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8화 (18/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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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를 쓸듯이 왜검은 공중을 스치며 파공을 흘렸다.

쉬, 쉬이잇.

두 자루 왜검은 여무장의 가슴과 다리를 엄습했다. 여무장의 움직임을 봉쇄하려는 의도였다.

여무장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검을 놓쳐 비무장이라, 두 왜구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어리석게도 좌우로 움직이지 않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잠시 시간은 벌 수 있어도 두 왜구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물러섬이었다.

여무장은 암담해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내리감고 말았다.

‘주, 죽는구나.’

죽음을 직감했다.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혜야아아아!”

귀에 익은 자신을 부르는 외침이 들렸다.

‘오라버니.’

여무장 서혜는 귀에 들린 외침의 주인이 손위 오빠인 서풍임을 직감했다.

순간.

뭉클.

누군가가 경장 갑주를 힘주어 눌렀다.

그 바람에 갑주 아래에 있는 여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푼 두 가슴 봉우리 중 우측에 있는 봉우리가 찌그러졌다.

여인이라면 불쾌감을 느낄 통증이 느껴졌다.

‘익!’

서혜는 성이 나 감은 눈을 번쩍 떴다.

흠칫.

몸을 미미하게 양쪽으로 움직이며 당혹감이란 감정을 얼굴에 띠었다.

눈앞에 탄탄한 웬 남자의 등이 있었다.

남자의 등은 시야를 모두 가렸다.

등을 돌리고 선 남자는 자신을 공격하던 두 왜구를 가차 없이 베었다.

“끄아아악.”

두 왜구가 비명을 지르며, 등을 돌리고 남자의 발치로 쓰러졌다.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괜…….”

남자는 자신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란 당혹감이 이민호의 얼굴 가득히 떠올랐다. 입을 살며시 벌리고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보자 서혜는 발끈했다.

“당신!”

이민호가 자신을 보는 시선과 표정보다는, 틀림없이 조금 전에 자신의 가슴을 누른 장본인이라는 생각에 불쾌감을 표출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현대를 살던 내가 봐 온 여자들과는 다른, 묘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화장을 한 듯 안 한 듯한 민얼굴은 연예인 못지않았다.

경장 갑주를 걸치고 왜구들과 싸웠던 남자, 지금 눈에 보이는 여인.

동일인이지만, 중성의 묘한 느낌이 색다른 미를 보여 주었다.

난 머리가 멍했다.

아무리 무신 시대라고는 하지만 여자가 갑주를 입고 손에 검을 들고 왜구와 싸우다니.

내가 아는 고려의 여인들은 매우 활달한 성향을 띠었다.

남편이 죽으면 수절하는 조선 시대 여자와 달리 고려의 여인들은 다시 재혼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남자 못지않은 재산권을 행사하며 상당히 활발한 사회생활을 했다. 고려 시대의 기록을 보면 여자는 이름 대신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름이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일종의 별칭처럼 이름이 쓰이다가 단지 성씨로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시대 여자의 이름은 매우 모호했다.

그런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양상을 띠기도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상장군 송청의 딸 송 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남 최우와 차남 최항, 장녀 최 씨를 낳았다.

송 씨 부인 외에도 손홍윤을 죽이고 뺏은 손홍윤의 아내 임 씨,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을 죽이고 빼앗은 이지순의 첩 자운선, 왕인 강종의 딸 왕 씨 등.

다수의 첩을 거느렸었다.

왕의 딸을 첩으로 거느릴 정도로 최충헌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 몽고처럼 여자들이 일종의 약탈 대상으로 치부된 것 같은데.

조선 시대와 달리 자유로웠던 고려의 여성상과는 얼마간 배치되는 경향이 두드러져 꽤 혼란스러웠다.

내가 여인 서혜를 보며 멍해 있는 사이, 누군가가 말을 몰아 다가왔다.

히히힝.

말이 울었다.

난 급히 돌아섰다.

홱.

시야에 내 왼쪽에 이른 말에서 지휘자로 보였던 무장이 훌쩍 땅으로 뛰어내렸다.

“오라버니.”

서혜가 반색하며 외쳤다.

난 서혜와 무장 서풍을 번갈아 보았다.

“남매?”

조금 뜻밖이다.

왜구는 섬멸되었다.

살아남은 왜구들은 포로로 결박되어 마을 정중앙 한편에 모여 있었다.

다들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왜구들이 모인 주변에는 아직 피가 흐르는 병기를 꼬나 잡은 군병들이 서 있었다.

