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국기-9화 (9/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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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가 줄기차게 물었다.

“그런데 조금 전 자네가 한 말 중에 전쟁이 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난 잠시 말문이 막혔다.

‘빠져나가야 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뭔가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 실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이규보를 마주 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씩.

난처하다.

‘생각해, 빨리! 지금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속으로 나 스스로에게 물으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돌리고 돌렸다.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한 호칭.

칭기즈칸.

‘빙고!’

난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천천히 입을 뗐다.

“재작년에 금나라 사신이 몽골에 복종을 요구하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한데, 몽고를 통일한 칭기즈칸이 사신에게 침을 뱉었었죠. 그리고 작년에 금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아마도 금나라는 얼마 가지 못할 겁니다.”

이규보는 기이하다는 눈으로 날 보았다.

“북방과 중원이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아는 것 같은데.”

“아, 예. 일찍 양친을 여의고…… 대식국에서 이름난 상인이었던 외숙부를 따라 이곳저곳 참으로 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외숙부가 병으로 죽자, 아랫사람들이 상단을……. 자고로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에 홀로 남다 보니,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안 가 본 곳이 없고,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증조부님의 고향인 고려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면, 자네 중원을 거쳐 왔는가?”

“네. 다행히 아는 송나라 상인의 배가 고려 벽란도로 간다고 하기에 간신히 배를 얻어 탔는데, 막상 닿고 보니 뭐.”

은근슬쩍 말을 흐렸다.

“호오.”

이규보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날 보았다.

그 모습이 아무래도 날 귀찮게 할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자고로 식자識者의 호기심은 그 무엇으로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법이라고 교수님들 중 한 분인 박 교수님이 무심코 수업 중에 말한 적이 있다.

“한데 말일세.”

이규보가 의심하는지 미심쩍다는 기색을 띠었다.

난 가만히 이규보를 마주 보았다.

“먼 대식국에서 왔다는 사람이 어떻게 나에 관해 들었단 말인가?”

‘이크!’

역시 많이 배운 유자라 다르다. 어느새 내 거짓말의 허점을 간파하다니.

난 서둘러 말했다.

“여기까지 흘러오며 머리에 쓰신 것과 같은 것을 쓰신 분들이 나누는 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은근슬쩍 말끝을 흐렸다.

“그럴 리가?”

이규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제법 오랫동안 유랑을 한 나에 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터인데.”

아무래도 자리를 뜨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는 급히 일어났다.

나리가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어데 가, 오라비?”

짜식.

그새 조금 친해졌다고 친한 척하긴.

난 우측으로 돌아서며 발걸음을 뗐다.

“뭐라도…… 공짜 밥은 먹을 수 없잖아.”

“오라비, 같이 가. 길도 잘 모르잖아.”

나리가 말하며 날 향해 뛰어왔다.

후다닥.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이규보를 보려다가 말았다.

‘오매나.’

이규보가 그사이 일어나 매우 날카로운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순간 셜록 홈스가 생각나는 것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이규보는 나리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이민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이한 자로구나.’

나이는 갓 약관이 지난 스물 중후반쯤으로 보이는데, 말하는 것이 범상치 않다.

더욱이 생전 처음 보는 복색을 했었다. 무엇보다도 이름이 이상했다.

‘민호라…….’

잘 쓰지 않는 이름이다.

‘양광도에 있는 광주 이씨의 자손이라고 했으렷다.’

성을 갖고 있다.

고려인들 중에 성을 갖고 있는 이들은 최소 양민 이상이다.

더욱이 이민호는 본향을 언급했다.

그것은 하나의 가문을 이루었다는 것을 뜻하며 해당 지역인 광주에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렸음을 의미한다.

즉, 문벌 귀족 가문의 출신임을 자신도 모르게 내비친 것이다.

인주 이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 철원 최씨, 해주 최씨, 남평 문씨, 강릉 김씨, 평산 박씨 등.

다수의 가문이 문벌 귀족의 최상층을 구성한다.

그 아래로 고만고만한 지방 문벌 귀족 가문, 그러니까 지방 호족들이 있다.

