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281화
[ 뒤통수라뇨? ㅇㅅㅇ ]
[ 토트윈만 그렇게 좋은 이미지 가져가면 어떻게 해. 자선 콘서트 같이 한 거잖아. ]
[ ㅇㅅㅇ ]
[ ? ]
[ ㅇㅅㅇ ]
[ 너 이제 로드의 힘도 없지? 나와. 한 번 붙자 그냥. ]
[ ㅠㅅㅠ ]
[ 어디냐 ]
코코아톡 답장을 보내던 에르제는 필살 이모티콘도 먹히지 않자, 이번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르제는 불편한 코코아톡은 내버려 둔 채, 홀로 방으로 들어가 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 ]
전화를 받아 놓고는 침묵을 지키는 제이에게 에르제가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자선 콘서트로 하기는 했지만 기부는 저희 그룹별로 따로 하기로 한 거잖아요.”
[ 그렇긴 하지. ]
제이는 하아,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 솔직히 팬들이 모금한 것도 너희들이 종용한 상황도 아니니까. 굳이 따지면 팬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거고…… 우리 쪽에서는 모금이 따로 없었으니까. ]
제이는 이미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그냥 투덜대려고 그런 거란 뜻이다.
“삐친 줄 알았잖아요.”
[ 삐치긴 누가 삐쳐. ]
발끈하는 제이에게 에르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요.”
[ 하. 이제 뱀파리스도 아니니까 찾으러 날아갈 수도 없고. ]
“저희 거리 두기 하죠.”
[ 너희 투어 첫 공연 한국에서 한다며. 게스트든 방청객이든 내가 찾아갈 거야. 딱 기다려. ]
“출연료는 없는데, 게스트로 올래요?”
[ ……됐다. ]
수화기 너머로 제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것이 상상됐다.
그렇게 이번 기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난 뒤, 제이가 저번 자선 콘서트 때에 있었던 화제를 꺼내 들었다.
어지간히 궁금했을 텐데, 자신이 먼저 말해 주기 전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이제야 말하는 모양이었다.
[ 그나저나, 너 저번에 매혹의 힘 쓰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
“아아.”
에르제는 턱 밑을 쓸며 대꾸했다.
“솔직히 저도 모르겠어요. 그때 어쩌다가 그랬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 그것도 그렇고, 언제였지? 개리 제임스와 콘서트 할 때였나? ……아, 아니다! 그 지미 쇼! 지미 쇼에서도 너 매혹의 힘 쓰지 않았어? ]
“그거 생방으로 챙겨 봐 준 거예요?”
이상한 포인트에 에르제가 반응하자 제이가 손으로 이마를 탁 짚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 자선 콘서트 때 매혹의 힘을 쓰길래. 혹시 몰라서 무튜브에 너 나온 부분 확인했지. 혹시 다른 때에도 그런 적 있나 해서. ]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 어쨌든 그때 나랑 둘이 만났을 때 네가 그랬잖아. 이제는 완전히 인간이 됐다고. 그러면, 매혹의 힘도 쓰지 못하는 게 맞잖아? ]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에르제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지미 쇼 때도 그랬고, 자선 콘서트 때도 그랬고. 선배, 혹시 저랑 같이 예능 나갔던 날 기억해요?”
[ 아. 아픈 기억을 꺼내게 만드네. ]
제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에르제는 그때를 회상하며 피식 웃었다.
그날, 제이는 에이리스가 자신에게 빼앗겼던 혈석을 찾기 위해 예능에 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제이는 소기의 성과조차 달성하지 못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기는 했지만, 에르제가 혈석을 섭취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 그거 네가 먹어 버렸잖아. ]
“네. 근데, 이번에 매혹의 힘이 아마 그때 먹었던 혈석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 ! ]
놀란 제이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 왜? 혈석의 힘은 아직 남아 있는 거야? 몸 안에 흡수된 혈석이 계속 존재하는 건가?? ]
“아뇨, 그런 느낌은 아니에요. 딱 그 순간만 힘이 생겼다가 또 갑자기 사라졌거든요.”
[ ……잔존 혈기인가? ]
“저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 중이에요.”
[ 그럴 확률이 높겠네. ]
제이의 동의를 얻고 나니, 아무래도 그쪽 추측이 신빙성이 높다고 느껴진다.
“으음.”
에르제는 낮은 신음을 뱉으며 생각한 바를 말했다.
“일단은 일족들과 한번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라하임한테 알아봐 달라고 말을 해 둔 상태에요.”
[ 흠. 일족들한테 물어보겠다? ]
하지만 에르제의 말에 제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는 다른 대안을 내어놓았다.
[ 너희 일족들은 혈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 않아? ]
“그렇……죠? 사실 혈석은 에이리스가 만들어 낸 거니까요. 어떻게 보면 선배가 더 잘 알 수도 있겠네요.”
혹시 제이가 뭘 알고 있어서 그런 말을 하나 기대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다른 것이었다.
[ 아니, 사실 나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해. 에이리스가 나한테 그렇게 많은 걸 알려 주지는 않았거든. 그냥 늘 가져와라, 처리해라 이런 것뿐이었으니까. ]
조금 씁쓸한 말투로 대답한 제이는 억지로 활기찬 톤을 꾸며 냈다.
[ 뭐 그건 지나간 일이고. 나 말고, 혈석을 직접 만져 본 사람이 하나 있잖아? ]
“직접 만져 본……?”
