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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84화 (284/307)
  • 제284화

    284화

    “……무엇을 하는 겁니까?”

    라하임은 대마녀의 곁에 선 채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현재 대마녀의 얼굴은 그 라하임보다 훨씬 더 굳어 있었다.

    “말했잖아. 누군가를 만나는 중이라고.”

    “그러니까 누구를.”

    대마녀는 온갖 버튼이 달린 기계 앞에 서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하임.”

    “?”

    “너도 알다시피, 에르제는 로드의 힘을 잃은 것이 맞아. 그 나무…… 같은 것에 힘을 빼앗겼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

    대마녀와 라하임, 둘 모두 에르제가 서은우의 몸으로 돌아오기 위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에르제의 입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적어도 로드의 힘이 어떤 식으로 소모되었는지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서은우의 영혼과 에르제의 영혼, 두 영혼 간의 영역 싸움이 있었고.

    둘의 영역을 가르고 있던 거대한 벽을 밀어내기 위해, 에르제는 로드의 힘을 대가로 바쳤다.

    ‘그게 신…… 인지 뭔지 하는 작자 덕분이었다는 것 같기는 한데.’

    에르제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들었던 내용이 사실이 아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벽인지 뭔지 하는 게 로드의 힘을 흡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벽이 제멋대로 힘을 쓰는 걸지도…….”

    “아니.”

    그러나 대마녀는 라하임의 추측을 일축했다.

    “그건 아니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 겁니까?”

    대마녀는 대답 대신, 검출기를 보여 주었다.

    이어 마이크 형태를 하고 있는 검출기에는 붉은색 선이 진하게 그어져 있었다.

    “너는, 이게 뱀파이어의 힘으로 보여?”

    “……!”

    그리고 라하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설마…….”

    “그래, 에이리스야.”

    대마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이어 갔다.

    “예전에, 서은우가 몸을 차지했을 때 녀석이 죽였던 그 에이리스.”

    “…….”

    라하임 또한, 서은우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영혼 전이’라는 말도 안 되는 능력.

    그 덕분에 몸을 되찾았던 서은우는, 그 길로 감옥으로 향해 에이리스를 죽였고 로드의 힘을 하나로 만들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에이리스에게서 흡수했던 로드의 힘도 같이, 그 ‘벽’에게 빨려 들어갔을 텐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눈에 보이는 사실은 그게 아니잖아?”

    마녀들은 굳이 따지자면 ‘과학자’에 가깝다.

    그들은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것을 현실로 이루기를 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에 집착한다.

    라하임은 침을 꿀꺽 삼킨 뒤에 대마녀에게 물었다.

    “그럼 로드께서는, 지금 저 안에서 에이리스를 만나고 있는 겁니까?”

    “그래.”

    대마녀는 한숨을 낮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에이리스는 분명 죽은 것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로드의 힘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야.”

    알쏭달쏭한 말에 라하임이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있으니,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도 이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로드의 힘은 그 자체로 의지와 지성을 가지고 있어.”

    “……!”

    “대충 눈치챈 모양이네.”

    라하임의 반응에서 생각을 읽어 낸 대마녀가 턱으로 에르제가 들어가 있는 원통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에르제가 만나고 있는 것은 에이리스가 아니라…… 에이리스가 가지고 있던 나머지 반쪽짜리 로드의 힘이라는 뜻이지.”

    “……그런 건가.”

    그리고 라하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로드의 힘은, 주인이 죽고 나면 다음 주인을 찾아가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 선택은, ‘로드의 자질’이 있는 자.

    지금까지는 으레 그런 것이라며 넘어갔었지만, 대마녀의 말대로 ‘로드의 힘’이 자체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로드의 자질을 분석하고 적합자를 찾아내 깃드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전부 이해가 돼.’

    그동안 뱀파이어 일족이 멸종하지 않고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로드의 힘을 받아 로드가 된 이들이 모두 훌륭한 지도자였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로드의 힘이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째서 에이리스에게 깃든 거지?”

    그녀는 뱀파이어 일족에게는 아킬레스건이 되지 않았던가.

    에이리스는 적합자도, 훌륭한 지도자도…… 둘 모두 아니었다.

    그리고 대마녀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지금의 열쇠야.”

    “열쇠…….”

    “어째서 로드의 힘이 반으로 갈라졌는지, 그리고 나머지 반쪽은 왜 에이리스를 선택했는지.”

    대마녀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내뱉었다.

    “그리고, 에이리스는 왜 뱀파이어 일족을 나와서 뱀파리스라는 새로운 종족을 만들었는지.”

    “……!”

    그녀의 말에 라하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숨겨진 이야기가 더 있었다는 것인가.’

    기존에 알려진 이야기로는.

    에이리스는 시기 질투를 일삼다가 에르제의 밑에 있을 수 없다며 일족을 떠났다고 했다.

    똑같이 반씩 물려받은 로드의 힘인데, 어째서 에르제가 ‘로드’가 되냐면서 말이다.

    해서 ‘공동 로드’라는 괴상망측한 이름과 직위를 제안하기까지 했었는데, 에이리스는 그것을 박차고 떠나 버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무언가 더 있다면.’

    그래서 여전히 의지를 가진 채 에르제의 몸속에 숨어 있었던 거라면…….

    라하임과 대마녀의 시선이 초조한 듯 원통으로 향했다.

    현재 자신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이 생각들이, 부디 저 안에서는 해결이 되고 있기를 바라며.

    로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라하임은 주먹을 꾹 쥐었다.

    * * *

    “에이리스.”

    에르제는 눈앞에 보이는 환영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내 이름은 에이리스가 아니야.”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에르제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그럼 누구지?”

