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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76화 (276/307)
  • 제276화

    276화

    순간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질 뻔했지만 에르제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냈다.

    지미가 눈썹을 위로 올리며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고 있었기에, 에르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송 사고라 할 정도로 티를 낸 것도 아니었기에, 에르제는 태연하게 질문에 대한 답을 이어갔다.

    “한국에서는 마스크에 모자에, 온갖 중무장을 하고 가도 알아보시는 팬들이 많았거든요. 근데 여기에서는 맨얼굴로 다녀도 알아보시지 못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게 제일 체감이 됐던 것 같아요.”

    “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네요.”

    지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허허,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현재 기준으로 빌보드 탑 100에서 2위, 그리고 여기 토크쇼까지 나와서…… 앞으로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요?”

    “하하하. 그러게요. 하지만 이곳에서도 팬들이 많이 생긴다는 뜻이니까,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손을 내저으며 웃는 에르제의 눈동자가, 살짝 붉은 빛으로 빛나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잠깐의 짧은 시간, 에르제가 의도하지 않은 ‘매혹의 힘’이 발현되었다.

    지미와 토크쇼의 제작진 그리고 조금 이따 있을 라이브 밴드의 연주자들까지.

    그들의 시선은 찰나의 순간에 에르제의 모든 표정과 행동에 사로잡혔다.

    살포시 웃으며 비틀리는 입꼬리와 눈웃음, 그리고 절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매혹의 힘이 여과 없이 발휘되면서, 카메라 감독은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 클로즈업을 당기고 있던 참이었다.

    “!!”

    조금 뒤에서야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로서는 정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설마.’

    그리고 에르제 또한,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침을 꿀꺽 삼켜 넘기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아니,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혈석의 잔여물이 갑자기 반응을 보였고, 그 뒤로 주변 인물들의 표정이 멍하니 있다가 돌아온다.

    에르제는 자신의 눈이 붉게 변했다는 것을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매혹의 힘’이 발현되었다는 것은 곧바로 깨달았다.

    ‘뱀파이어의 힘이…… 돌아온 건가?’

    아니면 단순히 섭취했던 혈석의 힘이 존재감을 드러낸 것일까?

    지금 일부러 혈석의 힘을 끌어내 보려 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잠깐 뱀파이어가 되었다가 인간으로 돌아왔을지도.’

    에르제는, 꼭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로드의 힘은 언제고 토트윈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고, 또한 이번 미국 투어에서도 LAK와의 승부를 손쉽게 결정지을 패가 될 수도 있었다.

    다만, 다시 서은우의 몸으로 살아갈 때 꼭 뱀파이어여야만 하는 이유가 없었을 뿐.

    그래도 에르제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힘이…… 돌아오면 좋기는 할 텐데.’

    가지고 있는데 쓰지 않는 것과, 없어서 쓰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에이리스나 대악마 같은 위협이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 올린 에르제는, 일단은 혈석에 대한 생각은 접어 두고 토크쇼와 인터뷰에 집중했다.

    * * *

    심야에 방영하는 4대 토크쇼 중 하나, ‘지미 쇼’에 토트윈이 나왔다는 소식은 빠르게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번에 빌보드 차트 2위를 찍을 정도로 순식간에 팬덤이 크게 불어난 상태였기 때문에, 지미 쇼를 시청하는 실시간 시청자들의 숫자는 평소보다 1.5배는 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여지는, 가식 없이 털털하고 신체와 정신이 건강해 보이는 5명의 젊은 청년들의 모습에, 팬들이 아닌 이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대본을 달달 외워 갔던 멤버들과 이제는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는 에르제의 인터뷰 내용이 그들에게 좋게 보인 것도 한몫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온 문제의 장면.

    토트윈에게는 의아할 정도로 희소식이 될 장면이었고, 에르제에게는 왠지 찝찝함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TV로 방영이 되었다.

    에르제가 저도 모르게 약하게 뿜어낸 ‘매혹의 힘’이 카메라를 통해 전파를 타고 각 가정과 스마트폰으로 뻗어나간 것이다.

    매혹의 힘을 지속적으로 건 것은 아니었기에, 지미 쇼를 시청한 모든 사람들이 토트윈 혹은 에르제의 팬이 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에르제와 토트윈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싱글 앨범을 낸 수준과 비슷할 정도의 팬덤 상승을 이끌어 냈다.

    ‘원래…… 이렇게 파급력이 컸던가.’

    에르제는 2배 이상 활발해진 미국의 커뮤니티 채널들을 염탐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번처럼 매혹의 힘이 광역으로 퍼진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매혹의 힘을 걸지 않는 이상에는 금방 풀리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잠깐의 매혹 상태를 마치 운명이라 여기며 실시간으로 자신들은 이제 ‘이브’가 되었다고 하고 있었다.

    ‘음…….’

    편법 같아서 웬만하면 매혹의 힘은 데뷔 때를 제외하면 자제하고 있었던 건데…… 이것도 따지면 미국 데뷔인 셈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에르제는 볼을 긁적이며 커뮤니티를 끄고 날짜를 확인했다.

    앞으로 5일.

    아직까지 빌보드 차트 2위를 사수하고 있는 토트윈과 20위권에 진입한 LAK, 두 그룹의 자선 콘서트 라이브 방송은 5일이 남아 있었다.

    * * *

    토크쇼에서 보여 준 토트윈의 인터뷰와 무대 위에서 선보인 3곡, ‘Villain’, ‘Bang’, ‘HaLLo’의 반응은 뜨거웠다.

    덕분에 스포티 타임 주간 차트 순위에서 1위를 2주 연속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며, 무튜브의 ‘Villain’ 조회 수도 어느새 억대를 돌파한 상태였다.

