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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85화 (285/307)
  • 제285화

    285화

    화아악―!!

    눈을 감고 있으니 주변 풍경이 뒤바뀌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분명 초록 연기가 가득했던 좁은 원통 안이었는데, 눈을 떴을 땐.

    “아.”

    에르제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로드의 힘을 막 받았을 때인가, 아니면 그 직전인가.

    조그만 방 안, 에르제는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 둘러보려고 했다.

    그러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몸에 들어와 있는 듯, 에르제는 그저 의식만 남은 채 몸 주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겪어 봐.

    마지막, 에이리스의 환영이 남긴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거, 설마.’

    아무래도 환영이 말했던 것처럼…… 지금 자신이 들어와 있는 몸의 주인은 에이리스인 모양이다.

    다만 그저 ‘겪는’ 것뿐인지, 에르제는 아무 감각도 없는 상태에서 보는 것만 할 수 있었다.

    어린 에이리스와 같은 시선으로 보고 듣는 것만 할 수 있는 건가.

    에르제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녀의 기억을 천천히 따라갔다.

    * * *

    “으웅.”

    잠에서 깬 에이리스는 기지개를 펴며 그녀의 옆에 잠들어 있는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갓 8살 정도, 앳된 에르제의 얼굴은 곤히 잠에 빠져 있다.

    에이리스는 어두운 창밖을 보며 에르제를 흔들어 깨웠다.

    “오빠. 한밤중이야, 일어날 시간이라구.”

    “으어…… 5분만.”

    에르제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뒤척였지만, 에이리스의 성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얍!”

    에르제의 몸 위로 점프해 내리누르자,

    “악! 아파!!”

    고통스러운 비명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헙……!”

    에이리스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며 서둘러 몸을 옆으로 굴렸다.

    “에이리스.”

    낮은 목소리가 에이리스를 향했다. 경고성이 섞인 목소리의 주인은, 에르제와 에이리스의 아버지 ‘루칸’이었다.

    “죄송, 해요.”

    에이리스가 시선만으로 잔뜩 움츠러들자, 루칸은 저벅저벅 방을 가로질러 에르제에게 향했다.

    그의 시선은, 에이리스를 볼 때와 확연히 달랐다. 따뜻하고 온화한 눈빛.

    에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갈구하듯 손을 뻗었지만, 이내 벽에라도 막힌 듯 그대로 손을 물렀다.

    “일어나야지, 아들.”

    “5분만요오…….”

    에르제의 칭얼거림에도 루칸의 표정은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딱 5분만이다.”

    따스하게 대답한 루칸은, 이내 에이리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눈빛이었다.

    “너는 일어났으니까, 얼른 씻고 준비해라. 오늘 손님이 오신다 했으니 폐 끼치지 말아야지.”

    “네…… 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에이리스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다다다 달려갔다.

    달려가는 그녀의 발치에, 작은 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약 60세, 뱀파이어의 기준으로 이제 막 어린아이에서 벗어난 시점이었다.

    에이리스는 빼어난 미모 덕분에 남자아이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으나, 그녀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굴러다니는 돌멩이, 딱 그 정도?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단 하나였다.

    ‘힘’.

    그녀는 늘, 에르제와 비교를 당하며 커 왔다.

    흔히 말하는 재능충, 그것이 그녀의 오빠였으니까.

    술법도, 혈기를 다루는 능력도, 다른 사람들과의 친화력도, 심지어는 외모도.

    그녀는, 어느 것 하나 오빠를 따라잡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 에이리스가 힘을 원하는 이유는 오빠를 따라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어져 왔던 아버지의 눈빛, 단지 그것이 견디기 어려웠을 뿐.

    단 한 번만, 자신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 주기를…… 그녀의 소망은 그것 하나였다.

    해서 그녀는 인정을 받기 위해 힘을 탐했다.

    닥치는 대로 배웠고 밤을 새워 가며 연구를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닿을 곳은 멀게만 느껴졌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세상에.”

    “이게, 가능한…… 일이야?”

    루칸이 영주로 있는 마을 내,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들을 다스리던 전대 로드가 영면에 들면서, 로드의 힘은 다음 적합자를 찾아 떠돌았고.

    로드의 힘은, 에르제와 에이리스 두 뱀파이어에게 나뉘어 깃든 것이다.

    “됐어……!!!”

    에이리스는, 자신에게도 로드의 힘이 깃들었다는 사실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변에서 ‘이게 무슨 일이야.’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기뻐서 미칠 것 같았다.

    “이러면 아버지도, 나를 다르게 봐 주겠지.”

    에이리스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달음에 루칸에게로 향했다.

    로드의 힘 덕분에 도달하는 기간이 배는 짧아진 기분이었다.

    “아하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벌컥!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표정에 묻어 있던 행복함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에르제를 앞에 둔 채, 루칸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네가 제대로 처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칸은 침통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회초리를 들어, 에르제의 종아리를 세게 때렸다.

    “읏……!”

    “네가 유약하고 힘을 탐하지 않으니까, 반으로 쪼개진 거란 말이다.”

    짜악! 짜악!

    에이리스를 앞에 둔 채로, 에르제는 루칸에게 30대가 넘도록 종아리를 맞았다.

    아까운 피가, 종아리에서 줄줄 흘러내렸다.

    “아, 아버…….”

    에이리스는 얼어 있던 몸을 겨우 풀고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거의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을 하던 루칸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냉혹하고 차갑게, 에이리스에게 닿았다.