군병들은 엄중하고도 적의 가득한 눈으로 포로들을 지켜보았다.

승병들은 군병들을 지휘하던 무장들과 어울려 서 있었고, 주위에는 군병들이 흩어져 전장을 정리했다.

서천왕사의 주지 노승 천광은 백여 명의 가병을 거느리고 도와주러 온 여주 서씨 가문의 차남 서풍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서 시주. 나무아미타불.”

서풍은 양손을 가슴으로 들어 합장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스님.”

불교는 왕에서부터 저 밑에 있는 천민들까지 고려인이라면 누구나 믿는 국민 종교이기에 승려는 남다른 대우를 받았다.

“아닙니다. 번번이 가병들을 데리고 도와주시러 온 분은 서 시주님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스님. 그나저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어 가슴이 아픕니다.”

서풍은 공손하게 노승 천광을 대하며 안타까워했다.

천민도 고려의 백성이다.

그리 생각하는 까닭이다.

노승 천광은 서풍의 말에 살며시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명가의 자손이로고.’

여주 서씨!

저 유명한 강동 6주를 말 몇 마디로 획득한 위대한 외교관 서희의 가문으로, 달리 이천 서씨라고도 불린다.

명가의 자손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서풍의 언행에 노승 천광은 내심 무척 기꺼웠다.

왜구가 쳐들어올 때마다 수십여 명의 승병으로는 막는 데 한계가 있어, 인근 지방 호족들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었다.

대부분의 호족은 나 몰라라 했다.

한데 오직 여주 서씨 가문만이 적극 응해, 벌써 수십여 차례나 도움을 주었다.

서풍은 잠시 노승 천광 대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왼쪽을 돌아보았다.

한 초가의 담벼락 아래 맨땅에 주저앉은 이민호, 그리고 그 왼편에 앉은 땡중 해심.

서풍은 눈짓으로 이민호를 가리키며 노승 천광에게 물었다.

“아까 보니 상당한 무위의 고수 같던데. 혹, 아시는 자입니까?”

노승 천광은 이민호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지 못하는 이입니다. 빈승도 처음 봅니다. 한데 해심이 저리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서로 안면이 있는 듯합니다만.”

“그런가요.”

서풍은 중얼거리며 힐끗 노승 천광 너머를 보았다.

여동생 서혜가 멋쩍은 자세로 서서 이민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이가.’

서풍은 내심 당혹감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남자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은, 무신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라 무엇보다도 무武를 익혀야 한다고 늘 말하던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꽤 당혹스럽다.

‘흠.’

서풍은 노승 천광을 마주 보며 이민호를 힐긋거렸다.

이민호가 왜구들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상당한 무술을 익힌 것 같았다.

단순하고 사나운 맹공으로 왜구들을 격살하며 상처 입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신들과 닮아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과거를 통해 관로로 나아가는 문벌 귀족 가문의 차남으로서 무신들이 그리 좋게 보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왼편에 앉은 해심에게 물었다.

“나와 시비가 붙었는데, 아까 나를 왜 도와주었소?”

해심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구와 싸우는 이를 돕지 않으면 그게 어디 고려의 남아이던가? 그리고 내가 너보다 나이가 위인 듯한데.”

내가 평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풋.”

실소하며 해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해심은 싱긋이 웃었다.

“천민이 제법이로구나.”

다소 오만해 보였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우월 의식이 엿보였다.

‘무슨 놈의 중이.’

조금 언짢았다.

“난 천민이 아닙니다. 이래 봬도 양광도에 있는 광주 이씨입니다.”

“호오. 그럼 태조 대왕에게 투항한…….”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우리 광주 이씨의 선조는 고려 태조에게 투항한 옛 신라의 지방 호족이었다.

“그런데 왜 천민과 어울리는가?”

해심의 물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천민과 어울리면 안 되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않는가? 천민이 어디 사람이던가?”

난 발끈했다.

“그럼 왜 천민 마을을 약탈하는 왜구와 싸운 겁니까?”

“그야 외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니까.”

해심은 태연히 내게 대꾸했다.

‘진짜!’

새삼 내가 신분제 사회인 무신 정권 시대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 나는 해심의 대답에 난 입을 다물었다.

“…….”

더 말하다가는 다시 해심과 시비가 붙을 것 같아 피하려 했다.

“예 있었군그래.”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난 고개를 우로 돌렸다.

다가와 서는 사람은 이규보였다.

“훗.”

난 이규보를 올려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문인이다.

있어 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문文이 필요할 때 큰 도움이 될 사람이다.

시인으로서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규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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