    에르제는 차트를 확인한 뒤 스마트폰 화면을 끄며 생각했다.

    ‘오늘의 자선 콘서트는, 한국에 있는 팬들을 위한 거긴 하지만…… 미국에 있는 팬들도 많이 보러 오겠지.’

    어쩌면 토트윈을 보기 위해 들어온 많은 팬들이, LAK의 매력에 새로이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아직 한국 아이돌 문화가 새롭게 느껴질 것이고, 또 다른 그룹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일 테니까.

    ‘박쥐나, 그런 개념도 없을 테니까.’

    에르제는 톡톡, 손가락으로 허벅지 위를 두들기며 쉬고 있는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LAK가 ‘Villain’과 ‘Bang’을 어떻게 준비를 해 왔든, 자신들도 충분히 그들의 두 곡을 토트윈의 색깔로 재해석해서 가져왔다.

    똑같이 몇 퍼센트의 팬들을 빼앗긴다는 가정이면 현재 팬덤이 훨씬 큰 토트윈 쪽이 비율적으로 손해를 보겠지만, 에르제를 비롯한 멤버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팬들을 빼앗길 생각은 전혀 없었고, 되레 LAK의 팬들을 토트윈의 팬으로 만들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 말이다.

    ‘상부상조하면 좋겠지만.’

    에르제는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그의 한쪽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에요, 선배.’

    지금은 에이리스에 대항하는 동맹 관계가 아니다.

    선배와 후배 아이돌의 관계이며, 미국 시장에 도전한 도전자들일 뿐. 서로 경쟁자라는 의미다.

    설령 LAK가 앞으로 미국에서 영영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하더라도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LAK 멤버들도 워낙 잘하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준비한 만큼 최선을 다하리라.

    에르제는 주먹을 꾹 쥐며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번 자선 콘서트를 위해 대관한 공연장의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고 제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다들 준비됐어요?”

    “넵.”

    “여기도 준비 다 됐다고 합니다.”

    제이의 말에 토트윈 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서야 할 무대를 마주했다.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무대는 그 넓이가 상당히 넓었고, 뒤에 배치되어 있는 악기에는 이미 개리 제임스가 소개해 준 라이브 밴드 연주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짧게 리허설하고, 음향 체크만 하면 끝날 것 같다.”

    “알겠어요. 저희부터 해요?”

    “어, 우리는 먼저 하고 나서 너희 부른 거야.”

    “아하.”

    에르제는 제이의 말을 토트윈에게 전했고, 곧 라이브 밴드와 함께 리허설을 해 보았다.

    이런 소규모 공연장에서 무대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무대의 크기가 안무를 하기에 좁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무사히 몇 번의 리허설을 마치고 내려오는 에르제를 향해, 제이가 가까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빌보드 2위에서 계속 순위 유지하고 있더라?”

    “지미 쇼 여파가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이러다가 진짜 1위 하는 건 아니겠지.”

    제이가 ‘흐음~.’ 하는 소리를 뱉어내며 눈매를 가늘게 만들었다.

    “그러면 LAK의 팬들을 늘리고 말고를 떠나서, 절대 따라잡지 못할 것 같은데. 너희 앨범 순위도 지금 18위잖아. 그것도 최고 기록이라면서.”

    “아아.”

    에르제는 제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의 말대로 토트윈의 정규 4집 앨범은, 빌보드 탑 200에서 무려 18위까지 순위가 상승한 상태였다.

    그리고 현재는 토트윈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상태.

    “부러워 죽겠어, 아주.”

    제이가 투덜대며 말했다.

    “그거 ‘Villain’ 아이디어도 네가 낸 거라며, 작곡도 네가 하고.”

    “네. 단테 곡도 순위 높아요. 음~ LAK는 토트윈 이기려면 ‘Bang’ 순위부터 뒤집어야 할 텐데.”

    “너 방금 표정 엄청 재수 없었던 거 알지.”

    “그랬던가요?”

    능청을 떠는 에르제를 보며 제이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전에는 그래도 로드의 위엄이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냥 아주 얄미운 후배 같네. 둘 다 인간이 돼서 그런가.”

    “…….”

    에르제는 ‘인간이 돼서’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지미 쇼’에서 순간 느껴졌던 고통과 혈석이 가지고 있던 힘의 발현, 과연 그게 그것으로 끝일지…… 에르제는 확신하지 못했다.

    분명 매혹의 힘은 토트윈에게 도움이 되는 힘이었지만, 사실 혈석에 의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실상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에르제는 대답을 회피하며 제이에게 말했다.

    “일단 첫 곡, 잘하고 와요.”

    “여유 봐라.”

    제이는 얄밉다는 듯이 에르제를 바라보고는, 이내 LAK 멤버들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말을 남겨 두었다.

    “괜히 우리 거 보고 나서 쫄아 가지고 무대 망치지 말고. 적당히 즐기다가 무대로 올라와.”

    그렇게 말하는 제이의 옆모습에서 자신만만한 태도가 언뜻 내비쳤다.

    ‘과연.’

    오늘 자선 콘서트의 첫 오프닝 무대인, LAK가 부르는 ‘Bang’과 토트윈이 부를 ‘Special to me’.

    간단한 인사 이후 곧바로 시작될 무대에, 토트윈 전원은 카메라 사각지대에 서서 무대 위를 미어캣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LAK는 일정 시청자 숫자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정석적인 아이돌 곡의 느낌이 물씬 나는 ‘Bang’과, 청바지와 알록달록한 티로 청량한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LAK.

    자선 콘서트의 첫 무대는,

    ‘Bang’의 라이브 밴드 연주와 함께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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