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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86화 (286/307)

제286화

286화

에이리스의 고단했던 기억을 관찰자로서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빠져나온 에르제는 몰골이 처참했다.

주륵,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윽…….”

에르제는 곧바로 손을 이용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새어 나오는 양이 어찌나 많았는지, 이내 손등을 타고 피가 흘렀다.

“쿨럭.”

에르제는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내며, 여전히 남아 있는 환영을 바라보았다.

에이리스의 모습을 하고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 녀석.

환영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에이리스가 흘렸던 피는 이것보다 훨씬 많아.”

“…….”

그래, 틀린 말이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벌어졌던 비극은……. 자신을 뺀 가족들의 이야기는, 잔혹했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차라리 알지 못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엉키고 뒤섞였다.

숨겨져 있었고 왜곡되어 버린 이야기는, 이제 와서야 비극이 되었다.

‘……왜.’

아버지는, 에이리스에게 그렇게까지 했던 걸까.

분명 예언이니 뭐니 이야기를 했었는데.

에르제가 고개를 들어 환영을 보자, 녀석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예언이 뭐였을 것 같아?”

“……알고 있어?”

“당연하지. 에이리스랑 2천 년이 넘게 함께했다고. 에이리스가 알고 있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하지만, 기억에서는 에이리스도 모르는 것 같았는데.”

에르제의 말에 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리스는, 지속적으로 고통스러워했어. 가족을 죽이고 일족을 떠났을 때도, 그 이후에도…… 정신이 마모되기 전까지는. 그러니 그때, 당연히 예언이 뭐였는지 찾아봤었지.”

이어지는 말을 들어 보니, 에이리스는 그들이 함께 있던 마을의 장로를 찾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알게 된 예언은,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만월 옆에 두 개의 별이 동시에 떠오를 때, 자색의 별은 적색의 별의 절반을 앗아갈 것이다. 그리고 끝내, 모든 것을 죽음으로 인도하리라.”

“…….”

큰 마을에 하나씩 있었던 피의 예언자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틀린 적이 없었다.

그들은 미친 황제에 관한 이야기도, 100년 전에 예언을 했을 정도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루칸 또한 그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적색의 별은 에르제, 자색의 별은 에이리스.

아직 뱀파리스라는 것이 있지도 않을 때였지만, 그들은 이미 ‘자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예언은.

“실현이 되기는 했네.”

에이리스는 로드의 힘을 절반, 가져가게 되었고.

또한 자신과 에이리스, 둘 모두 한 번씩 죽어야만 했다.

‘나는, 따지고 보면 두 번인가.’

하지만 그것도 결과론적인 이야기.

만약 루칸이 에이리스에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아니, 차라리 예언이라는 게 없었더라면…… 분명 바뀌지 않았을까.

그런 에르제의 생각을 읽었는지, 환영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예언이란 것의 맹점이지. 지나고 보면, 마치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하지만, 예언이 있었기에 예언대로 흘러간 거잖아.”

아버지도, 어머니도, 에이리스도…… 가족 모두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거잖아.

하지만 에르제의 말에 환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결과만을 보고 이야기할 뿐. 운명이란 건 원래 어떻게든 흐르게 되어 있어.”

그녀는 에르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너도, 만나 봐서 알잖아.”

“……아.”

까득,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코와 입에서 흐르던 피는 어느덧 멎었지만, 새로이 손바닥에서 피가 흐른다.

그래, 환영이지만 녀석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위에 있는 놈들이 개입을 했겠지.

운명이라는 이름하에.

“……조금, 많이, 화가 나네.”

에르제가 짓씹듯 말을 구기자, 환영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이제 내가 환영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다 되어 가서 말이야.”

녀석의 말대로 어느새 초록 연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텅 빈 원통, 두 존재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네가 선택할 차례야. 나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이대로 인간으로서 살아갈지.”

“…….”

에르제는 말없이 환영을 바라보았다.

에이리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환영은, 계속해서 그의 기억을 찌르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로드의 힘을 얻을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다.

자신이, 에이리스에게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심사였지.

그리고, 역시…… 그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에르제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환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미안해.”

어떻게 보면 자신이 잘못한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아버지였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심지어는 기억 조작까지 당했었으니, 죄가 없다면 없겠지만…… 그것은 비겁한 생각일 뿐.

그곳에 속해 있었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지난날에 있었던 과오에 대한 책임과, 그에 대한 사과를.

“미안해, 에이리스. 가족을 대신해서,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것에 대해서도, 이후에 계속 널 오해하고 증오했던 것도…… 네가…….”

꾸욱, 입술에 힘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에르제는 아랫입술을 힘겹게 떼어 냈다.

“망가질 때까지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에르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진심을 담아 사과를 했다.

환영일 뿐이지만…… 에이리스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지만 에르제는 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어디선가 자신의 미안함이 닿기를.

“…….”

툭.

환영의 차디찬 손바닥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르제의 정수리에 닿았다.

바닥을 보고 있는 시선에, 피가 아닌 물이 하나 떨어졌다.

물은 바닥에 깔린 돌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

에르제가 고개를 드니, 환영은 울고 있었다.

