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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92화 (292/307)
  • 제292화

    292화

    우리 은우가 그럴 리가 없어!

    소리 없는 아우성이 멤버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지만, 에르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SR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큼큼.”

    “음…….”

    남아 있는 이들 사이에서 어색한 신음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그리고 이곳에 없는 둘, 에르제와 SR은 빈방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냥 따로 보자고 하면 될 것을, 어렵게도 만드네.”

    “어렵지 않고 쉬웠는데?”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서은우가 얼굴을 구겼다.

    “왜, 이참에 선배질이라도 하려는 건가?”

    “너한테만.”

    에르제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D.D.의 새로운 멤버라, 재미있는 생각이기는 했어. 하지만 이왕 아이돌을 다시 할 생각이라면 LAK 쪽이 낫지 않았을까?”

    “…….”

    “안 받아줄 거라 생각했지?”

    서은우는 쯥, 하고 입술을 말아 넣었다가 다시 놓아줬다.

    “쓸데없는 얘기는 이쯤 하지? 나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나 말해.”

    “…….”

    이번에는 에르제가 입을 다물었다.

    일단 부르기는 했지만 얘기를 어디서부터 하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서였다.

    탁탁, 발을 바닥에 부딪히던 에르제는 일단 가장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너, 신과 계약했나?”

    “하 그걸 아직도 신이라고 믿고 있나 보네?”

    “……뭐?”

    “아냐.”

    고개를 저은 서은우는 팔짱을 끼고 몸을 비틀었다.

    “뭐 어쨌든, 그걸 내가 대답해 줘야 하는 이유는?”

    “내가 직접 네 머리 붙잡고 알아내도 되는 걸, 친절하게 입으로 물어봐 주고 있으니까?”

    에르제의 말에 서은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니까, 강제로 기억을 읽기 전에 알아서 토해 내라?”

    “응.”

    “건방진 건 여전하네. 에르제.”

    에르제의 육신을 차지한 서은우, 서은우의 육신을 차지한 에르제.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내가, 지금 이곳에서 대악마의 힘을 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 텐데 그런 도발을 해?”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를 따라 서은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투어를 망치고 싶은 모양이야?”

    “아니, 전혀 그런 생각은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제는 평온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대악마의 힘도 마찬가지고.”

    “……뭐?”

    “너한테, 대악마의 힘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니었지만 에르제는 그럴 확률이 90프로가 넘는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에르제는 여유로운 듯이 웃어 주며 손가락을 위로 향했다.

    “물어보니까 알려 주던데?”

    까드득, 서은우가 이를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식 말을 믿어?”

    “믿지. 네가 나타나기 전에 물어봤던 거니까.”

    당황한 서은우의 모습에 에르제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내 육신에 들어가고 지구로 올 수 있게 된 대신, 대악마의 힘을 거래 조건으로 바쳤다는 거. 네가 지구에 오기 전부터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는 얘기야.”

    에르제는 위를 향하던 손가락을, 서은우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진짜 나타났네? 그럼, 나는 그 얘기를 믿을 수밖에 없지.”

    “하……!”

    “뭣하면, 시험해 볼까?”

    에르제는 발끝에 힘을 주며 언제든지 앞으로 튀어 나갈 자세를 만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에르제의 오른팔 주변을 검은 기운이 감싸기 시작했다.

    에이리스가 가지고 있던 로드의 힘 절반, 그 힘이 모락모락 팔 위로 김처럼 피어올랐다.

    “……!! 분명히 너는, 로드의 힘을 잃었을 텐데……!”

    직접 눈앞에서 확인을 한 서은우가 좀처럼 보이지 않던 태도를 보였다.

    한 발 뒤로 물러나며 겁을 먹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이다.

    ‘……더욱 확실해지는 것 같은데?’

    에르제는 앞뒤 잴 것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는 곧바로 신형을 앞으로 쏘아 보내며 오른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자, 잠깐만!!”

