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회: 1-17 -->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상의를 벗었다.
몇몇 쇠꼬챙이를 모닥불에 집어넣고 달궜다. 왜구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
약을 구할 수 없는 무신 정권 시대다.
이규보가 데려온 의술을 아는 승려가 약초를 개어 만든 고약을 상처에 붙여 주려는 것을 거절했다.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모닥불 주위에는 이규보와 해심 그리고 의술을 아는 승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다들 내가 어떻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적당히 달궈진 쇠꼬챙이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으음.’
긴장감이 일었다.
바르르.
나도 모르는 사이 쇠꼬챙이를 쥔 손이 떨렸다.
곧 내가 느낄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선뜻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군에서 훈련받을 때 몇 번이나 실패했는지 모른다.
훈련 교관이 적지에 고립되면 의약품도 없는데 어쩔 거냐고 날 심하게 갈궜다.
적지에서의 생존 훈련은 여타의 다른 훈련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속으로 눈물깨나 흘렸다.
콰아악.
나는 부서져라 이를 악물었다. 손에 쥔 쇠꼬챙이를 왼쪽 옆구리로 가져갔다.
날 지켜보던 이규보와 해심 그리고 승려가 깜짝 놀랐다.
“이보게.”
“자네.”
“멈춰!”
난 과감하게 옆구리 상처에 쇠꼬챙이를 댔다.
“커헉!”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난 본능적으로 입을 벌리며 신음을 흘렸다.
달궈진 쇠꼬챙이가 살을 지지는 고통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아, 급히 왼쪽 옆에 벗어 두었던 상의를 집어 입에 물었다.
“끄으으으…….”
입에 문 상의를 힘주어 악물며 고개를 쳐들었다. 저물어 가는 겨울 하늘이 두 눈 가득히 들어왔다.
더럽게 아프다.
‘끄아아아아아!’
마음속으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죽을 것만 같다.
살이 타들어 가는 역한 냄새가 진동하며 후각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이, 이렇게 해야.’
상처가 빨리 아물고, 금방 몸을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세균에 의한 추가 감염으로 상처가 악화되는 것도 막을 수 있는 응급조치다.
인두로 살을 지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응급조치에 이규보, 해심, 승려가 놀라 입을 쩌억 버렸다.
“마, 맙소사.”
“자, 자네.”
“허어어.”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며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아직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알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스스로 무리하고 있었다.
다소 떨어져 있는 왼편에 있는 모닥불에 서혜와 그녀를 호위하는 군병 복색을 한 몇몇 시비들이 함께 앉아, 주먹밥을 먹으며 대화 중이었다.
한 시녀가 무심코 주변을 돌아보다가 이민호를 보고는 놀라 외쳤다.
“아가씨!”
서혜와 시녀들은 소리친 시녀를 쳐다보았다.
“저것 좀 보세요.”
시녀는 왼손을 들어 머리를 쳐든 이민호를 가리켰다.
서혜와 시녀들이 이민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순간.
“어머.”
“어?”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들은 입을 벌리며 눈을 치떴다.
“세상에.”
“아, 안 아픈가 봐.”
“안 아프긴. 얼굴이 일그러졌잖아. 입에 옷을 문 게 안 보여?”
“대단하네요, 아가씨.”
서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넋을 놓은 양 뚫어져라 이민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여지없이 흔들렸다.
사내다!
지금까지 봐 왔던 남자들과는 다르다. 고통이 매우 클 것인데, 용케 참아 낸다.
이민호를 쳐다보는 서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호감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살며시 물결쳤다.
나는 옆구리에서 쇠꼬챙이를 뗐다. 뗀 쇠꼬챙이를 다시 모닥불에 집어넣고, 달궈진 다른 한 쇠꼬챙이를 손에 쥐었다.
“자네, 괜찮은가?”
“고약을 바르지, 왜.”
“그만하시지요, 시주님.”
이규보, 해심, 승려가 만류했다.
난 왼손을 들어 입에 문 상의를 살짝 떼며, 쇠꼬챙이로 상처를 지지는 이유를 언급했다.
“말도 안 되는.”
이규보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날 보았다.
해심은 피식 웃었다.
“하하하. 사내대장부로고.”
승려는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다시 또 싸우자면 그렇게 하는 것도 방편이겠으나 몸이 크게 상할 것입니다, 시주님.”
난 소리 없이 웃으며 상체를 돌려 승려에게 등을 보여 주었다.
승려는 눈에 들어오는 내 등을 보고는 당황이라는 감정이 깃든 외마디를 내뱉었다.
“흑.”
내 등에서 특전사에서 훈련받으며 생긴 다수의 상처가 있다.
경험이 많습니다.
등을 보임으로써 그런 무언을 승려에게 건넸다.
“자, 자네.”
이규보는 당황했다.
“경험이 있구만. 전장에서 대체 얼마나 싸웠기에.”
해심은 대번에 내가 생사를 건 싸움을 한 다수의 경험이 있음을 대번에 간파했다.