울면서 웃고 있었다.

기괴한 표정에도 에르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은, 에이리스가 살아서 눈앞에 있는 것 같았으니까.

에르제는 입술을 아래로 짓눌렀다.

“적어도, 서은우가 널 죽이게 두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오빠가 날 죽였으면, 죄책감이 더했을걸.”

냉소적인 그녀의 말에 에르제는, 그녀를 따라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적어도, 내가 책임을 질 수 있었잖아.”

“말은.”

핀잔을 주며, 에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정신이 마모되기 전인 것인지, 그녀의 어깨 위에 늘 앉아 있던 하얀 박쥐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다, 내가 선택한 일이야. 하지만.”

에이리스는 말을 끊으며 에르제의 손을 꼭 잡았다. 시체처럼, 차가웠다.

“그래도 사과는 받아 줄게.”

용서하겠다는 말.

환영이 제멋대로 한 말일지, 에이리스가 지금 이 순간 잠시 다녀간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서히 흩어지는 환영과.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는 자색의 돌.

“…….”

서서히, 자색은 붉은색으로 변해 갔다.

몸을 숙인 에르제는 가만히 그것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남아 있던 로드의 힘, 그 반쪽은 손바닥에 났던 상처 속으로 흡수되었다.

* * *

“로드!!”

“괜찮아?”

원통의 문이 열리고 비틀거리며 나오는 에르제의 모습에, 서둘러 달려온 둘이 그렇게 물었다.

그들은 원통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특히 라하임의 경우는 더더욱.

해서 그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만큼 에르제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로드, 피를 너무 많이 흘리신 것…….”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그를 부축하던 라하임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전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기운, 로드의 힘이 흘러나온 피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로드, 설마…….”

“응.”

에르제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리스의 유산이야.”

“……아.”

도대체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라하임은 에르제의 눈 속에서 어느 정도 짐작을 해냈다. 한결 짐을 놓은 듯한 눈.

모르긴 몰라도, 남매가 화해한 것 같다고.

“잘…… 되었습니다.”

라하임은 에르제의 어깨를 부축하고 있던 손에, 아주 조금 더 힘을 주었다.

* * *

이번에 대마녀를 찾아가길 정말 잘했다고,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로드의 힘을 다시 찾은 것과는 별개로, 그에 비할 수 없는 큰 것을 받았으니까.

‘조만간 보답하겠다.’는 말을 남긴 에르제는, 라하임과 함께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쓴 가족 찬스였지만, 실제로 가족 관련 일이 되었으니…… 양심에 그렇게까지 찔리지는 않았다.

“뭐야, 혈색이 좋아졌는데?”

오자마자 그렇게 말하는 태현우에게 또 놀라기는 했지만 말이다.

‘로드의 힘이, 이럴 때 좋기는 좋아.’

숙소에 돌아오기 전, 만신창이였던 몸이 순식간에 회복이 된 걸 보며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곧 있을 투어에서도,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 시작해서, 일본과 미국 그리고 다시 마지막에 한국을 찍는 긴 여정.

팬들은 토트윈이 또 한국을 떠나는 것에 있어 아쉬움을 표했지만, 그럼에도 두 번의 콘서트가 한국에서 열린다는 사실에 그 마음을 삼켜 냈다.

‘시작은 서울, 그리고 마지막은 부산인가.’

예상보다 반응이 좋다면, 한국에서 앙코르 콘서트를 할 수도 있다고 하니…… 일산이든 광주든 어딘가에서 또 추가 콘서트를 할 수도 있을 터.

‘열 번은 확실히 넘겠는데.’

에르제는 손가락을 접어 가며 콘서트 횟수를 세어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식 시간은, 그들이 이동하는 시간이 다일 것 같다.

‘나는 이제 버틸 수 있기는 한데.’

멤버들을 죄다 뱀파이어로 만들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멤버들의 체력이 걱정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장소 대관과 관계자와의 협의 등등, 모든 일이 끝이 났을 때.

“넉넉하게 시간 배치했으니까, 너희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해라. 대신 콘서트 때는 최선을 다하고.”

생각보다 휴식 시간이 많다는 것에, 에르제는 놀랐다. 확실히 저번 안단테가 쓰러졌을 때 이후로, 장 대표가 토트윈이 무리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같더니.

그것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을 줄이야.

보통 이동하는 2~3일 정도의 텀을 제외하고는 투어가 계속 이어질 줄 알았다. 미국에 진출한 다른 팀들이 투어를 했을 때도 비슷한 일정이었고.

하지만, 장 대표는 그 텀을 무려 1주일이나 줬다.

그사이 쇼핑을 하든 숙소에서 쉬든 알아서 하란다. 물론 숙소와 식사 제외, 쇼핑 같은 건 ‘너희들 돈으로 알아서 해라’라고 선을 그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토트윈의 투어 준비는 착실하게 준비가 되었고.

이윽고 맞이한 5월 초.

토트윈은 ‘깜짝 싱글 신곡 발표’와 함께, 몇 달간 이어질 투어의 첫 시작.

서울 공연을 위해, 올림픽 경기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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