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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린 발의 너비를 줄이며 가볍게 제자리에서 위아래로 뛰었다.
툭툭.
복싱 선수가 가볍게 줄넘기를 하듯 몸에 탄력을 주고, 즉각적인 움직임을 위해 몸을 이리저리 놀렸다.
해심은 내 행동에 움칫했다.
의아한 기색을 띠며 영문을 몰라 했다. 당혹스러워하는 속내가 얼굴에 그래도 드러났다.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에는 미숙한 자였다.
‘뭔 짓이야?’
해심은 어리둥절했다.
생전 처음 보는 요상한 짓을 하는 상대 이민호다.
‘저게 무슨?’
이규보는 이민호의 행동에 영문을 몰라 하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듣도 보도 못한 동작이었다.
‘설마?’
이규보의 머릿속에 신들린 무당이 작두를 타는 광경이 떠올랐다.
유사하다.
이규보는 이민호를 보며 혹시 박수무당은 아닐까, 속으로 생각했다.
한편.
휙…… 멈칫.
나는 해심을 향해 달려 나가려고 했다.
내 움직임에 해심이 흠칫하더니 마주 뛰쳐나왔다. 그런데 내가 돌연 서자, 해심은 당혹스러워하며 멈칫거렸다.
그사이, 난 재빨리 왼발로 땅을 긁으며 해심의 얼굴을 향해 흙을 차올렸다.
화악.
흙은 해심의 얼굴 부근에서 흩어졌다.
해심은 본능적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 정도면 내게는 충분하다.
해심과 나 사이의 거리는 불과 대여섯 걸음.
다가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불과 1, 2초 남짓.
나는 해심에게 이르며 왼손으로 얼굴을, 오른손으로 좌측 옆구리를 번갈아 가격했다.
휘, 휙.
해심은 내가 엄습하자 놀라며 몸을 좌우로 심하게 흔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나뭇가지처럼 해심의 동작이 민첩해졌다.
해심은 얼굴을 왼쪽으로 젖혀 내 왼 주먹을 피했다. 하지만 옆구리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퍼억.
내 오른손 주먹이 해심의 두툼한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우측 옆구리에 주먹에 실린 힘이 충격을 전했다.
“큭!”
해심은 왼쪽으로 몸을 젖히며 얼굴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옆구리를 가격한 충격이 유발한 통증이 상당한 눈치였다. 아파한다는 것이 한눈에 다 보였다.
해심은 그 와중에도 반격했다. 내 멱살을 잡으려는 듯 오른손을 뻗었다.
덥석.
멱살이 잡혔다.
‘이런.’
황급히 왼손을 들어, 멱살을 잡은 해심의 오른 손목 좌측에 붙였다.
팔뚝으로 해심의 오른팔을 뱀처럼 감으며 바깥으로 젖혔다. 그와 함께 상체를 왼쪽으로 틀며 오른팔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오른 팔꿈치가 자연 접혔다.
나는 신속하게 해심을 향해 팔꿈치를 일직선으로 내질렀다.
해심은 오른팔 탓에 내게 강제로 끌려왔다.
“흑.”
당황이라는 감정이 밴 외마디를 내뱉으며 급히 손을 들어 손바닥을 활짝 벌렸다.
퍽.
해심은 손바닥으로 팔꿈치를 막았다.
나는 날렵하게 오른발을 게처럼 옆으로 크게 내디디며 해심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와 함께 오른 팔꿈치로 해심의 울대뼈를 향해 내질렀다.
그런데.
데데데데데데데데뎅.
순간, 난데없이 사찰의 범종이 울렸다.
난 멈칫거리며 섰다.
해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왜구닷!”
뒤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왜구가 쳐들어왔다!”
“어서 도망쳐.”
“우와아아.”
사람들이 너나없이 고성을 지르며 분분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해심은 날 뿌리치고는 부리나케 산문으로 뛰었다.
타다닥.
난 당황했다.
“뭐야?”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뒤돌아서는데, 언제 돌아섰는지 나리와 짱돌이 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이규보가 날 돌아보며 소리쳤다.
“뭐하시는 겐가? 왜구가 쳐들어왔다고 하지 않는가? 어서 피하세.”
“네?”
난 어안이 벙벙했다.
계절이 겨울이다.
왜구가 쳐들어올 시기가 아니다. 그런데 왜구가 쳐들어왔다고 사람들이 소리치며 사방팔방으로 달아났다.
이규보는 뒤돌아서며 뛰었다.
“아, 참.”
나리가 걱정된다. 천민촌 사람들도 어떻게 되었을지.
타다닥.
어느새 저 멀리 뛰어간 나리와 짱돌을 향해 난 달음박질쳤다.
‘별안간 뭔 왜구야.’
이해되지 않아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활활.
천민촌 사방에서 불길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자욱한 검은 연기가 먹구름인 양 천민촌을 뒤덮었다.