    에르제는 경계심을 잔뜩 세우며 물었다.

    “음~.”

    에이리스의 환영은 그를 놀리듯 뒷짐을 진 채 원통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이리스의 잔존 기억이자, 나머지 반쪽이랄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에르제는 미간을 좁히며 빙글빙글 도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로드의 힘 말이야.”

    그리고 환영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 반쪽이라고.”

    “……!”

    환영의 말에 에르제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에이리스가 가지고 있던, 그 반쪽인 건가.”

    “정답!”

    활기찬 반응을 보이며 환영은 장난스럽게 연기를 손으로 휘휘 저었다.

    마치 실체를 가지고 있는 듯, 초록색의 연기가 환영의 손길을 따라 이리저리 흩어졌다.

    ‘대마녀는, 왜 이걸 만나 보라고.’

    그리고 에르제는 여전히 얼굴을 굳힌 채 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계속해서 매혹의 힘을 사용하고 혈기를 뿜어내던 게, 이 녀석이었던 것일까?

    로드의 힘이 그 자체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에르제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이 적합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의지가 없다면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지성까지 갖추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에이리스는 서은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힘을 빼앗겼어. 그리고, 그 힘은 하나로 합쳐져서…… 분명 벽에 빼앗겼다.”

    “으음~ 그건 오답!”

    하지만 에르제의 말에 환영은 검지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흔들었다.

    “너, 완전히 착각하고 있구나?”

    “……뭘 착각하고 있다는 거지?”

    날이 잔뜩 선 에르제의 말에 환영이 혓바닥을 쑥 내밀었다.

    “바보네, 바보. 역시 에이리스를 선택하길 잘했어.”

    “…….”

    두 개로 갈라졌던 로드의 힘이, 각자의 인격이라도 갖추게 된 건지.

    어이가 없다는 듯 환영을 바라보고 있으니, 환영이 말을 이어 갔다.

    “생각을 해 봐. 내 힘을 흡수한 게 서은우일까, 아니면 너일까?”

    “……!”

    그리고 에르제는 그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설마, 너는 서은우의 영혼에…….”

    “그렇지!”

    환영은 낄낄 웃으며 박수를 쳤다.

    에르제의 대답이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내가 서은우의 영혼에 흡수되어 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면, 까무러치게 놀랄걸~?”

    다시 빙글빙글, 원통 안을 환영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이리스는 이미 죽어 버렸고, 그렇다고 다른 적합자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다구요.”

    그렇게, 환영은 줄줄이 자신의 상황을 읊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존재감을 표출했는데, 너는 ‘혈석인가!?’ 이러고만 있고. 답답해 죽을 뻔?”

    “……그거야, 로드의 힘은 당연히 흡수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응응. 그렇게 착각할 만하기는 했어.”

    환영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동조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원통 밖을 가리켰다.

    “대마녀, 저 녀석이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란 말이야. 내가 일부러 뱀파리스의 힘을 살짝 섞었는데, 그걸 곧바로 알아채더라고.”

    그제야 어느 정도 전말을 알게 된 에르제는 가만히, 환영을 바라보았다.

    “뭐가 되었든 벽에 흡수되지 않았다면, 그냥 나에게 로드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면 되는 거 아니었나? 굳이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가 뭐지?”

    “그야, 내 주인은 네가 아니니까.”

    “……에이리스는, 죽었어.”

    “알아.”

    환영은 조금 시무룩한 듯이 중얼거렸다가 다시 억지로 꾸며 낸 듯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소름이 돋는 감정 변화였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내 주인이 될 자격을 갖춘 것도 아니거든.”

    에르제는 환영의 말에 잠시 말과 행동을 멈추었다.

    로드의 힘의 반쪽, 이것을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자신이 받아들이든가, 혹은 몸 안에서 쫓아내든가.

    만약 몸 안에서 나간다면 다른 적합자를 찾으러 떠나겠지.

    그러나 그런 에르제의 생각을 미리 눈치챈 듯, 환영은 킥킥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나는 네가 죽기 전까지는 이 몸 안에서 나갈 생각은 없어. 어쨌든, 에이리스 다음으로 네가 마음에 드는 것은 사실이거든.”

    “……나에게 원하는 게 있는 건가?”

    그리고 에르제는 그렇게 물었다.

    지금까지 환영이 보이는 태도와 말은, 분명 그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응! 네가 내 조건을 들어주면, 나는 너를 주인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야!”

    몸에서 나갈 생각이 없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천방지축인 저 녀석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가는, 정말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도무지, 끝나지를 않는구나.’

    원래 전쟁 이후 처리가 제일 어렵다고 하더니, 이것도 그 일환처럼 느껴진다.

    머리를 헝클어뜨린 에르제는, 한숨을 내쉬며 환영에게 물었다.

    “요구가 뭔데?”

    그리고 환영은 여전히 에이리스의 모습을 한 채로, 빙빙 머리카락을 꼬았다.

    “네가, 에이리스의 기억을 봐 주었으면 해.”

    “……에이리스의 기억을?”

    일족이 싫어서, 공동 로드가 되기 싫어서, 그리고 에르제 자신을 싫어해서.

    그래서 가족을 모두 죽이고 떠나 버린, 여동생의 기억.

    꾸욱,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든 녀석인지 궁금하기는 했지.’

    에이리스가 어긋나지 않도록, 자신이 잘 보살폈어야 했다는 죄책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 살폈어야 했다는 후회도.

    여동생의 죽음을 타인의 손에 맡긴 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괴로움도.

    “견딜 수 있겠어?”

    넌지시, 환영이 물어 온 말에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르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환영은 천천히 걸어와 그를 포근히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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