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298화
차원 이동 포털은 어젯밤 야영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걸어서 3시간, 카테이아 대륙 기준으로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수준이었다.
탁, 탁, 탁.
숲에서 구한 나무를 지지대 삼아 짚어 가며 서은우는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빛나는 차원 이동 포털을 바라보았다.
두 색은 서로 섞이지 않은 채 반으로 나뉘어 그들에게 들어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두 명 다 차원 이동이 가능할 거라고 말을 해 주지는 않았다.”
“예, 괜찮습니다.”
“차원의 미아가 될 수도 있어.”
“황제께서 먼저 들어가시면, 제가 뒤따라 들어가겠습니다.”
“……고집불통이군.”
서은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이상은 자신이 더 이야기하는 게 소용없었다. 이미 그녀의 뜻은 확고했으니까.
“그럼, 먼저 가도록 하지.”
서은우는 나무를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포털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기분 좋은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절로 눈을 감고 몸을 맡기자, 곧 온몸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화아아악!
그리고 곧, 눈부신 빛이 감고 있는 눈꺼풀 위로 쏟아져 내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빛.
‘…….’
더 이상 이동력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서은우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점멸하는 시야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태양빛, 녹음, 마나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공기.
지구였다.
* * *
돌아왔군.
서은우는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아가 된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를 따라 들어왔어야 할 눈먼 신관은 보이지 않았다.
“혹은 시간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그 뒤로 몇 분간 숲을 뒤져 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날 잡아 줄 이는 결국 오지 않은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를 세뇌했다.
어차피 이리될 운명이었다고.
자신은 그냥 태어난 본성 그대로 살아가는 게 맞는다고.
‘그나저나, 한국에 이런 울창한 숲이 있었던가.’
서은우는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한 숲,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가지가 내는 소리만 들려온다.
‘……지금은 평범한 인간인데.’
혹시라도 산짐승을 만나면 해결할 방법은 전무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좀 됐다.
서은우는 침을 꿀꺽 삼켜 넘기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원 이동 포털에 활력을 북돋아 주는 기운이라도 있었는지, 지금은 처음 에르제의 몸에 들어왔을 때와 큰 차이가 없는 상태였다.
‘서은우를 토트윈에서 끌어내린다.’
이제는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놈이 토트윈에 남아 있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내가 불구가 되더라도. 혹은 죽더라도.’
그놈을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녀석도 자신과 같은 고통을 느낄 수만 있다면, 뭐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으리라.
‘끌어내린다.’
서은우는 오로지 그 생각만 하며 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나무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다시 넘어가서 밤이 되었을 때쯤.
한참을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서야 민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대장……간인가?’
오두막집이 하나 있었고, 대장일을 하는 대장간이 보인다.
다행히 집주인이 잠이 든 것은 아니었는지, 오두막에는 불빛이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하룻밤만 묵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겠어.’
제발 이곳이 한국이기를.
더 이상의 여행은 질색이었다.
서은우는 속으로 평생 하지도 않던 기도를 하며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응? 스승님인가?”
오두막집 안에서 작게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문을 열어 주며 눈썹을 찡그렸다.
턱 주위에 털이 복슬복슬하게 자란, 중년의 남성이었다.
“누구…… 아, 젠장.”
그러고는 서은우의 외관을 훑은 뒤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하, 하이? 나이스……트 미츄?”
“외국인 아닙니다.”
“……아!”
그제야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국에 오래 사신 분인가? 아무튼, 야밤에 이런 산속에는 무슨 일이요?”
“아…… 그게 길을 잃었습니다. 등산을 하던 중이었는데, 짐도 다 잃어버리고…….”
“그렇구먼.”
원래 에르제가 입고 있던 고급 실크로 만든 의복은, 차원 이동 포털로 향하며 갈아입은 지 오래였다.
애초에 긴 거리를 여행해야 하는 만큼 편하게 입고 있었기에, 남자는 크게 의심을 하는 낌새는 아니었다.
“조난이라, 이곳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아무튼, 하루 여기서 자고 가쇼. 내려가는 길은 알려 줄 테니.”
“아……! 정말 감사합니다.”
서은우는 감격한 척 연기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히 한국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온 서은우에게, 남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황구라고 부르면 됩니다. 어쨌든 하루 계실 분인데, 통성명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어색하게 남자의 손을 맞잡으며, 서은우가 대답했다.
“……Silver Rain입니다.”
“이름은 그 뭐냐, 외국 이름이구먼?”
“예, 뭐 어쩌다 보니.”
서은우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황구가 따뜻한 물 한잔을 내어 주었다.
“야산은 계절 상관없이 추운 법이요. 한 잔 쭉 들이키쇼.”
“감사합니다.”
황구가 끌끌 웃으며 바닥에 잘 곳을 마련해 주었다.
“스승님이 계시지 않아서 다행이구먼. 그 양반, 생긴 거랑 다르게 엄청 꼬장꼬장하거든.”
“아아…… 하하.”
그렇게 서은우는, 황구의 배려로 하루 오두막집에서 묵을 수 있었다.
