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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덜컥 여동생의 말대로 했다가 부친 서양헌이 무턱대고 사람을 집 안에 들였다고 화내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서풍은 시선을 숙여 모닥불을 보는 이민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흠.’
광주 이씨라고 하지만 진짜 광주 이씨의 일족인지는 지금으로서는 명확하지 않다.
성이 있다.
천민은 아닌 것 같다.
최소 양민은 될 듯하지만, 가문의 위세가 작고 크고를 떠나 지방 호족인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행여 여동생이 마음의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우리 서가에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서풍은 속으로 긴가민가했다.
아무리 식객으로 들인다고는 하지만, 자칫 사람을 집 안에 잘못들일 경우, 화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난세다.
왜구들이 기승을 부리고 조정에서는 권력을 잡은 무신들이 권세를 떨친다.
최충헌.
왕을 능가하는 당대 절대 권력자다.
중앙군을 장악하고 무신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한 몸에 받는다. 왕명은 통하지 않고 고려 전역에 최충헌의 명만이 통하는 난세다.
서풍은 난세에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때문에 가문이 멸족당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세에 문가文家인 가문에 일정한 무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라고 판단, 가병들을 모으는 명분과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한 일환으로 왜구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부친 서양헌과 형 서윤은 문가임을 사람들에게 입증하고 보여 주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차남인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서풍은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7장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 나와 이규보는 서천왕사의 승병들과 헤어져 서가의 가병들과 함께 서가로 향했다.
이규보는 의외로 말을 능숙하게 몰았다.
‘끄응.’
난 생전 처음 말을 타는 터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말을 타 본 적이 없다고요?”
여무장 서혜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날 보았다.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썩을.’
민망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청년, 아니 사람들 중에 승마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서풍이 날 흘낏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을 띠었다.
‘거참.’
결국 나는 서혜의 뒤에 앉아, 함께 말을 탔다.
서풍을 비롯 주변에서 말을 타거나 걷는 시비들과 중급 지휘자로 보이는 몇몇 무장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당혹이라는 감정을 내비쳤다.
참 곤혹스러웠다.
안장이 비좁아 부득이하게 서혜와 몸이 착 붙었다.
서혜의 몸에서 은은히 풍겨지는 육향에 눈앞이 아찔했다. 게다가 말이 천천히 발굽을 움직일 때마다 몸이 좌우로 흔들려, 본의 아니게 내 몸이 뒤에서 서혜의 몸을 문지르는 꼴이 되었다.
그 자극에 나도 모르게 거시기에 힘이 들어갔다.
‘후, 후우.’
나는 속으로 심호흡했다.
심장이 벌렁벌렁거리며 무섭도록 빠르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허둥지둥거려지는 것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꼭 잡아요. 자칫 잘못하면 떨어져요.”
서혜 역시 나와 비슷한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아, 네에.”
조심스레 오른손을 뻗어 서혜의 허리를 둘렀다.
움칫.
서혜의 몸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좌우로 흔들렸다.
“에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서혜 말대로 하마터면 몇 번 땅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부득이하게 서혜의 허리를 강하게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서혜의 얼굴 왼쪽에 내 얼굴이 가까이 붙었다. 내가 내쉬는 입김이 서혜의 왼쪽 뺨과 귀에 닿았다.
서혜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살던 현대 여성 못지않게 대범하다고나 할까? 개방적이라고나 할까?
내게는 상당히 친숙한 서혜의 모습에 적이 안도했다.
‘뭐, 그 애들처럼 대하면 되겠지.’
나와 같은 학과였던 여대생들을 생각했다. 80명 정도 되는 학과생 중 여자는 20명 정도 된다.
허물없이 함께 술 먹고 떠들며 지냈다.
난 여대생들을 대하듯 서혜를 대하기로 하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서혜는 호의가 밴 목소리로 조근조근 설명해 주었다.
서풍은 말을 몰며 이따금 뒤돌아보았다.
대담한 여동생 서혜의 언행에 곤혹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대체 저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갑주를 입고 검을 쥘 정도로, 여느 호족의 딸과는 다른 활달한 성격이다.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동생이 듣도 보도 못한 이민호라는 자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이해하기 힘든 호의를 베푸는 것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말을 타도 되는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말에 이민호를 태웠다.
