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6화 (1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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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에 일단의 승병이 나타났다.

승병들은 머리에 ‘만卍’ 자가 쓰인 띠를 둘렀다. 손에는 각기 창, 계도, 활 등을 들었다.

허연 수염을 휘날리는 노승이 제일 앞에서 내달렸다.

손에 쥔 철로 만든 선장에 매달린 두어 개의 쇠고리가 흔들렸다.

철그렁철그렁.

몸에 걸친 가사 장삼 자락이 마구 흩날렸다.

서천왕사 주지인 노승 천광은 분노로 험악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놈들!’

살생을 금하는 불가에 출가한 승려지만, 왜구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종자들이다.

예부터 이 땅의 불교는 호국이라는 법통을 이어 왔다.

‘용서하시리라. 부처님께서도 용서할 수 없는 마귀 같은 왜구를 참하는 것을 기꺼이 가납하실 것이야.’

천광은 눈에 불을 켰다.

그의 뒤를 해심을 비롯한 서른 명 남짓의 승병이 따랐다.

승병들은 하나같이 악에 받쳐 있었다.

다들 왜구 때문에 어릴 때 부모 형제를 잃고 유리걸식하다가 전대 서천왕사의 주지에 의해 거두어져 불가에 귀의했다.

그 탓에 왜구라면 다들 이를 간다.

비록 출가했다고는 하지만 눈앞에서 왜구에게 부모 형제자매가 죽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그 기억은 그리 쉽게 잊히지 않았다.

살생을 금한 불가의 가르침으로도 가슴 깊이 앙금이 되어 남아 있는 왜구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씻어 낼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스스로 승병을 되어 왜구가 쳐들어오면 그 즉시 나가 맞서 싸웠다.

그 세월이 벌써 10여 년 가까이 된다.

천광과 해심을 비롯한 승병들은 삽시간에 마을 어귀를 지나 마을 내부로 들어섰다.

해심은 눈에 들어오는 참상에 분기에 찬 외침을 내질렀다.

“다 죽여 버려!”

언제 술을 먹었느냐는 듯, 온몸으로 살의를 내뿜었다.

“으아아아아.”

뒤따르는 승병들이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에 비명인 양 고성을 질렀다.

다들 부모 형제자매를 왜구에게 잃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 이성을 반쯤 잃었다.

서천왕사의 주지 노승 천광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악귀들을 지옥으로 보내라.”

“이놈들.”

“죽여라아아.”

승병들은 저마다 소리치며 마을 곳곳으로 흩어졌다.

나는 배로 달아나는 다카요시와 세 호위병을 뒤쫓았다.

그런데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에 주위에서 왜구들이 몰려 왔다.

“와아아아아.”

“죽여라.”

머리에 버섯 같은 것을 쓰고 간편한 가죽 갑주를 입은 왜구들은 창검을 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 수가 어림잡아 20명 남짓 되었다.

“이!”

빤히 다카요시와 세 호위병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도, 난 그 뒤를 쫓지 못했다.

20명에 이르는 왜구들이 내 앞을 가로막는 한편, 주변을 빙 둥글게 에워쌌다.

그들 중 9명 남짓한 왜구들이 손에 쥔 창을 날 향해 내찔렀다.

난 손에 쥔 왜검을 휘둘러 창을 막았다.

따다다다당.

창은 내가 휘두른 왜검과 부딪치자마자 튕겨 나갔다.

“제기랄!”

다카요시와 세 호위병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도 쫓지 못하는 답답함을 내게 달려드는 20명의 왜구들에게 풀었다.

쉬잇.

왜검을 내리그어 덤벼드는 한 왜구의 얼굴을 양단했다.

“끄악.”

우측으로 뒤돌아서며 왜검을 횡橫으로 휘둘렀다.

강한 파공과 함께 왜검이 내게 창을 내지르던 왜구의 허리를 베었다.

“크아아악.”

게처럼 왼발을 옆으로 크게 뻗으며, 왼 팔꿈치로 직진 선상에 있는 왜구의 얼굴을 가격했다.

콰앙.

묵직한 감촉과 함께 코뼈가 내려앉은 작은 미성微聲이 들렸다.

비틀거리는 왜구의 멱살을 잽싸게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에 쥔 왜검을 얼굴 높이로 들었다.

손에 쥔 왜검을 빙글 돌려, 왜구의 좌측 목에 검첨劍尖을 깊이 찔러 넣었다.

‘최대한 잔인하게!’

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훈련 교관이 그랬다.

“백병전이건, 총격전이건…… 모든 것은 하나다. 누가 배짱이 두둑한지. 언 놈이 성질이 더러운지…… 무조건 잔인하게 적을 죽여, 적의 동료가 너희를 두려워하게 해라. 전쟁은 미친놈들이 벌이는 악마의 유희와도 같다. 전사戰史니 다큐멘터리니 하는 것 따윈 잊어라. 악마가 되어라! 전쟁은 악마가 승리하는 법이다. 아니, 승리하는 놈이 바로 악마다! 무자비하게, 가차 없이 적을 잔인무도하게 죽여라. 적으로 하여금 너희를 악마로 보게 해라.”

