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299화
기억을 지워 달라.
에르제는 눈먼 신관의 요청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조금 전 서은우의 기억을 읽고 난 뒤, 안 그래도 그렇게 할까 생각하던 참이었지만.
‘과연 이게 최선일까.’
지우거나 봉인한 기억은 서은우 스스로 풀 수는 없다. 하지만 혹시라도, 서은우에게 누군가 접근해 기억을 풀어 준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여기서 목숨을 끊어 두는 편이…….
“제가, 막겠습니다.”
그러나 에르제의 생각을 눈치챈 눈먼 신관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제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은인이시여.”
“…….”
은인이라.
에르제는 새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 기억에 묻어 두었던 한 소녀가 떠오르는 얼굴.
에르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은인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은 접니다.”
“……예?”
“제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 사람 덕분이니까요.”
자신의 노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고, 음악을 사랑했던 그 소녀 덕분에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리고, 그 소녀와 같은 사람들이 모두 ‘팬’이라는 이름 아래 에르제를 응원하고 좋아해 준다.
노래를 넘어서 그걸 부르는 사람까지.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모두.”
“……?”
당사자가 아닌 눈먼 신관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에르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에게, 자신을 잊지 않도록 만들어 주어서 고맙다고.
“아……! 이러시면 제가…….”
황급히 에르제의 어깨를 붙잡는 가녀린 손을 보며 에르제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아도, 자신이 무얼 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치, 기억 속의 그 소녀와 같다.
“제 은인으로부터 이어져 온 이의 부탁이니, 기꺼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에르제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서은우의 이마에 얹었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 재조립하는 과정.
조금 전에 재조립했던 것은 일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통째로 들어내고 새로 집어넣는 작업이었다.
“몸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요.”
에르제의 말에 눈먼 신관은,
“괜찮아요.”
그렇게 대답하며 서은우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작은 손을 에르제의 손등 위로 덮었다.
“저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요.”
따스한 빛이, 아니 하얗게 빛나는 솜뭉치 같은 것이 에르제의 혈기에 반응해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붉은색의 피는 점점 옅어지고 옅어져서, 이내 투명한 선홍색 빛을 띠었다.
“몸에 걸리는 부하는 거의 없을 거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에르제가, 옅어진 혈기를 서은우의 머릿속에 주입했다.
‘너도 부모님에게 돌아갈 때가 되었나 보다.’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은우의 기억을 처음부터 바꾸어 주었다.
행복했던 유년 시절부터, 우연히 만난 눈먼 신관의 이야기까지.
그 어디에도 에르제와 에이리스, 두 남매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대악마의 기억 또한 사라졌다.
뚝, 뚝.
에르제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져 내렸다.
하얀 손수건이 그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그렇게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에르제는 온전히 기억을 재조립하는 데에 신경을 쏟았다.
‘이제 마지막.’
에르제는 후우, 숨을 뱉어 내며 마지막 혈기를 짜냈다.
그리고 서은우의 기억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아이돌’이 사라졌다.
‘이건, 좀 안타깝긴 하지만.’
기억의 개연성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도 아이돌을 하겠다면, 그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서은우가 정말 원했던 것이 아이돌이라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그땐, 기억이 없을 테니.’
더 이상 토트윈에게 위협이 되지도 않을 터.
‘그래도 성공은 할 수 있겠네.’
자신의 육신을 가졌으니, 아이돌로 성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할 것이다.
이곳, 한국에서 아시아권이 아닌 외국인 아이돌에게 얼마나 관대한지는 모르겠다만…… 에르제의 육신은 관념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손을 떼어 낸 에르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끝났…… 습니까?”
“네.”
미소를 지으며 답한 에르제는 저릿저릿한 손을 털었다.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하는 이들은, 신관님이 처리해 주세요. 서은우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봉인을 풀려고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뱀파리스와, 에이리스 모두 사라진 거 아니었나요?”
“현재 지구에는 저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들이 넘어왔거든요.”
“……아.”
“드래곤들이야 이런 일에 관심 가질 일이 없지만, 뭐 만에 하나.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확률이 0%인 건 아니니까.”
“이해했어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눈먼 신관은 이제 가 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황제는, 아니. 은우는 제가 데려가도록 할게요. 어서 가 보세요.”
“……영어 이름은 제가 하나 지어서 기억에 삽입해 두었어요.”
에르제의 몸이 천천히 박쥐로 변하기 시작했다.
“존슨, 그렇게 불러 주면 될 거예요.”
소소한 복수에 기반한 작명을 전달하고는, 에르제는 곧바로 토트윈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 * *
여전히 토트윈 숙소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민주혁과 안병인의 관계, 그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 여론이 계속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에르제는 슬슬 다른 멤버들의 눈치를 보며 소파에 앉았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잠깐 산책.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그렇구나.”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멀리 나간 건 아니고, 사람들 눈 피해서 돌아다녔어.”
“응.”