이규보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나리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이민호가 혹여 지방 호족 출신이 아닌가 의심했다.

직계는 아닐지 몰라도 방계는 될 것 같은데, 외숙부가 상단을 꾸려 멀리 북방과 중원까지 상행을 다녔다는 것이 뭔가 맞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혹시 모친이 대식국 사람?’

자신이 보기에는 이민호가 혼혈 같지는 않다.

‘그 정도 상단이라면 필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상단일 터인데. 거참.’

이규보는 무슨 수수께끼 같은 이민호의 말에 내심 혼란스러웠다.

눈동자가 지적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전쟁을 예언하는 이민호의 말이 이규보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50여 민호가 사는 천민촌을 포근히 감싸는 산들 중 하나인 운몽산.

산봉우리에 구름처럼 사시사철 안개가 잔뜩 끼어 운몽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나리가 말해 주었다.

운몽산은 산세가 제법 험하고 골이 깊어 큰 짐승은 몰라도 고만고만한 산짐승들이 제법 있다고 나리가 자랑했다.

눈 덮인 운몽산 자락은 휑했다.

공짜 밥을 먹기 싫어 하다못해 칡뿌리라도 캐려고 했는데, 눈이 그득 지면을 덮어, 칡은커녕 풀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산을 탔다는 나리는 능숙하게 산골짝을 오갔다.

두어 개의 작은 돌을 주워 손에 쥐고는.

“눈 부릅뜨고 잘 봐야 해요. 산토끼들이 눈 때문에 잘 보이지 않으니까요.”

나리는 돌팔매질에 능란했을 뿐 아니라 눈썰미도 보통이 아니었다.

“쉿. 조용히.”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산토끼를 용케도 알아보고는 돌을 던졌다.

돌은 삽시간에 눈밭에 서 있는 산토끼를 향해 날아갔다.

슈우우우.

토끼는 돌팔매질에 당해 힘없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나리는 날렵하게 쓰러진 토끼를 향해 뛰어갔다.

후다닥.

쓰러진 토끼에 이르러 몸을 숙였다.

징그러워하며 꺼릴 법도 한데, 나리는 거침없이 손으로 토끼의 귀를 움켜쥐고는 날 향해 돌아서며 높이 들었다.

“오라비.”

내게 자랑했다.

‘젠장.’

난 발걸음을 떼며 미소 지었다.

‘아, 덴장.’

몇 번 돌팔매질을 해 보았지만 토끼를 잡기는커녕 근처도 가지 못했다.

21세기의 최첨단 과학 문명 시대를 살던 내가 12, 13세기쯤인 고려 중기 말로 떨어지니, 이건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원시인 같아 기분이 영 거시기 하다.

토끼를 잡은 것을 자랑하며 내게 걸어오는 나리.

명색이 특전사 출신인 내 체면이 영 아니올시다다. 내가 고작 열다섯 살 소녀도 잡는 토끼도 못 잡는다니.

아, 존심 상해.

도구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너무 크다. 현대식 도구만 있었어도.

‘뭔가 체면치레라도 할 것이 있어야 할 텐데.’

생각했다.

그때였다.

푸드득.

내 왼쪽에서 무엇인가가 날아올랐다.

나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반색하며 쳐다보았다.

“아…….”

경탄하는 듯한 외마디를 흘렸다.

그사이 난 왼쪽 공중을 스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장끼?”

꿩이었다.

길게 내뻗은 알록달록한 꼬리 깃털, 배를 뒤덮은 빨간 털과 겹친 노란 털, 눈 주위는 붉었고, 목은 검고 하얀 띠를 두른 듯한 털이 목과 몸을 구분했다.

문득 고구려 벽화가 생각났다.

머리에 쓰는 머리쓰개의 장식으로 흔히 꿩 깃털이 쓰였다.

난 눈을 반짝였다.

‘그렇지.’

꿩은 사육되지 않는 날짐승이다.

땅을 걸어 다니기도 하지만 공중을 날기도 하는 까닭에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꿩은 예부터 귀한 먹거리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값이 상당히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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