버선이 생각나는 괴상한 모자를 쓰고, 엉성한 보호대를 한 자들이 손에 검과 창을 들고 마구 뛰어다녔다.
왜구였다.
“꺄아아악.”
“으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왜구들은 가가호호 집들을 뒤졌다.
남자가 눈에 보이면 나이가 많고 적고를 불문하고 무조건 죽였다. 여자는 나이와 미추를 불문하고 강제로 끌고 가거나 어깨에 들쳐 멨다.
몇몇은 집 ㄴ안을 뒤져 양곡이란 양곡은 죄다 약탈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말을 탄, 멋져 보이는 갑주를 입은 무장이 사방을 둘러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무장의 주변에는 검을 허리에 찬 왜구들이 다섯이나 서 있었다.
경계의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무장의 호위병인 것 같다.
“크크크.”
무장 요시미츠 다카요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전날 가을의 약탈이 충분치 않아 번의 백성들이 먹을 양식이 뜻밖에도 일찌감치 떨어지고 말았다.
번주가 양곡을 가져오라 명했다.
그 때문에 배를 띄워 늘 약탈하던 어촌에 닻을 내렸다.
신속하게 어촌을 치는 한편 주위에 가까이 있는 여타의 다른 마을들로 흩어졌다.
최대한 빨리 치고 빠져야 한다.
지방군인 주현군이 오기 전에, 행여 인근에 있는 지방 호족들의 가병들이 달려오기 전에 모든 약탈을 마치고 배로 돌아가는 것이 좋다.
그러자면 반나절 안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노략질이 길어지면 퇴각이 어려워지니까 말이다.
“할아버지.”
나리는 조부 여지가 있을 집을 향해 마을을 가로질렀다.
“으아아악.”
조금 떨어진 곳에서 뛰어가던 짱돌은, 그를 본 한 왜구가 쏜 화살에 그만 당하고 말았다.
화살이 가슴에 박히자 껑충 뒤로 뛰더니, 이내 사지를 대자로 벌리고 맨땅에 쓰러졌다.
마을 곳곳에는 시신들이 그득했다.
아무렇게나 쓰러진 다수의 시신에서 붉은 선혈이 쉼 없이 흘러나와 주변 지면을 붉게 물들였다.
척 봐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들이다.
천민촌은 아비규환이었다.
“아부지.”
“으아아아앙. 엄마.”
“꺄아악.”
다수의 울음과 외침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이며 메아리쳤다.
왜구들은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려 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여자들은 소지한 왜검으로 다짜고짜 베어 죽였다.
쉬깃.
“꺄아악.”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맨땅바닥에 쓰러졌다.
몸에서 선혈이 줄줄 흘렀다. 선혈은 맨땅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후다닥.
어깨에 양곡이 든 천 부대를 짊어진 왜구들이 마을 곳곳을 뛰었다.
그들 사이로 돈이 될 만한 것을 손에 쥔 왜구들이 스쳐 지나갔다.
몇몇 왜구는 손에 닭을 움켜잡고, 다른 한 손에는 단창을 쥐고 내달렸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난 마을 어귀로 들어서며 걸음을 멈추고 섰다. 눈에 보이는 참상에 망연자실했다.
“이, 이건!”
사극 드라마에서 보았던 광경보다 더 처참했다.
주위를 둘러보는 내 눈에 이제 겨우 여덟아홉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소년의 옆에는 아버지로 보이는 이가 모로 쓰러져 있었는데, 가슴에 깊이 베인 검흔이 역력했다.
눈을 부릅뜬 소년의 아버지.
그의 얼굴에는 원통이라는 감정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부자가 고스란히 왜구에게 죽임을 당한 광경에 분노라는 감정이 일었다.
“이, 이!”
그런 내 귀에 마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고성이 들렸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우와아악.”
나는 화가 났다.
천민촌 사람들은 순박한 이들이었다. 그저 열심히 산 죄밖에 없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 쪽발이 새키들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분노에 치를 떨었다.
머릿속에서 뭔가 툭 끊기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는 현역 군인이었다. 육군에서 빡세기로 유명한 특수전 사령부 소속의 특전사에 복무했다.
제대 교육을 받을 때 교관이 그랬다.
“제대하고 사회로 나가서 사고 치지 마라. 특전사 욕먹이는 짓을 하는 놈은 나중에 예비군 훈련 받으러 올 때!”
흉흉했다.
제대와 함께 의식적으로 특전사에서 복무한 기억과 경험을 잊으려 노력했다.
기억과 경험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것이 주로 사람 죽이는 건데. 그걸 잊어야지 기억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우아아아아아아!”
나는 고성을 지르며 눈을 힘주어 부릅떴다.
눈에 보이는, 우측으로 스쳐 지나가는 왜구를 향해 뛰었다.
타다닥.
단숨에 왜구에게 다가가,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내 눈에 보이는 왜구는 내가 내지른 고성을 들은 듯 흠칫거리더니, 날 향해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