[ 대마녀. ]
“아……!”
[ 그때 나한테 있던 혈석을 제거해 줬던 게 대마녀잖아. 거기에 독까지 심어서 서은…… 아니, 대악마를 무력화시키기도 했고. ]
왜 대마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요즘 들어서 자꾸 주변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것도 지구에서 살아가며 변하게 되는 부분일까.
“그러네요. 대마녀를 생각 못 했어요.”
[ 2,500년이나 살았다면서, 아직 멀었다 멀었어. ]
에르제는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동의했다.
지금까지 그는 늘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카테이아 대륙에서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그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구에서는 뱀파이어 로드로서의 모든 모습을 다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이곳은 인간들밖에 없는 곳이었고 다른 종족을 굉장히 배척하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세계사나 영화 등등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해서, 지구에 와서 처음으로 겪은 변화는 일족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세리나부터 시작해서 플랑과 라하임, 그리고 다른 일족들까지. 에르제는 처음으로 다른 이에게 의지하고 부탁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세리나가 위험했던 적도 있었지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나쁜 변화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모든 일이 좋게 풀렸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 단계가 이거인가.’
에르제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으며 생각했다.
최근에 일족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 혹은 또 다른 인간들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만큼 지구라는 곳이 카테이아 대륙보다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는 뜻일 터였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해결 방법을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않는다면 좋은 점밖에 없지 않은가.
에르제는 픽 웃음을 지으며 제이에게 말했다.
“역시 혼자 생각해서는 답이 잘 안 나오네요.”
[ 그래. 모르는 거 있으면 선배한테 언제든지 물어보고. ]
한 건 올렸다며 뿌듯해하는 제이를 보니 취소하고 싶어졌지만, 에르제는 감사함을 모르는 종족이 아니었다.
품위는 지켜야지.
“고마워요.”
[ 어어. 대마녀한테 물어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나한테도 알려 줘. ]
“그럴게요.”
에르제는 제이와 간단한 약속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잠시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라하임에게 연락을 했다.
혈석에 관한 건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된다고, 그것보다는 대마녀에게 연락을 넣어 달라고 말이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하임에게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서 대마녀와의 약속 날짜가 잡혔다.
* * *
콘서트 투어가 시작되기 정확히 일주일 전.
에르제는 한창 바쁜 시기였지만 겨우 시간을 내서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이는 ‘대마녀’.
혈석에 관한 부분을 묻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만약 뱀파이어와 인간, 둘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좋을까.’
뱀파이어인 편이 좋은 점이 훨씬 많을 테지만…… 그중에서 장점이자 단점이 되는 것이 하나 있어서였다.
다른 인간들보다 수명이 압도적으로 길다는 것과 천천히 늙는다는 것.
괜히 지구에서도 엄청난 동안을 유지하는 이들에게 뱀파이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아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노화가 인간들보다 훨씬 느리게 온다.
‘결국 언젠가는 멤버들도 이상한 걸 눈치를 챌 거고…… 100년쯤 지나면 혼자만 남게 될 수도 있겠지.’
에르제는 여전히 선택을 내리지 못한 채 고민을 하며 약속 장소에 도착을 했다.
‘크네.’
에르제는 고개를 들어 거대한 산을 올려다보았다.
겉으로는 평범한 산처럼 보이는 이곳에, 마녀들이 기거하는 본단이 있다.
최근 들어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 것인지 대마녀는 본단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얘기를 했고, 어쩔 수 없이 에르제는 라하임의 도움을 받아 이곳으로 날아온 상태였다.
“로드. 들어가시죠.”
라하임이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고 에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꽉 막혀 있는 암석을 향해 걸었다.
툭―.
커다란 바위, 당연히 몸은 이에 부딪혀 멈췄다. 이곳으로 산행을 오는 모든 인간들도, 지금의 에르제와 같이 행동한다면 똑같은 일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는 그것은 이곳이 본단의 정문이라는 것을 모를 때의 이야기.
에르제는 발치에 부딪힌 암석 벽을 보며 동그랗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는 대마녀가 일러 준 대로.
툭, 투두둑, 툭툭.
바위 위를 리듬감 있게 두들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위 안에서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에르제?”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는 듯 그녀는 곧바로 에르제를 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에르제 또한 목소리를 듣고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윤소희 실장님?”
어쩐지 회사에 며칠간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이곳에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마녀님이랑 약속 있지?”
윤소희는 그렇게 말을 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거대한 바위가 쿠구궁,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지고 틈이 생겼다.
‘환영 같은 방식인가 했더니, 진짜 문으로 만들어 놨네.’
에르제는 신기한 듯이 이를 바라보다가, 라하임과 함께 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뒤편에서 다시 굉음을 울리며 바위 문이 닫혔다.
분명 쪼개졌는데 그런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붙은 상태.
“신기하지?”
윤소희가 에르제를 보며 쿡쿡 웃었다.
“네. 카테이아 대륙에서는 보통 환영진을 많이 쓰거든요.”
“대마녀님이 직접 만든 문이야.”
“아하.”
저번에 독을 제조할 때도 느꼈지만 대마녀는 생각보다 다재다능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 덕분에 에르제는 답을 얻을지도 모르겠다는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기다리고 계셔.”
“가죠.”
마치 성 안에 들어온 듯 고급스러운 융단을 밟으며, 에르제는 윤소희의 뒤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