승려는 말없이 상체를 바로 하는 날 보았다.
이규보는 의문의 얼굴빛을 띠었다.
“자네, 대식국에서 온 것이 맞는가?”
해심은 옆에 앉은 이규보를 돌아보았다.
“거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식국이라니.”
이규보가 과거에 급제한 문인이라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존중했다.
“스님, 이 사람이.”
이규보는 해심을 돌아보며 전날 내게서 들은 것을 입에 올렸다.
얼마간 이규보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식국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닥불로 노승 천광과 서풍이 다가오며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승 천광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이민호를 보았다.
서풍은 궁금한 것이 있는 듯 다가와 서며 이규보에게 연이어 물었다.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파 디지겠는데, 썩을. 왜 자꾸 말을 시켜.
저녁 식사라고 해 봐야 소금을 약간 가미한 주먹밥이 다였다.
나, 이규보, 해심, 노승 천광, 서풍, 서혜.
이렇게 여섯이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서풍은 나보다 두어 살 연상이었고, 서혜는 한 살 연하였다.
노승 천광이 그윽한 눈으로 날 보며 물었다.
“시주, 이제 어떻게 할 참이신가?”
내 거취를 언급했다.
“왜구는 다시 올 겁니다.”
나는 다카요시가 왼쪽 눈에 내 화살을 맞아 분명 앙심을 품고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걸 입에 올렸다.
“그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 천민촌 사람들은 날 도와준 은인들입니다. 이대로 왜구들을 가만히 놔둘 경우 많은 백성이 죽을 겁니다.”
노승 천광과 서풍 그리고 서혜는 내 말에 흠칫했다. 꺼림의 얼굴빛을 띠며 고개를 돌려 서로 쳐다보았다.
약탈로 대변되는 노략질을 목적으로 내습하는 왜구와 복수를 목적으로 하는 왜구는 엄연히 다르다.
이전과 달리 전쟁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일전이 코앞이다.
물론 다카요시가 다시 쳐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으나, 매년 봄가을마다 정기적으로 왜구가 내습한 것을 감안하면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이제껏 왜구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그쳤지, 군사적 승리를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노승 천광과 서풍은 그런 속내가 밴 무언의 눈빛을 띠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걱정이라는 감정이 노승 천광과 서풍 사이에 오갔다.
돌연.
“그럼 우리와 함께 있어요. 우리는 지금까지 왜구와 싸워오면서 인근 백성들을 보호…… 곧 다시 쳐들어올 왜구를 맞을 준비도 해야 하니, 우리 서가의 식객으로 잠시 있는 것은 어때요?”
서혜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고 나섰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일순, 나를 포함한 다섯 사람은 당황했다.
“무슨?”
“식객?”
이규보는 서풍의 눈치를 보았다.
“자네가 왜구와 다시 맞서 싸우고자 한다면 서가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네.”
해심은 안색을 흐렸다.
“이거 준비할 말미가 없겠는데. 으음.”
다시 왜구가 쳐들어온다는 것이 걱정되는 눈치였다.
노승 천광은 날 힐긋거리며 서풍을 보았다.
“서 시주.”
“네에. 아무래도 인근에 있는 장자분들에게 연통을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난 서풍의 말에 속으로 흠칫했다.
고려는 가주의 개념이 희박하다. 가문의 수장을 보통 장자라고 부른다.
장자는 지방 호족으로서 자신의 가문이 뿌리내린 특정 지역에서는 왕과 다를 바가 없다.
‘호족들을 모은다?’
괜찮은 생각이다.
한 손보다는 두 손이 나으니까. 하지만 과연 이기적인 지방 호족들이 동참할지 의문이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나서지 않을 텐데.
난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모닥불을 보았다.
서혜는 날 보며 재차 제안했다.
“아까 왜구들과 싸우는 것을 보니 전장 경험이 있는 듯한데요. 왜구와 싸우자면 능력 있는 인재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은근슬쩍 내게 왜구와의 싸움에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하라는 속내를 내비쳤다.
나로서는 딱히 거부할 만한 명분이 없다. 그리고 나 또한 원하는 바다.
왜구를 아주 싹쓸이해야 사람들이 두 다리 쭉 뻗고 살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내면에 일본에 대한 강한 적의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
무신 정권 시대로 내가 왜 왔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내가 있는 2015년으로 돌아갈 길이 없는 이상 무신 정권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
‘살아갈 수밖에.’
달리 선택의 길이 없다.
그사이 이규보와 해심이 서혜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지금 자네는 딱히 갈 곳도 없지 않은가?”
“서가에 일신을 의탁하는 것도 그리 나쁠 것은 없지. 서가는 명문 중 명문이니.”
서혜는 이규보와 해심의 지원(?)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동행할 것을 청했다.
노승 천광은 서풍을 살피며 나를 힐끔거렸다.
‘허허.’
서풍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거 참.’
여동생의 적극적인 권유에 안 된다고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