    결국 서은우는 제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X발…… 말할 테니까, 말해 줄 테니까 건드리지 마……!”

    이제는 대악마도 뭣도 아니다.

    그저 인간일 뿐인 그가, 기억을 헤집는 고통을 제대로 겪어 낼 리가 없었다.

    “X…… 같은 경우가…….”

    짜증스럽게 욕설을 중얼거리는 서은우의 모습에, 에르제는 힘을 거두고 조금 거리를 두었다.

    “그럼 말해.”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표정하게 다시 물었다.

    “신과 계약했어?”

    “……하.”

    머리를 헝클어뜨린 서은우는 ‘그래’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아직 대악마의 힘이 남아 있는 것처럼 행동해 에르제의 기를 죽여 두려는 계획이었는데, 그는 이미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놈. 입이 왜 이렇게 싼 건데.”

    서은우는 천장 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세워 온 계획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 것은 위에 있는 존재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피식 웃으며 이어진 에르제의 대답에 서은우의 얼굴이 볼만하게 변했다.

    “그거 거짓말이야. 한 번 떠본 건데, 여전히 머리 굴리는 일은 젬병이네?”

    “너 이 X끼…….”

    “그리고, 대악마였을 때는 좀 여유가 있어서 그런가 말투도 좀 달랐던 것 같은데. 왜, 이제 인간이 되니까 좀 방어적으로 변해? 욕이 많이 늘었어.”

    “…….”

    서은우는 에르제의 일침에 이를 꽉 물었다. 그러고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X발. 네가 내 입장이었다면, 그딴 소리를 함부로 하지는 못할 텐데. 내 몸을 두 번이나 빼앗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뱀파이어의 힘을 이용해 나를 협박하고 조롱하고. 겉으로는 고귀한 척하더니, 결국 딱 그 정도였나?”

    악에 받친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태 자신이 어떤 불합리함을 겪어야만 했는지 아주 절절하게 토로했다.

    “그리고 결국 어떻게 됐는지 봐. 네가 네 눈으로 직접 보라고! 너는 내 몸에 들어갔고, 나는 네 몸에…… 하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왜 이렇게 몸이 바뀐 채 살아가야 하는 거지? 왜?!”

    서은우의 목에 핏대가 섰다.

    하지만 에르제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 진짜 이기적이구나.”

    그렇게 말한 에르제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툭 내뱉었다.

    “뭐?”

    “이기적이라고.”

    에르제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신랄한 시선이 서은우에게 닿았다.

    “내가 내 몸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네. 아무튼, 나도 알고 있어. 네가 시공간의 축에 갇혔다는 것도, 지옥 밑바닥에서 어떻게 대악마까지 올라섰는지도 알고 있다고.”

    “그걸 알면서도……!”

    “그런데 말이야. 내가, 네 몸을 빼앗았다고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 아니야?”

    “……어불성설이라고?”

    “그래. 네가 택한 의식이고 네가 직접 나를 네 몸에 불러온 거잖아. 내가 가진 음유시인으로서의 능력만 빼앗아가고, 내 영혼을 죽이려고 했잖아. 틀려?”

    에르제의 발이 한 걸음씩 서은우에게로 다가갔다.

    “전에는 기회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지만, 드디어 오늘 이 말을 해 줄 수 있게 됐네.”

    길게 뻗어진 에르제의 손이 서은우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러고는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긴 시간 동안 인간성이 마모되고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말이야.”

    흔들리는 서은우의 시선이 에르제의 옆얼굴에 닿았다.

    “너, 역겨워.”

    “……!”

    파르르, 떨린 서은우의 손이 강하게 에르제를 밀쳐 냈다.

    “역겹다고? 역겨워? X발, 남의 인생을 이렇게 망쳐 놓고 역겨워?!”

    “그래.”

    에르제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가로선을 그었다.

    “네가 의식을 해서 나를 불러온 이후로, 시간선이 아주 지독하게 꼬이긴 했어. 미래의 네가 과거로 가고, 현재가 엉킨 실타래처럼 꼬이고.”