괜한 변명을 더 붙인 에르제는,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 커뮤니티와 기사들을 뒤져 보았다.
서은우에 관한 일을 처리하는 그 잠깐 사이에, 벌써 어질어질할 정도의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 민주혁 ㅈㄴ 기만 아니냐 ]
[ ㅋㅋㅋㅋㅋ 돈 개많으면서, 거지 코스프레 ]
[ 엄마 혼자서 키워 주셨어요. 물론 아빠는 대기업 회장이라 바빠서 그런 거랍니다^^ ㅅㅂㅋㅋㅋ ]
“음.”
도대체 이게 왜 이렇게까지 비춰지는 건지 모르겠다.
소속사와 민주혁의 해명 글이 올라갔음에도 이러는 걸 보면 정신이 아득했다.
‘기억상실에 걸렸던 안병인이, 이제야 기억을 찾고 아들을 찾았다.’
이건 오히려 감동적이고 다행인 이야기가 아니던가.
단순히 안병인이 대기업의 회장이라는 이유로, 이런 비난을 받는 것은 불합리했다.
‘심지어 청화가, 비리투성이인 곳도 아니고.’
뱀파리스가 지배할 때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 다들 너무 그러지 마. 이러다가 청화가 우리 다 고소할라 ㅋㅋㅋ ]
에르제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하나를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의 화면을 꺼 버렸다.
더 보고 있다가는 짜증만 날 것 같아서였다.
“미국 투어도 남았는데, 주혁이가 괜찮을지 모르겠네.”
걱정스런 윤치우의 말에, 다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대신 숙소에 같이 앉아 있던 라하임이 입을 열었다.
“민주혁 님은 당분간 안병인 씨가 계신 병원에 있을 예정입니다. 잠깐 쓰러졌던 것뿐이지만, 아무래도 그편이 나을 듯해서.”
라하임은 멤버들을 돌아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그래도 투어 전에는 돌아온다 약속했으니, 일정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민주혁 님 본인이 그러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고요.”
“……네.”
힘없는 대답에 라하임이 머쓱한 얼굴을 했다.
에르제가 라하임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음…….”
결국 라하임도 입을 다물고 나니, 숙소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아마 에르제가 돌아오기 전에도 이랬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까.’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대규모 기억 조작을 하는 방법도 있기는 한데, 그건…… 리스크가 너무 크고.’
혹여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너무 높은 방법이었다. 애초에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하나를 바꾸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이건 일단 패스하고.’
에르제는 손가락으로 허벅지 위를 토닥토닥 두들겼다.
‘두 번째 방법은, 안병인과 민주혁의 관계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로 가는 건데…….’
그건 이미 소속사와 민주혁이 해명 글을 올렸기에 담을 수 없는 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에르제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토트윈과 소속사,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건 이브들과 대중들의 인식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뿐.
이슈가 서서히 묻히게 두거나 혹은 여론을 뒤집는 것.
‘그리고 이게 맞아.’
에르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민주혁의 아버지가 안병인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토트윈이 보여 주었던 행보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물론 청화 기업이 후원을 해 주었다고는 하나, 다른 아이돌 그룹 또한 기업 후원을 받는다.
‘안병인이 민주혁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어떠한 잡음도 없었다는 게 그 증거.’
에르제의 엉덩이가 소파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에르제에게 멤버들의 의아한 시선이 꽂혔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어.”
“?”
멤버들의 시선을 받아치며 에르제가 말했다.
“이렇게 주저앉아 있는 게 더 꼴불견이라고.”
“……뭐 어떻게 하자는 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여…….”
“그러니까.”
에르제는 안단테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네 말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민주혁과 안병…… 아니, 민주혁 아버지에 관련된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할 건 없다고.”
“……?”
“우리는 아이돌이고, 그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어.”
에르제가 꾹꾹 목소리를 눌러 담았다.
“미국 투어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
“……아.”
그리고 에르제의 말에서 깨달은 태현우가 탄성을 뱉었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주혁이도 이걸 원하지는 않을 거고.”
역시 가장 눈치가 빠른 녀석답다. 에르제가 빙긋 웃자, 태현우도 따라서 웃었다.
“우리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옳다구나 하고 더 물어뜯을 거야.”
“그래.”
에르제가 태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일수록, 할 수 있는 거에 집중하자. 아예 민주혁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수 없도록 하자고.”
“……!”
그리고 다른 멤버들 또한 의미를 깨닫고, 서서히 표정에 변화를 일으켰다.
“은우 말이 맞아.”
“……투어에서 할 곡, 다른 방식으로 편곡할 거 없나 다시 확인해 볼게여.”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연습 더 하자.”
억지로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멤버들의 모습, 아직은 무거운 공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에르제가 한 말 덕분에, 토트윈의 분위기가 빠르게 환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이래야 토트윈이지.”
병원에 있던 민주혁은, 조금 전 에르제가 보내온 사진을 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