 꺼림이라는 두 감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난 서양헌과 서풍의 대화를 들으며 두 부자를 바라보았다.
‘OK!’
자고로 식객이란 뭐라도 한 가지 재주가 있어야 대접을 잘 받는 법이다.
서양헌이 날 돌아보았다.
“활을 잘 쏘시는가?”
“부친에게 배워 조금 합니다.”
아저씨, 이래 보여도 우리 대대 최고의 석궁 사수였다고요.
난 속으로 웃었다.
소리 없이 적을 죽이는 무기 중에 소음기를 장착한 총기를 제외하면, 석궁만 한 무기도 없다.
소리 없지, 빠르지, 관통력 높지.
얼마나 좋다고.
“좋네. 어디 한번 그 솜씨를 보세. 자네의 궁술을 보고 우리 집안의 식객으로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겠네.”
“예에.”
난 거침없이 대답하며 머리를 숙였다.
석궁 때문에 일부러 국궁도 배웠었다. 훈련 교관이 그놈의 느낌인지 뭔지 확실히 알아야 명사수가 될 수 있다며 적극 추천했었다.
망할.
뒤에 알고 보니 서로 친구드만. 괜히 교습비만 날렸다.
서양헌에 이어 서풍이 앉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 부자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전각 밖으로 걸어가는 두 부자를 뒤따랐다.
손에 쥔 각궁을 보았다.
활대 중앙에는 물소의 뿔이 있었고, 시위를 거는 부분은 크게 휘어져 탄성이 남달랐다.
‘좋은 활인데.’
활이 왼손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듯한 손맛이 무척 좋았다.
‘조금 역설적인데. 과거로 돌아오니 현대보다 더 좋은 활이라니, 이거 참.’
기뻐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왼손에 각궁을 쥐고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 1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멧돼지를 그린 그림을 붙인 표적 판이 놓여 있었다.
힐긋 좌측을 곁눈질했다.
서가의 주인 서양헌과 장자 서윤 그리고 차남 서풍을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뒤쪽으로 경장 차림의 여인들이 서서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서혜를 비롯 서양헌의 부인과 며느리 그리고 시비들인 듯 보이는 여자들은 고개를 돌려 서로 조잘거렸다.
‘쩝.’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이번에는 우측을 흘낏거렸다. 우측에는 서가의 식객들과 가병들이 서 있었다.
평소 가병들이 연무하는 공터는 고즈넉했다.
여기서 실수하는 날에는 개망신당할 것 같아 긴장되었다.
고개를 우측으로 돌렸다.
서가의 하인인 듯한 노인이 양손에 화살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한 화살을 집었다. 노인은 재빨리 서너 걸음 물러났다.
난 우측으로 비켜서며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추우욱.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화살을 끼우고 힘껏 당겼다.
‘어라?’
이상하다.
국궁을 배울 때 전통 활의 시위를 당기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데, 지금 당기는 시위는 너무 가벼웠다.
‘내가 달라졌나?’
얼마 전에 왜구와 싸울 때가 생각났다. 부쩍 힘이 세졌다.
‘요상하네. 과거로 오니 힘이 세진 느낌이 드…….’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뚝.
작은 소성과 함께 각궁이 맥없이 부러졌다.
툭.
시위에서 화살이 맨땅으로 떨어졌다.
“어?”
난 당혹감에 젖은 외마디를 내뱉었다.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이 수군거렸다.
“궁이 부러졌어?”
“세상에 얼마나 세게 당겼으면.”
“허, 천하장사로세.”
서양헌은 이민호를 보며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우로 뒤돌리며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이정찬이 뛰어왔다.
타닥.
서양헌은 뛰어와 서며 머리를 숙였다 드는 이정찬에게 뭐라 말했다.
한편.
“어머님, 얼굴 생김새와 달리 힘이 보통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장자 서윤의 아내인 김 씨 부인이 시어머니인 황 씨 부인을 돌아보았다.
“그렇구나.”
황 씨 부인은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가만히 이민호를 보았다.
탐탁지 않다.
‘대체 왜 식객을 또 들이시려는 건지.’
집 안에 적잖은 식객들이 있는 탓에 황 씨 부인은 다시 새 식객을 들이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힘들게 번 재물이 불필요하게 지출되는지라 안주인으로서 신경이 쓰였다.
식객으로 들이려는 자가 활로 왜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왼쪽 눈을 맞힌 명궁이라는 말에, 활을 얼마나 잘 쏘는지 시연한다고 하기에 궁금해 나와 보았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자처하며 강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 이유로 활을 매우 숭상한다.
활을 숭상하는 전통은 그대로 조선으로 이어져, 유학과 접목이 되어 선비들의 필수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구경거리가 거의 없다시피 한 고려 사회에서는 활을 잘 쏘는 자의 시연은 매우 흥미로운 볼거리인 까닭에 서가의 여인들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김 씨 부인은 시큰둥한 시어머니의 대꾸에 움칫거렸다. 조심스러워하며 황 씨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사이 서혜는 들뜬 얼굴빛을 띠며 이민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도통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통 사람이 아니야.’
왜구들을 상대하던 이민호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용감무쌍했다.
왜검을 휘두를 때마다 왜구들이 힘없이 픽픽 쓰러졌다. 단호하고 거침없는 검격으로 왜구들을 격살하는 것이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상장군 같아, 마음이 절로 흥분되었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저 사람 같아야지.’
서혜는 자신도 모르게 이민호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누구인지, 어느 집안 사람인지, 예전에 뭘 했었는지 등등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집안이 문가라 드나드는 다른 가문의 사람들 역시 문인이었다.
무인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지금 세상의 권세를 쥐고,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은 모두 무신이다.
서혜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남편이 고려라는 천하를 호령하고 일언에 움직이는 영웅호걸이었음 했다.
일테면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여자들 특유의 로망에 한껏 젖어 있는 셈이다.
‘저 남자라면.’
자신의 짝으로 손색이 없다.
서혜는 내심 중얼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서혜의 측근에 서 있는 몇몇 시비가 보았다. 시비들은 고개를 숙이며 손을 들어 입을 막고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막았다.
“킥킥.”
“아가씨 좀 봐.”
“어머. 눈을 못 떼셔. 저렇게 좋을까?”
서혜의 속내를 다 안다고 무언으로 말하는 듯한 시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