난 그 말을 상기하며, 상대하는 왜구들을 최대한 잔인무도하게 죽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왜검을 뽑으며, 멱살을 쥔 왜구를 빙글 뒤돌렸다.

푸푸푸푹.

다른 왜구들이 창으로 뒤돌린 왜구를 마구 찔렀다.

왜검을 든 왜구들이 뒤돌린 왜구의 몸에 크고 작은 검흔을 남겼다.

난 발로 뒤돌린 왜구를 걷어찼다. 그리고 우측으로 돌아서며 땅을 박찼다.

껑충.

한 길 높이로 뛰어올랐다.

나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어처구니없는 점프력이었다. 단숨에 두 왜구의 머리를 넘었다.

지면에 착지하며 양손으로 왜검을 잡고 사선으로 올려쳤다.

좌 하단에서 우 상단으로 이어지는 검참劍斬!

스으읏.

무척 기분 나쁜 옅은 소리와 함께 서늘한 느낌이 일었다.

좌측 옆구리를 스치는 휘어진 검날에 절로 몸이 움찔거려졌다.

베이고 말았다.

이는 아픔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큭!”

베인 옆구리의 살이 위아래로 벌어지며 붉은 선혈이 베어 나왔다.

주룩.

선혈에 입은 상의가 적셔지며 차가운 이성을 일깨웠다.

‘허억.’

고통에 몸이 반응하고, 깨어난 차가운 이성이 현실을 바로 보게 해 주었다.

그새 정이 깊어 들었던 나리.

독자라 여동생이란 존재에 대한 보랏빛 환상과 무조건적인 애정을 불러일으켰던 소녀다.

내 내면 깊이 숨어 있는 가족이라는 것에 대한 강력한 욕구와 욕망.

그런 다수의 감정이 나로 하여금 나리에게 집착하게 하고, 나리의 죽음에 이성을 잃게 했다.

분노라는 사나운 야수에게 내 심신이 먹히고 살육이라는 광기에 휩싸여 무조건적인 살인 행위를 이어 나갔다.

주어진 현실과 환경 조건 등.

다수의 것을 망각하고 주어진 모든 것을 활용하여 무조건 분노라는 감정을 밖으로 배설하는 데 집중했었다.

비록 내가 유단자라고는 하지만, 일본인이라는 종자들은 칼의 족속.

태어나 죽을 때까지 칼과 함께한다.

막부라 불리는 칼의 질서가 세워지면 평화로우나, 칼의 질서가 무너지고 없어지면 수많은 난세의 전쟁터에서 패륜의 극치를 보이는 족속들이다.

권력 때문에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아들이 아비에게 검을 들이대어 죽인다.

죽은 형의 아내, 형수를 가문의 명맥을 잇는다는 명목으로 취하여 자신의 아이들을 낳게 한다.

자신이 죽인 적장의 아내를 취해 자신의 여자로 삼아 아이들을 낳게 하고.

딸과 손녀 같은 적장의 여식을 취하여 아이를 낳게 한 후, 그 아이들을 또 다른 적에게 정략이란 이름으로 내주어 자신의 이득을 취한다.

이득을 위하여 기꺼이 사돈의 목을 베고, 여동생의 남편마저 가차 없이 죽인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칼을 단 한시도 손에서, 곁에서 놓지 않는 일본인이라는 족속들의 개인 전투력은 한민족과 한족을 압도한다.

검도 유단자라고 하나 나는 한계가 있는 분명한 사람.

다수의 왜구를 죽이고 상처 하나 없을 수는 없다.

죽고 죽이는 사투를 이어 오며 나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몸에 하나 둘 상처가 생겼다.

이성을 잃고 분노라는 감정의 배설에만 모든 생각이 미쳐 있는 탓에 미처 상처를 돌아보지 못했다.

슈악.

옅고 짧은 파공과 함께 등이 사선으로 베였다.

섬뜩한 느낌과 아픔이 일어나고, 얼굴이 고통이란 감각에 일그러졌다.

“크악.”

난 돌아서며 왼발로 내 등을 검으로 벤 왜구의 가슴을 찼다.

퍽.

둔중한 소리와 함께 왜구가 뒤로 튕겨 나갔다.

왜구의 다리가 맨땅에서 떨어지고 상체가 숙여져, 마치 몸이 접힌 듯한 자세로 일 장 남짓한 거리를 날아갔다.

콰당탕.

날 에워싼 예닐곱의 남은 왜구가 내게 당한 동료의 모습에 놀랐다.

“힘이?”

“조심해. 힘이 보통이 아니야.”

일본어로 떠드는 왜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나는 알아듣는다.

현대에서 일어, 중국어, 영어, 러시아어를 배운 나다.

군사적인 관점에게 가르침을 받은 내게 왜구들의 말은 귀에 익었다.

비틀.

잠시 균형을 잃고 나는 좌우로 움직였다.

“크으으.”

자의와는 무관하게 입술 사이에서 고통이 밴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ころす.”

날 에워싼 왜구들이 고함치며 앞뒤를 다투어 내게 덤벼들었다.

죽으라고?

웃기시네.

누구 좋으라고 죽어!

내 오른손에 들린 왜검.

이름 모를 왜구에게서 노획한, 날이 상할 대로 상한 검을 들어 휘둘렀다.

따다다다다당.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거푸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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