자기 전까지 실없는 소리를 들어야 하기는 했지만, 산에서 야영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므로 서은우는 참고 견뎠다.
그리고 맞이한 아침.
황구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산을 내려간 서은우는, 곧장 서울로 향했다.
짐을 모두 도둑맞았다 하니 황구가 여비까지 쥐여 주었는데, 그 덕분에 서울로 가는 버스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서울.
남루한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서은우는 길 한복판에 서서 고민했다.
‘……그래서, 어떻게 끌어내려야 하지?’
일단 목적만 보며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그 뒤의 계획이 없었다.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편이 맞을 듯했다.
“……토트윈에 들어가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고.”
이미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는 토트윈이었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도 없을뿐더러, 팬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터.
‘아무리 에르제의 육신이 미친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해도, 불가능해.’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까.
지금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소속사 오디션을 보고 들어가 연습생을 거쳐서 데뷔를 하는 방법이 있고.
‘아니면, 토트윈이 아닌 다른 그룹에 합류하는 것.’
두 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중 에르제에게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후자였다.
서은우는 빠르게 현재 날짜를 확인한 뒤, 지금의 아이돌 판세를 분석했다.
‘스타라이트나, 다른 1티어 아이돌은 토트윈과 마찬가지로 기반이 다져진 상태니 패스. 그렇다고 너무 신인 아이돌 그룹에 들어가는 건 메리트가 없다.’
손가락을 접어 가며 이모저모를 따지던 서은우는 드디어 특정 그룹을 정할 수 있었다.
‘D.D.는 해 볼 만해.’
그곳은 토트윈을 라이벌로 정해 놓은 그룹이었고, 또 팬들 간의 기 싸움이 상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D.D.를 파고드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토트윈에 서은우가 있다면, D.D.에는 그와 견줄 만한 비주얼 멤버가 없다는 것.
물론 그들의 외모가 못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압도적’인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서은우는 상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수의 얼굴이었지만, 에르제의 외모는…… 솔직히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 여겨질 정도.
‘너무 외국인 느낌인 게 걸리기는 하지만.’
일단 찔러볼 여지는 충분해.
서은우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뒤, D.D.의 소속사로 향했다.
* * *
그리고 이후의 기억은 빠르게 흘러서, 이틀 전.
서은우가 에르제에게 기억 조작을 당하기 정확히 이틀 전의 상황이 펼쳐졌다.
KAL에게 자신도 모르는 곳에 카메라 설치를 부탁한 뒤, 방에 혼자 남아 상념에 잠긴 서은우의 모습이었다.
‘……후우.’
이제 에르제는, 자신이 뿌린 기사에 대한 진위를 알아볼 것이다.
문종원 기자를 찾아갈 것이고, 그자의 기억을 확인하면 자신이 그랬다는 것까지 알아낼 터.
‘에르제를 끌어내리거나, 혹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건드리지 못하게 되거나.’
서은우는 피식 웃으며 결과를 상상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에르제가 토트윈에서 방출되고 무너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세 번째 결과를 상정하기도 했다.
‘만약, 에르제가 내 계획을 모두 알아챈다면.’
KAL이 에르제에게 이야기하거나, 그 자식이 빠르게 눈치챈다면?
계획을 수정…….
‘하지 말자.’
서은우는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와서는, 진짜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 황제께서 더는 망가지지 않게 막고 싶습니다.
눈먼 신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울려서 그런 건지.
“하.”
헛웃음을 흘린 서은우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내심 에르제가 자신을 막아 주기를, 혹은 화가 나서 죽이기를 바라고 있는 본심이 어이없었다.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뭔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구나.’
이미 진즉, 자신은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냥, 그래. 차라리, 서은우로서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 행복해질지도 모르겠군.’
푸흐흐, 서은우는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실소를 뱉었다.
* * *
“미련한 인간.”
서은우의 모든 기억을 읽은 에르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짓씹듯이 말했다.
미련했다. 왜 누군가가 막아 주어야만 멈춘단 말인가.
스스로 멈추는 법은 왜 알지 못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굳이 나설 필요도 없는 인간이었어.”
거의 환멸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래도 한때는 자신의 세계를 망쳤던 인간이었는데, 속으로는 이렇게 문드러지고 나약해져 있을 줄이야.
‘쯧.’
혀를 찬 에르제가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고 나가려고 할 때.
방문이 열리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인을, 뵙습니다.”
낯익지만 조금은 다른 기운과 목소리.
이미 죽은 그녀가 돌아온 것은 아닐 테니, 이 목소리의 주인은 필시.
“미아가 된 건 아닌 모양이네요.”
서은우를 따라 지구로 온 눈먼 신관일 터였다.
에르제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눈먼 신관은 침대 위에 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서은우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에르제에게 말했다.
“혹시, 이분을 구해 주실 수는 없나요.”
“……구해 달라뇨?”
눈먼 신관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수인 황제가 아닌, 제가 드리는 부탁입니다.”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손바닥으로 서은우의 이마를 완전히 덮었다.
“이분의 기억을, 과거의 기억 모두를 지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