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11화 (1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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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여지를 비롯한 천민촌 사람들이 촌장의 초옥에 모여들었다.

연령대가 다양했다.

모인 남녀노소는 꿩을 보고는 신기해했다.

“와아아.”

“꿩을 잡다니.”

나리는 신 나서 내가 소매를 뜯어 만든 슬링에 돌멩이 하나를 넣고는, 머리 높이 들었다.

몇 번 머리에 부딪치며 돌리는 시늉을 했다. 마치 자신이 잡은 것인 양 엄청 들뜬 목소리로 자랑했다.

사람들은 놀랍다는 속내가 담긴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난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이거 참.’

아무리 꿩이 귀한 거라지만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민망해 죽을 것 같다.

한 사람.

‘으음.’

이규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이민호를 바라보았다.

나리가 한창 자랑하는 슬링을 힐끔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로구나.’

팔소매를 아무렇게나 뜯어 꿩을 잡는 용도로 쓰다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꿩은 오직 활을 쏘거나 매를 이용한 매사냥으로만 잡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규보는 이민호를 응시하며 알 수 없는 호기심에 가슴이 설렜다.

슬링은 단순하지만 그 효용은 매우 컸다.

범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도구를 실제로 만들어 낸 기이하기 짝이 없는 젊은이 이민호.

이규보는 강한 궁금증을 느끼며 유심히 이민호를 보았다.

누굴까?

대식국에서 왔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것 같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묘한 것을 간단하게 만드니 말이다.

이규보는 나리가 내리는 슬링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팔소매를 뜯어 저런 것을 만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저것으로 꿩을 잡을 수 있다니.

그저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이규보는 멋쩍어하는 이민호를 쳐다보았다.

서천왕사.

천민촌 인근에 있는 사찰로 규모가 상당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듯한 불탑들과 오래되어 고색이 창연한 전각들이 절로 위엄을 드러냈다.

난 당혹스러웠다.

절의 산문으로 이어진 널찍한 길 양쪽에 시진이 들어서 있었다.

“허얼.”

장이라고 해서 5일장이나 7일장을 생각했다.

‘박 교수님의 논문이 맞긴 맞네.’

우리 과 교수님들 중 한 분인 박기찬.

그 양반이 그랬다.

“고려 시대는 불교가 일반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사실상 절이 모든 것의 중심 역할을 하며 장이 들어서기도 했었다.”

우리 과 애들이 긴가민가했었다.

내가 실제로 보니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다.

나리가 신 나서 걸어가며 날 돌아보았다.

“오라비.”

짚을 꼬아 만든 새끼줄에 전날 잡은 꿩과 토끼들을 꿰어 들고 잔뜩 들떠 있었다.

난 슬며시 뒤돌아보았다.

이규보와 지게를 진 짱돌이 어슬렁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아, 진짜! 싫다, 싫어.’

이규보가 요즘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이만저만 곤란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것저것 하도 꼬치꼬치 물어 내가 아주 환장할 지경이다.

“아아아. 정말 돌겠네.”

내가 하도 화를 내, 이규보는 거리를 조금 두고 따라왔다.

그러면서 내 눈치를 요리조리 살피는 것이 저 양반이 고려 중기의 가장 대표적인 문인 중 하나인지 의심스럽다.

‘하긴 뭐. 과거에 급제하고도 관로로 나가지 못하고 백수로 빌빌거리다가 최충헌에게 아부하는 글을 써서 벼슬길에 나섰으니. 좋게 말하면 세상 살아가는 처세술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지조와 절개가 없는 거라고 할 수도 있고. 쩝. 그래도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선비들보다는 낫긴 하지.’

나는 실학자들에게 호감을 느낀다.

선비 정신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대부라는 현실 감각이 없는 자는 싫다.

공자나 맹자의 말 한마디보다는 입으로 들어가는 밥 한 숟가락이 더 가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백성들이 굶어 뒤지는데 공자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공자.

당혹스럽다.

좌측에 있는 산문을 지나 제법 걷자, 길을 따라 늘어선 다수의 천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중 우측 끝에 장대로 고정한 한 천막.

파리 떼가 앵앵거리며 꼬여 든 것이 딱 봐도 고기 파는 곳이다.

나리가 뛰어가는 천막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희한하네.’

