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291화
‘됐다!’
에르제는 장 대표에게서 D.D.가 초대를 수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먹을 꽉 쥐었다.
D.D.와의 대중적인 이미지 개선, 도박적인 수였지만 그래도 잘 통한 모양이었다.
하긴 거기도 언제까지 토트윈을 라이벌이라며 언론 플레이를 해 가며 그룹의 인지도를 높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 해도 성적으로 역전하면 곧바로 언플을 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하고 있기도 했다.
에르제가 웃고 있으니 민주혁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참고로 그들이 있는 곳은 일본에서의 두 번째 콘서트, 몇천 석인 관객석이 꽉 찬 스타디움이었다.
“뭐야, 무슨 좋은 일 있어? 공유해.”
“그냥 D.D.가 우리 콘서트 보러 온다고 생각하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아 그거.”
민주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새파란 신인이었을 때 갔던 LAK의 콘서트, 그곳에서 토트윈은 LAK에 대한 라이벌 의식과 의욕을 불태웠었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이채선 덕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 느꼈던 제이의 기운이, 내가 지구에 와서 처음 만난 동족의 기운이었겠구나.’
제이에 관한 정보를 얻은 기회가 되기도 했기에 이제 와서는 별다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국 진출 건에 있어서 드디어 LAK를 뛰어넘었다는 사실이 기쁠 뿐.
‘D.D.가 아니라 LAK를 초대했어야 했나.’
그랬다면 묘한 쾌감이 있었을지도.
에르제가 뚜둑, 목을 돌려 근육을 풀자 민주혁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중얼거렸다.
“LAK를 불렀어야 했는데.”
“하하.”
에르제는 그의 말을 웃어넘기며 어깨를 으쓱 위로 올렸다.
“아직 투어는 한참 남아 있잖아. 그때 내가 제이 선배한테 한번 물어보지 뭐.”
“! 가능해?”
“안 될 건 없지. 물론 그쪽에서 내 초청을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약이 잔뜩 오를 것 같기는 한데,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에르제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으니 민주혁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악취미야.”
“누가, 네가?”
“나 말고 너!”
발끈하는 민주혁을 뒤로 하고 에르제는 라하임이 따로 준비해 둔 초콜릿 프라페를 쭉 들이켰다.
달달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퍼졌다.
콘서트 직전의 당분 보충은 확실히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이 있었다.
“나도 먹을래.”
초콜릿 프라페를 음미하는 에르제를 보며 민주혁도 서둘러 자신의 것을 집어 입에 들이부었다.
꿀떡꿀떡 넘어가는 목젖이 출렁이고 녀석도 자신처럼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후후.’
작전 성공이군.
에르제는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는 음료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은 D.D.를 초청한 콘서트였다.
목적은 서은우를 만나 어떻게 된 일인지 물으려는 것이었지만, 웬만하면 무대 또한 압도적으로 보여지고 싶었다.
D.D.에게 헛된 꿈을 꾸지 말라 경고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서은우를 새 멤버로 영입했다는 것 정도로는 자신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녀석의 콧대를 한껏 눌러놓겠다는 악의.
카테이아 대륙을 멸망시킨 장본인이었으며 자신의 동생을 죽인 원수에게, 그 정도 악의는 애들 장난일 터.
‘그래서 음료에 뱀파이어의 피를 좀 넣었지.’
에르제는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피로 회복이 된 듯한 민주혁의 안색을 보니, 뱀파이어의 피가 효과를 제대로 발휘한 모양이었다.
‘혈액 순환을 좋게 만들고, 몸에 기운을 북돋아 주며, 특히나 남자에게 참 좋은데 이걸 말로 할 수 없는…….’
에르제는 음음,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리고는 나머지 멤버들에게도 음료를 권했다.
바닐라 라테, 주스 등등.
희석한 뱀파이어의 피가 담긴 음료수들이 하나씩 멤버들의 목구멍 너머로 흡수되었다.
“으라아!!”
물론 태현우의 기세가 좀 오버 된 것은 계산 미스였다.
대기실을 휘젓고 다니는 기운찬 녀석을 어떻게 진정시키나 고민을 하던 때, 스태프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고지했다.
“콘서트 곧 시작합니다! 오프닝 준비해 주셔야 해요!”
“으라아아!!”
호랑이 기운을 뿜어내는 태현우를 보며 스태프가 당황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 * *
― HaLLo!
데뷔곡부터 시작해서, 이번에 새로 공개하게 된 신곡까지.
기존 곡을 다양하게 레퍼런스한 것까지 총 16곡, 그리고 앙코르곡까지 총 18곡.
장장 2시간에 걸친 콘서트는,
― 와아아아아!!!
― 토트윈, 토트윈, 토트윈!!
― 사랑해요!!!
일본까지 와 준 한국의 팬들과, 그들에 비해 좀 고요한 일본 현지인들의 반응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일본은 확실히 심심하긴 하네.”
“그래도 이곳을 주 무대로 삼은 아이돌 그룹들은 반응이 다르더라.”
“앗, 그래여? 더 자주 와야겠어여!”
멤버들은 평소보다 훨씬 멀쩡한 모습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대기실로 향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콘서트이자 투어의 세 번째 공연.
물론 충분한 휴식 기간을 병행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기운이 더 남아도는 느낌이었다.
“최근에 잘 먹고 잘 운동한 게 효과가 있나 봐.”
“그러게? 대표님은 이럴 줄 알고 계셨던 건가?”
“생각해 봐.”
태현우가 손가락까지 세우며 진지한 얼굴을 했다.
“격렬한 운동 이후에 근육이 붙는 기간은 휴식할 때거든. 콘서트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쉬는 동안 체력 비축도 되고, 전체적인 에너지도 단련이 되는 거지!”