말릴까 했지만 사나운 여동생의 성정을 생각해 참았다. 성격이 꽤 드세니 자칫 피곤해지기 십상이다.
“도련님.”
서풍은 말을 몰아 좌우로 다가오는 두 무장의 기척에 흠칫하며 좌우를 번갈아 보았다.
좌, 서른 후반으로 보이는 깔끔한 외모의 무장 이정찬.
우, 날카로운 눈매를 반짝이는 서른 중반으로 보이는 무장 조규.
부친 서양헌이 오래 전에 거둔 일종의 가신으로 일백여 명의 가병을 조련하는 일종의 무 사부다.
“아가씨께서 저자에게 마음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조규는 꺼리는 기색을 띠었다.
서풍은 조규를 돌아보았다.
“…….”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지켜보기가 불안합니다만.”
이정찬이 좌측에서 말을 건넸다.
서풍은 이정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분간은 지켜보기로 하죠.”
부친을 섬기는 가신들이라 함부로 말을 놓지 않았다.
“생면부지입니다. 신분 내력이 불명확한 자를 집 안에 들이는 것은 피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조규는 이민호와 거리를 두려 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보다 자세한 것을 알 때까지, 저 이민호라는 자에게 믿음이 갈 때까지는 아가씨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서풍은 두 가신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서혜가 저렇게 나서니 당장은 뭐라 말하기도 그렇습니다. 일단 본가로 돌아가서 아버님과 의논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서풍은 힐긋 뒤돌아보았다. 눈짓으로 멀찍이 떨어져 따라오는 이규보를 가리켰다.
“삼혹호三酷好 선생이 계시니.”
유림에 상당한 이름을 날린 당대의 문객 이규보다.
서풍은 이규보가 이민호와 동행이라는 점을 은근슬쩍 내비쳤다.
이정찬과 조규는 움칫했다.
두 사람은 이규보를 돌아보았다. 비록 벼슬은 하지 못했으나 과거에 급제하고, 뛰어난 시재와 글재주로 이름깨나 떨친 이다.
그런 이규보의 얼굴을 봐 주지 않을 수 없다.
모시는 주군이라고 할 수 있는 서양헌은 여주 서가의 가주로서 문벌 귀족 중의 문벌 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를 냉대하는 것은 서가의 체면과 얼굴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동행인 이민호를 더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서혜와 이민호가 탄 말을 따라 걷는, 군병 복색을 하고 창을 든 몇몇 시비들은 작은 목소리로 속닥속닥거렸다.
“아가씨가 저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신가 봐.”
“그러게 말이야. 다른 호족 가문의 자제분들이 말을 걸어와도 대꾸도 하지 않으시던 아가씨가 자신의 말에 냉큼 태우시다니.”
“호호호. 이러다 저 사람이 아가씨의 부군이 되는 거 아냐?”
“얘는.”
시비들은 여자답게 재잘거렸다.
그녀들의 시선이 서혜와 나란히 안장에 앉은 이민호의 등으로 향했다.
고려는 남녀가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상당히 많았다.
최대 불교 행사인 팔관회, 연등회, 격구 등.
다양한 만남의 기회가 많아 남녀 사이에 스스럼이 없었다. 물론 자녀에 대한 엄격한 교육이 행해지긴 했지만 조선 시대처럼 강한 정조 관념을 강조하는 사회는 아니었다.
고려의 성 풍속을 설명하자면 신라와 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는 흔히 화랑이라 부르는 청소년기의 남자가 동년배나 연상의 여자와 가지는 성관계가 문란하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자유로웠다.
신라의 경순왕이 왕건에게 귀순한 후, 고려 조정은 왕건을 추대한 황해도의 호족과 견훤으로 대표되는 전라도계 호족 그리고 귀순한 경주의 권신들이 치열한 권력 쟁탈을 벌였다.
사실상 고려 초기는 신라계 권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가장 대표적인 권신이 바로 김부식이다.
그런 이유로 고려 중기까지 성 풍속은 자유로웠다.
후에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된 이후 쌍화점이라는 것이 기록에 남을 정도로 성 풍속이 매우 문란해졌다.
그로 인해 신진 사대부가 조선을 개국하며 정조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적극 도입, 백성들에게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