불교는 살생을 금한다. 그런데 산문 가까이에 도축하여 고기를 파는 곳이 있다?

‘말도 안 돼!’

사찰에서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버젓이 고기 파는 천막이 있다니.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 이해가 된다.

천막은 고기를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사들이는 곳이었다. 인근에 사는 사냥꾼들이 잡아 오는 짐승들을 사 모으는 일종의 수집상인 것 같다.

“장 씨 아저씨.”

나리는 천막에 서 있는 장정들 중 한 사람,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중년인과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며 다가섰다.

“오랜만이다, 나리야.”

장 씨라는 중년인이 나리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시선이 나리의 손에 들린 꿩들과 토끼로 향했다.

“어?”

장 씨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꿩이잖니?”

“헤헤.”

나리는 쾌활하게 웃었다.

“맨날 토끼만 들고 오더니.”

장 씨는 기뻐했다.

나리는 다 안다는 얼굴로 꿩과 토끼들을 나무로 만든 탁자에 척 올려놓았다.

“귀한 거니까 잘 쳐줘요.”

“하하하. 그래.”

장 씨는 유쾌한 목소리로 웃으며 나리에게 대꾸했다.

4장

나와 이규보 그리고 짱돌이 나리의 뒤에 이르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섰다.

“함 보자. 꿩이 세 마리네.”

장 씨는 고개를 숙여 나리가 올린 꿩과 토끼들을 훑어보았다.

“면포 다섯 필.”

“에이, 말도 안 돼요. 일곱 필.”

“여섯 필.”

“그냥 가져갈래요.”

나리는 탁자에 올려놓은 꿩과 토끼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허.”

장 씨는 손을 뻗어 나리가 드는 꿩과 토끼들을 눌렀다.

나리는 멈칫거리며 장 씨를 보았다.

“여덟 필.”

“허, 나리야.”

“저, 아홉 필 불러요.”

“끄응. 알았어, 알았어. 여덟 필.”

“히히히.”

나리는 흥정에서 이겨 기분이 좋은지 웃었다. 여러 번 흥정을 해 본 모양이다.

노련미가 엿보인다.

“귀한 꿩이라서 비싸게 쳐주는 거야. 알지?”

“네에.”

“다음에도 잡으면 나한테 가져와. 알겠지?”

“네. 헤헤.”

나리는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코를 좌우로 문질렀다.

스, 슥.

장 씨는 그런 나리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고개를 우로 돌려, 눈에 보이는 한 장정을 쳐다보았다.

“막동아.”

“네, 점주님.”

막동이라는 장정이 서며 장 씨를 돌아보았다.

“가서 면포 여덟 필 가져와라.”

“예에.”

막동은 대답과 함께 왼쪽으로 돌아섰다. 제법 빠른 걸음으로 천막을 빠져나와 뒤로 갔다.

나리는 옆으로 비켜서며 지게를 진 짱돌을 보았다.

“아저씨.”

“그래.”

짱돌은 나리에게 대꾸하며 어깨에 짊어진 지게를 내려놓았다. 손에 든 막대로 지게를 받치는 광경을 나와 이규보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네 말일세.”

이규보가 내게 말을 붙이려 했다.

“그만하시죠.”

나는 일부러 화난 척하며 왼쪽으로 돌아섰다.

“어허. 사람 빡빡하게. 자네가 대식국에서 왔다고 하니 내 궁금한 것이 많아 그러는 것이네.”

이규보는 끈질기게 날 물고 늘어졌다

‘피곤해.’

식자의 지적 호기심이라는 것이 상당히 무서웠다. 이건 도무지 지칠 줄 모르니 원.

그때.

“네 이놈들! 부처님을 모신 절 앞에서 웬 피 냄새냐아아. 꺼어어억.”

우측에서 고성이 들렸다.

난 주뼛거리며 돌아보았다.

이규보, 나리, 장 씨, 천막에 서 있는 장정들 역시 나처럼 돌아보았다.

승복을 입은 술 취한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는 중.

배불뚝이였다.

똥배가 볼록 튀어나왔다. 얼굴은 살이 덕지덕지 붙어 퉁퉁 분 것 같았고, 왼손에는 술병을 쥐었다.

연방 술병을 입에 물고 술을 들이켜는 모습이 꽤나 취한 눈친데. 아무래도 주사를 부리는 것 같아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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