    “그래, 예언은 늘 틀리는 법이 없지.”

    루칸은 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초리를 방 아무 데나 집어 던진 채, 그는 홀연히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로드의 힘을 얻은 에이리스에게, 축하나 인정의 말 따위는 없었다.

    “……아아.”

    발밑에서부터, 벌레가 기어 왔다.

    사각사각, 끔찍한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였던 것은 두 마리가 되고, 수십 수백 수천 마리가 되어 몸을 뒤덮었다.

    “아아아악!!”

    에이리스는 눈을 꽉 감은 채로 주저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사각사각사각!!

    제 살이 파이고 뼈가 뚫리는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해서 에이리스는 몸을 긁어야 했다.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머리를 감싸던 손으로 온몸을 벅벅 긁어댔다.

    환영이 아닌 진짜 살점이 스스로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에르제보다 더한 상처가, 에이리스의 온몸에 새겨졌다.

    “에이리스!!”

    거의 실신해 있던 에르제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바로 에이리스에게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그만, 그만해!!”

    “놔아아!!”

    에이리스는 눈물로 잔뜩 번진 얼굴로, 에르제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에르제의 가슴에 세 개의 자상이 그어졌다.

    “에이…… 리스.”

    그러나 에르제는 와중에도 뚜벅뚜벅 걸어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아 주었고, 에이리스는 그대로 탈진해 기절했다.

    그리고 그날이, 에이리스에게 처음으로 벌레가 보이기 시작한 날이었다.

    * * *

    한 달이 흘렀다.

    그 사이, 집은 평화를 되찾았다.

    다만 그 방법이 좋지는 않았다.

    에이리스를 아무도 없는 곳에 가두고, 에르제를 로드로 삼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에르제가 이 사실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으므로, 루칸은 자신의 아들인 그의 기억을 조작했다.

    에이리스는, 로드의 힘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집을 떠난 것으로 말이다.

    에르제의 기억에 남아 있던 에이리스에 대한 것, ‘공동 로드’ 자리를 거절했다던 기억마저도 루칸에 의해 날조된 것이었다.

    “…….”

    홀로 어두운 곳에 갇힌 에이리스는, 무릎을 모으고 얼굴을 그 위로 파묻었다.

    또, 벌레다.

    루칸을 떠올릴 때마다 증식하는 놈들.

    하지만 이제는 환영임을 에이리스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검지손가락을 튕겨, 다리에 붙은 벌레들을 날려 보냈다.

    “…….”

    하루, 이틀, 일주일…… 6개월.

    음식을 가져다주던 이의 발길도 차차 끊어져 갈 때, 에르제가 정식으로 로드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에이리스는 멍한 눈으로 감옥 같은 곳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잔뜩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에게도, 로드의 힘이 있는데.”

    왜, 어째서, 모든 것을 에르제가 가져가는 거지? 왜일까. 왜지.

    증오도, 원망도, 간절함도 더는 남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갇혀 있는 칠흑 같은 어둠. 그것이, 에이리스의 속을 벌레처럼 갉아 먹은 뒤였다.

    “……그렇구나. 내가 문제였어.”

    에이리스는 간단하게 정의 내렸다.

    모든 것은 자신이 문제였다.

    “킥킥…….”

    실소가 터져 나오고, 에이리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걱거리는 무릎은 내재되어 있던 로드의 힘에 의해서 금세 복구되었다.

    까드득, 에이리스는 가로막고 있던 철창을 부쉈다.

    “너희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내가 되면 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아무도 억울하지 않겠지.

    ‘원래 그런 악마였어’, 뱀파이어들은 그렇게 생각할 테고.

    ‘맞아 나는 원래 그래’, 자신 또한 수긍할 수 있을 테니까.

    “간단한 걸 왜 이렇게 늦게 깨달았을까?”

    “뭐, 뭐야!”

    “나오면, 나오면 안 됩니다!”

    그녀는 가로막는 경비들의 목숨을 간단히 앗아갔다.

    열이 넘는 숫자가,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숨이 멎었다.

    “아아, 그래. 나는 이제 뱀파이어가 아니야.”

    로드의 힘이 나뉜 것도, 자신에게 또 다른 일족의 로드가 되라는 뜻일 것이다.

    그녀는 끝이 없는 합리화를 해 가며, 터벅터벅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그녀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마을로.

    “에이…….”

    그녀를 알아본 이들이, 처참한 몰골의 에이리스를 보며 헛숨을 삼켰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아.”

    그녀의 어깨 위를 기어 다니던 벌레가, 처음으로 스스로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다 많은 벌레들이 바닥으로 투신했다.

    “아아.”

    에이리스의 입가에 환희가 깃들었다.

    내가 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구나, 에이리스는 확신 어린 눈으로 ‘집’이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소식을 듣고 나온 루칸과, 모든 상황을 방관하기만 했던 어머니 ‘데이지안’이 있었다.

    “에이리스.”

    루칸과 데이지안은, 몸에 혈기를 두르며 경고했다.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한 번은 넘어가 주마.”

    그러나 에이리스는, 루칸의 말에 깔깔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칸, 데이지안.”

    “……!”

    “당신들은 내 부모가 아니야.”

    에이리스의 전신에 로드의 힘이 깃들었다. 그저 그런 혈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력한 힘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혈기를 손에 두른 채.

    푸욱,

    에이리스는 루칸과 데이지안의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는, 피 하나 묻지 않은 하얀 박쥐가 날개를 고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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