    “…….”

    “하지만 뭐가 됐든 모든 일의 시작점은 너야. 너 혼자만 피해자인 척 그만해.”

    에르제의 눈이 붉게 변했다. 조금씩,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분노 때문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대륙을 멸망시킨 것도 너였고, 내 소중한 사람을 죽인 것도 너였어. 심지어…… 에이리스조차도.”

    “하, 에이리스는 너 또한…….”

    “그래. 목숨을 거두더라도, 내가 했어야 했어.”

    에이리스의 과거를 알게 된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만약, 에이리스가 서은우의 손에 죽기 전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지난 그녀의 삶이 어때 왔는지 들었다면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와 미련을 끊어 내기 위해 에이리스를 적으로 돌렸지만, 결국 그것은 다른 후회로 남고 말았다.

    다시 만회할 수 없는 후회로.

    꾸욱,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너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어. 그런데 넌 아직도 너 혼자만 피해자라고 생각해?”

    “크윽……! 웃기지 마……! 지금 너와 내 꼴을 봐!!”

    서은우의 눈도 붉게 충혈됐다.

    “너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아서, 미국 투어까지 앞둔 아이돌이 됐잖아……! 나는! 나는 X발, 이제야 연예계에 복귀해서 심지어 이미 있는 그룹의 신입 멤버로……!”

    “X랄.”

    거의 욕설을 입에 담지 않는 에르제에게서 짜증 섞인 욕이 튀어나왔다. 도저히, 저 역겨운 생각에 동의를 해 줄 수가 없었다.

    “네가 토트윈에 있었으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가 이 몸을 차지했을 때 나왔던 댓글들 한 번 읽어 줄까?”

    “……그건……!”

    “뭐, 아직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아니면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어? 웃기지 마.”

    에르제는 서은우를 노려보았다.

    “연습생일 때 의식에 손을 댄 너는 그따위 말할 자격 없어.”

    기운이 빠진다.

    고작, 이런 놈을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건가.

    아직도 본인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악만 쓰고 있는 어린아이.

    녀석의 시간은 아무래도 어린 시절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모양이었다.

    “그만하자.”

    더 할 얘기는 없었다.

    그냥 더 이상은 서은우에 대해서 신경을 쓸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너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지만…… 진작 시도해 볼 걸 그랬어. 이제야 알겠네.”

    대악마란 자리까지 올라가고서도, 왜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는지.

    “너는 너밖에 모르는 쓰레기야.”

    오늘 이후로 서은우가 어떻게 바뀌게 될지는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잘됐으면 한다.

    이왕 자신의 육체를 차지했으니까 잘되면 좋겠지. 아이돌로 성공을 해도 좋고.

    “멈춰! 개X끼야!”

    서은우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에르제를 불러 세웠다.

    고개를 돌리니 스스로의 팔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서은우가 보였다. 이미 눈이 맛이 가 있었다.

    “이거 네 몸이지? 난도질이라도 해 줄까?”

    “……원하는 게 뭔데 도대체?”

    에르제는 저렇게까지 해서 얻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었을 뿐이었으나, 서은우는 자신의 협박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낄낄 웃어댔다.

    “너도 네 몸은 소중한가 봐? 그치?”

    “…….”

    “토트윈에서 꺼져.”

    그리고 서은우는 원하는 걸 말했다.

    “그래 X발,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지. 네가 내 몸으로 살아가든 말든 신경 끌 테니까, 네 몸 난자되는 꼴 보기 싫으면.”

    “싫으면?”

    “토트윈 탈퇴하고 짜져서 살아. 내 눈에 띄지도 말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녀석의 모습에 에르제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에르제는 하아,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맘대로 해.”

    “……어?”

    “이제 그건 네 몸이야. 자해? 안 말릴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에르제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고 비틀어 열었다.

    “나는, 토트윈의 서은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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