그럴듯한 헛소리에 멤버들이 홀리는 것을 보며 에르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만 특별히 뱀파이어의 피가 섞인 음료 덕을 보았을 뿐이다.
그 때문에 라하임이 고생을 좀 했는데, 해서 앞으로 있을 미국 투어에서는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을 생각.
‘충분히 즐겨 두기를.’
에르제는 착각하고 있는 멤버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미국에서는 음료를 자주 사용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성적은 LAK가 엄두도 내지 못하게 벌려 놓는 게 좋을 테니까…….’
로드의 힘은 사용할 생각이었다.
제이가 비겁하다 말을 해도 어쩔 수 없다.
로드의 힘을 되찾았는데 쓰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게 한참 기운이 쌩쌩한 멤버들이 떠들며 걸음을 옮기는 도중, 대기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오늘 콘서트에 초청되어 왔던 D.D. 그들이 대기실 앞에서 토트윈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빛 살벌한데?’
에르제는 슬쩍 앞으로 나서며 D.D.의 멤버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가장 뒤에 있는 서은우까지 확인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콘서트에서 수준 차이를 좀 느꼈으려나?’
무려 1.5배는 높은 에너지였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멤버들 전원의 급격하게 올라간 에너지는 시너지를 일으켰고, 그게 평소보다 1.5배는 되었을 터.
그 기세에 눌리고 눌렸을 텐데도 이런 도전적인 눈빛이라니.
‘벌써 서은우가 멤버들을 장악했나?’
음,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냥 D.D.가 토트윈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의 기조인 모양이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깍듯하게 인사해 오는 D.D.의 리더 KAL과 그 뒤의 멤버들이 90도로 허리를 접었다.
“아……!”
악수만 하려고 손을 뻗었던 윤치우가 황급히 손을 거둬들이며 똑같이 허리를 접는다.
“아뇨, 그렇게 인사하지 않으셔도……!”
멤버들의 기강은 열심히 잡는 편이지만 다른 그룹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윤치우도 맹한 구석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대부분은 늘 후배로서의 위치였으니.
‘엄청 어색하네.’
에르제는 쩔쩔매는 윤치우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아직까지 비밀로 지켜 주고 있을 정도로 심성이 착한 인간.
윤치우뿐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
새삼 좋은 팀에 들어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에르제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그러고는 일부러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서.은.우.라고 합니다.”
“KAL입니다, 선배님.”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하하, 오라고 하시면 와야죠.”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이 KAL의 입에서 나왔다.
꿈틀, 민주혁의 눈썹이 움직였다. 태현우가 슬그머니 팔을 뻗어서 그를 막았다. 그러고는 턱으로 에르제를 슬쩍 가리킨다.
그의 바람대로 에르제도 그런 말에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아하, 그럼 미국에도 올래요?”
“네……?”
“오라고 하면 온다면서요.”
“아니, 그게…….”
윤치우가 ‘은우야……?’라고 작게 속삭이며 소매를 붙잡자, 에르제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아…… 하하…… 하.”
“요즘 선배니 후배니, 그런 꼰대 같은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나? 우리는 후배분들에게 그렇게 대한 적 없었던 것 같은데. 그치 현우야?”
“당연하지. 사실 우리도 아직 연차 얼마 안 되잖아. 선배가 훨씬 많은데 뭐.”
“그러니까.”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서은우에게 향해 있었다.
“아! 저쪽이 이번에 D.D.에 새로운 멤버로 왔다는……?”
“네, Silver Rain. SR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할 예정입니다.”
“실버 레인은 본명인가요?”
녀석은 말없이 에르제를 노려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비, 다시 바꾸면 은우.
그래 녀석이 ‘서은우’라는 이름을 그리 쉽게 버렸을 리가 없지.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서은우는 자신이었다.
은은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에르제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럼 D.D.의 멤버분들보다 훨씬 신인인 거네요? 아, 아직 같이 공연하거나 한 적이 없으니까…… 연습생이라 해야 하나?”
“선배님, 그런 말씀은…….”
“아니, 우리도 허리 숙여 가면서 후배님들이랑 인사하는데 혼자만 꼿꼿이 서 있길래.”
꼰대, 그 강력한 기운이 에르제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로드로 살아온 2500년. 그 짬밥은 어디 가지 않은 듯 그의 표정과 말 그리고 아우라가 되어 드러났다.
KAL의 시선이 에르제를 따라 뒤로 돌아갔다.
“아, 그게 연습생 기간도 따로 거친 적이 없이 바로 저희 멤버에 합류하게 돼서…….”
“아뇨.”
에르제는 미소를 지우며 단호한 표정을 했다.
여전히 굽히지 않는 녀석처럼 에르제의 시선도 굽힐 줄 몰랐다.
꼿꼿하게 뻗어나간 시선이 닿고 에르제의 입이 열렸다.
“제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그러고는 다시 싱긋, 입꼬리를 올리며 KAL을 바라보았다.
꼰대 같다느니 선배질 한다느니 하는 욕이 돌아도 상관없다. 그저 서은우와 독대할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각오였으니.
“새 멤버분, 제가 잠시 빌려 가도 괜찮겠죠?”
“아…….”
KAL은 난감한 듯 에르제의 맹렬한 시선을 회피했고, 옆에 서 있던 윤치우가 ‘왜 그러는데’라며 다시금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당사자인 둘은 주변 분위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노려보기만 할 뿐.
“괜찮을까요?”
에르제가 다시 한번 물으니 대답은 KAL이 아닌 SR에게서 돌아왔다.
“선배님이 해 주시는 정신 교육, 받아 보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