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97화 (297/307)
  • 제297화

    297화

    에르제는 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서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한때 대악마였고, 시공간의 축에서 오랫동안 버텼기 때문에 이 정도로 정신이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로드의 힘을 찾지 못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서은우에게 죽임을 당한 에이리스가 그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꾸욱 주먹을 말아 쥔 에르제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부서진 카메라와 녹음기들을 회수했다.

    ‘내가 이대로 돌아가면 그것대로 좋고, 만약 무슨 짓을 한다면 이거로 녹화를 하려 했나 보네.’

    기억 조작을 했다 하더라도, 서은우는 자신이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카메라와 녹음된 이야기만으로도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쯤은 알아챘을 터.

    ‘하지만…… 어설퍼.’

    에르제는 미간을 좁히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서은우는 그렇게 멍청한 존재가 아니었다.

    분명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고, 모든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부류였지만…… 적어도 머리가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

    실제로 에이리스가 했던 계획들 중, 몇 가지는 서은우가 냈던 의견이었고. 꽤나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일들이 있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쉽게 느껴질까.’

    원래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아 건드리지 않았는데, 그러다 중요한 걸 놓쳐 버리면…… 되레 이쪽이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변수는 최대한 줄여 놓는 게 맞겠지.’

    후, 에르제는 심호흡을 하고 서은우의 머리에 다시 한 번 손을 가져갔다.

    지금 한 기억 조작은, 앞으로 서은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작이었다.

    아이돌이었다는 기억을 지우고, 대악마였던 기억을 지우는 일.

    하지만, 그 이상으로 깊게 들어가 보진 않았었다. 신과 계약한 이후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뭘 해 왔는지는 찾지 않았으니까.

    ‘심층 심리보다 더 밑으로…… 들어가 봐야겠어.’

    미간을 좁힌 에르제는 손에 혈기를 끌어 올렸고, 곧 서은우가 숨겨 두었던 진의를 읽기 위해 집중했다.

    * * *

    신과 계약을 하고 난 뒤.

    서은우는 그가 오랜 시간을 보냈던 제국의 왕성으로 향했다.

    아직은 영혼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알아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 꼭 그 X끼 몸에 들어가야 하는 건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이미 그리 계약을 맺은 뒤였기에 되돌릴 수는 없었다.

    ‘돌아가서, 복수한다.’

    결국 다시 몸을 빼앗겼지만, 에르제도 자신의 육신이 지구에 나온다면 분명 당황할 터.

    ‘그 자식 몸으로 자해 협박하면 먹히겠지.’

    놈은 본인의 육신을 아낄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자신 또한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여 왔던 거니까.

    하지만, ‘균형’인지 뭔지…… 빌어먹을 것에 의해서 다시는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됐다.

    물론 유일한 방법이 있긴 했지만…… 그게 에르제에게 통할 리는 만무했다.

    바로, 서은우가 했던 의식을 에르제가 하는 것.

    그렇게 해서 둘의 영혼을 다시 한 번 바꾸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에르제가 그 짓을 할 리가 없지.’

    둘의 영혼이 바뀔 것이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은우 자신도, 대악마가 되고 미친 황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X발. 진짜 X같이 꼬였네.’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간 일이 하나도 없었다.

    벽에 가로막힌 듯이, 에르제는 모든 일에 대처를 했고 결국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후.’

    그러니까, 남은 건 똑같이 돌려주는 것뿐.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황제님은, 아직도 오시지 않은 건가?”

    “그런 것 같네. 하지만, 그분의 유지를 계속 이어가야 하지 않겠나.”

    “물론, 다른 종족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주살해야지. 하지만 말일세, 황제님이 돌아오시지 않으면 차기 황제는 누구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인지…….”

    “음. 자녀가 없으셨지. 큰일이군. 내란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

    왕성 복도를 지나며 들려오는 이야기에 서은우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저 뱀파이어와 같은, 인간이 아닌 종족들을 없애 버리겠다고 시작한 전쟁이었다.

    보아하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모양인데, 아직도 그 뜻을 받들어 전쟁을 하는 모양.

    ‘왕성이 이 정도로 피폐해질 정도면, 다른 곳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군.’

    게다가 자신이 있다면 모를까, 계속해서 부재 상태이니…….

    언제고 내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생각해 보니까, 에르제 몸에 들어가고 나면…….’

    도망쳐야 하는 건가?

    제국 내에…… 뱀파이어가 돌아다니는 꼴을 보여 주는 건 자살행위일 텐데.

    그럼에도 전시실로 향하고는 있었지만, 이곳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황제 전용으로 제작된 왕성 비밀 탈출 루트가 있기는 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경비병들이 철저히 지키는 중이었다.

    ‘대악마의 힘이 남아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평범한 인간 수준이야.’

    즉, 그곳을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탈출 루트부터 확보해 놓고 가자.’

    영혼 상태일 때는 들키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으니, 그편이 효율적일 듯했다.

    서은우는 빠르게 비밀 통로가 있는 곳을 훑었다.

    그리고.

    ‘……뭐야 경비병 어디 갔어.’

    그 길목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잘됐다.

    서은우는 서둘러 에르제의 육신을 향해 날아갔다.

    * * *

    각 종족들의 우두머리를 잡아 전시해 둔 전시실.

    그중에서도 에르제의 육신은 유독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다.

    ‘찾았다.’

    서은우가 빠르게 그곳으로 향해 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드디어 오셨군요.”

    에르제의 육신 근처에,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신관 하나가 영혼 상태의 서은우를 알아보고 반응했다.

    “황제시여.”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림 하나 없이 담담했다.

    ‘날…… 어떻게 알아보는 거지.’

    가슴이 철렁한 것도 잠시, 서은우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니,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얼굴.

    ― 제발 이 전쟁을 멈추어야 합니다. 모든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해요. 황제시여, 스스로를 망치시면 안 됩니다.

    지겹도록 들어왔던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울려 퍼졌다.

    억지로 기억에서 지워 냈던 인물, 눈이 먼 신관은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스스로를 망치고 말았군요.”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슬픈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우선은, 우선은 육신을 취하시지요. 제가 황제께서 빠져나갈 길은 미리 비워 두었습니다.”

    경비병이 없었던 것은 그래서였나.

    서은우는 입술을 깨물고는, 그녀의 말대로 에르제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꾸득꾸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격통이 서은우의 영혼 전체에 전해졌다.

    에르제의 육신과 서은우의 영혼이, 조화를 맞추면서 생기는 고통이었다.

    “조금만, 힘내십시오.”

    신관의 목소리가 유일한 위안이 되어 고통을 조금이나마 억눌러 주었다.

    “하악, 하악.”

    이윽고 깨어난 서은우는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신체의 움직임이 다소 부자연스러웠지만 적응하는 데에 크게 애를 먹지는 않았다.

    “너는…… 여전히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서은우는 고개를 돌려 신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제를 뵙습니다.”

    “되었다. 인사나 받자고 온 건 아니니까. 그보다 날 알아본 연유나 말해 주거라.”

    “눈이 먼 자들은, 영혼을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한가.”

    서은우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나는,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같이 가기 위해, 기다렸습니다.”

    “……또 잔소리라도 하려는 모양인 게로구나.”

    “그게 진정 듣기 싫으셨다면, 저를 죽이셨겠지요.”

    신관의 말에 서은우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말로는 이기기 어렵다.

    “내가 앞장서겠다.”

    “예, 원하시는 대로.”

    비밀 통로로 향하는 내내 둘 사이에 말은 없었다.

    탈출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 외에 할 말이 딱히 없기도 해서였다.

    “어두우니, 잘 따라오도록.”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비밀 통로로 왕성 밖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나눈 대화는 고작 그것이 전부였다.

    둘은 말없이 수도를 빠져나와, 신이 일러 준 차원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인간들의 눈을 피해 돌아가느라, 무려 한 달이나 걸리는 여정이었다.

    식사도, 잠자리도, 오랜 시간 지옥에서 굴렀던 서은우는 능숙하게 해냈다.

    이윽고 목적지까지 단 하루만을 남겨 놓은 밤.

    서은우는 몇 주 내내 궁금했던 것을 그제서야 물었다.

    “어찌하여, 나를 기다린 것이냐.”

    “…….”

    신관은 한참 말이 없다가 고민을 끝내고 대답했다.

    “대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괜찮으니 말해 보거라.”

    “그것이, 제가 받은 소명입니다.”

    “소명?”

    “오래전, 제 선조 때부터 내려온 이야기입니다.”

    신관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주 오래전부터, 저희 가문의 여인들은 눈이 먼 채로 태어났습니다. 빛 대신 영혼을 보기 위해 태어난 것이지요.”

    “불편했겠구나.”

    “편한 적이 없었으니, 불편함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신관의 옅은 웃음소리가 숲속에 울렸다.

    “처음에는 어째서 눈이 먼 상태로 태어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 일러 주었습니다. 눈이 멀었기에, 타인의 영혼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거라면서요.”

    “…….”

    “그리고 몇 세대가 더 지나고 나서, 저희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의미?”

    “저희 가문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신탁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신탁이라, 서은우가 의미를 곱씹었다.

    “먼 훗날 대륙을 멸망시킬 대악마가 등장을 할 것이고, 너희는 그자를 교화시켜라.”

    “……설마 그 대악마라는 게 나인 건 아니겠지?”

    “아뇨, 맞습니다.”

    “나는 인간이다.”

    “지금은 인간이지요. 그러나 저를 속이실 수는 없습니다. 시력 대신, 본질을 볼 수 있으니까요.”

    싱긋 웃는 신관의 입꼬리에 서은우는 팔을 슥슥 문질렀다.

    “그렇게 말하니 무섭군. 아무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로구나.”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나를 따라 지구로 가겠다는 건, 내가 아직도 교화가 덜 되었다는 뜻이냐?”

    “예.”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서은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런 것 같다.”

    아직도 복수해야겠다는 마음이 이리 들끓고 있으니 말이다.

    최소한, 에르제가 토트윈에서 탈퇴하는 꼴이라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멈추고 싶기도 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으니 누구라도 자신을 막아 주기를.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난 놈인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나 보다. 서은우는 모포를 덮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나를 막아 보도록.”

    “분부 받들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