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273화
LA까지의 투어를 모두 마친 뒤, 다음 날 에르제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시내로 나왔다.
단순히 마스크와 모자만 썼을 뿐인데도, 확실히 이곳에서는 알아보는 이들은 거의 없는 듯했다.
LA에 사는 동양인들이 많기도 했고, 아직까지는 토트윈 멤버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 정도의 팬들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뭐든 추측이기는 하지만.’
에르제는 걷고 있는 자신의 발끝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우락부락한 그림자.
“나만 믿어라. 로드.”
어쩌면, 옆에 있는 플랑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는 걸 수도 있겠군.
에르제는 큼, 헛기침을 하고는 약속 장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현재 쇼케이스를 함과 동시에 앨범 발매도 한국과 미국에 동시에 이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은 에르제를 비롯한 토트윈이 할 일은 딱히 없었다.
해서 원래는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며 놀까 생각 중이었는데, 때마침 그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도 LA에 와 있으니, 서로 다른 도시로 가기 전에 한번 보자면서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룹명이 LA랑 잘 어울리는 느낌이기도 하네.’
그걸 노리고 있어서 여기에 계속 상주하고 있나.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오늘 만나기로 한 장소로 들어갔다.
딸랑, 거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에르제는 이내 카페 안쪽에 위치한 인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굉장히 오래전 일이 되어 버린, 에이리스와 대악마와의 싸움 이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선배님.”
에르제는 마스크 안에서 씩 웃은 채 그의 옆에 앉았다.
같이 따라 들어온 플랑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주변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쟤는 왜 데려왔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여긴 미국이라고요.”
에르제는 미국과 관련한 무성한 소문들을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자신과 제이를 번갈아 가리켰다.
“이제, 저희 총 맞으면 죽어요.”
“아.”
제이는 에르제의 말에 놀란 눈을 만들었다.
“설마, 너도?”
“네. 뭐 선택한 건 아니었지만요.”
“그렇구나.”
제이는 입술을 아래로 눌렀다. 그도 그럴 것이, 에르제가 인간이 되었다는 건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말을 안 했었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던 에르제는 주문한 커피를 가지러 갔다 온 뒤,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왜 보자고 했어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보는 거냐.”
“설마.”
에르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제이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무심한 표정이 제이의 얼굴에 떠올랐다.
“설마 스폰…….”
“미X놈인가 진짜.”
제이는 저도 모르게 에르제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리며 기겁했다.
“나한테 왜 그래? 가만, 생각해 보니까 너 처음에 나 직접 만났을 때도 그 소리 했잖아.”
입이 막힌 에르제는 그대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 미안.”
그제야 손을 떼어 낸 제이가 눈을 흘겼다.
“나도 모르게 입 막아 버렸네.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큰일은 무슨.”
에르제는 쿡쿡 웃고는 말을 이어갔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국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모르지. 여기 LA인데.”
“뭐. 그럴 수도 있긴 하겠네요.”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 위로 올리고는 이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었다.
한국에 있는 같은 브랜드의 카페임에도, 평소 먹는 커피보다 훨씬 달았다.
“으.”
단 것을 좋아하지만, 너무 단 것은 또 좋아하지 않는다. 에르제는 이마를 찌푸리며 머그컵을 떼어 냈다.
“미국은 크고 달고 해. 여기서 입맛 잘못 들이면 살찌는 거 순식간이다?”
“그렇겠네요. 저희는 웬만하면 한식당만 다녀 가지고.”
“한식당도…… 한국보다 더 짜고 단 건 비슷하지 않나?”
“좀 덜해요. 이것보다는.”
머그컵을 위로 들어 올려 보인 에르제는, 탁 하고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둘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꽤 오래 이어졌다.
뭐랄까…… 사실 지금까지, 제이와 같이 있는 경우는 늘 시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첫 만남부터 가장 최근의 만남까지.
항상 일과 사건이 존재했고, 때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도, 혹은 적이 되어 이를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도 아이돌의 입장에서 보자면 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생각보다 평화롭게 느껴졌다.
정말 모든 것들이 끝났다는 것이, 비로소 직접 피부에 와닿는다고 할까?
에르제는 턱을 돌려 제이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자신과 비슷한 감상인지, 양손으로 컵을 감싼 채 컵 안에 있는 커피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에르제는 침묵을 깨고 물었다.
“선배는 어때요? 인간이 되고 나서.”
“……애초에 내가 선택한 일인데 뭐.”
제이는 자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마지막 싸움 전까지는 인간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어. 뱀파리스면 인간보다 더욱 우월한 힘을 가질 수 있고 아이돌을 할 때도 도움이 되니까.”
“그건, 그렇죠.”
“그런데 생각이 바뀌더라. 뭔가……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게, 사실은 내 것이 아닌 느낌?”
언뜻 어렵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이었지만, 에르제는 적어도 마음은 공감할 수 있었다.
최소한 매혹의 힘으로 팬들을 홀리는 건, 편법처럼 느껴질 테니까.
에르제가 생각하는 사이에도 제이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서 후회는 안 돼. 오히려 애들이랑은 좀 더 편해진 듯싶기도 하고.”
그러기에는, 이채선이 제이에게 불쌍한 일을 많이 당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LAK의 결속이 강해졌다면 제이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냥, 다시 인간이 되고 보니까. 평범하게 사는 게 좋더라고.”
“……아이돌이면 평범한 삶은 아니죠.”
“말꼬리는.”
제이는 다시금 눈을 흘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곧 반대로 에르제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인간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너는 어떤데.”
“저도 비슷해요. 적어도 후회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
자의는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타의에 의해 힘을 잃게 된 거니까.
하지만 에르제는, 처음부터 일족들을 자신에게서 독립시킬 생각이었다.
지서후를 처음 만났던 이후부터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 일족들이 지구의 삶에 새롭게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자신은 정체 모를 벽에 로드의 힘을 바치고 인간으로 이 몸에 돌아왔다. 즉, 더 이상 뱀파이어 일족들의 로드가 아니라는 의미.
여전히 일족들은 그를 로드라 여기고 있는 듯했지만, 언젠가는 로드의 힘이 다른 누군가에게 또 전해질 것이다.
‘로드의 힘이라는 게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라하임이 될 수도 있고, 플랑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꼭 새로 태어나는 뱀파이어에게만 전해지지는 않으니까.
로드의 힘을 가질 자격이 있는 이에게, 이제 하나가 된 그 힘은 자리를 잡을 것이다.
‘……나는 아니겠지만.’
어떻게 보면 힘을 포기한 일이기에,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에르제는 씁쓸함이 감도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한 진짜 이유는 뭐예요?”
“없…….”
“없다고 하지 마요.”
에르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이의 말을 끊었다.
지금처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물론 상관없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제이의 성격이라면 이런 얘기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니까.
입을 꾹 다문 제이가 졌다는 듯이 양손을 어깨쯤으로 치켜들었다.
“원래는 전쟁 이후 얘기나 좀 더 할까 싶었는데, 원래 성격이 그렇게 급했나?”
제이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쟁 때 보면, 신중함 그 자체였던 것 같은데.”
“그건 우리 쪽 피해를 제로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 거고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에르제가 그렇게 말을 하자 제이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안할 게 하나 있어서.”
“제안이요?”
“엉. 요즘 LAK랑 토트윈 팬들의 가장 큰 화제가 뭔지 알아?”
“알죠.”
에르제는 모니터링에 진심인 멤버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현재 팬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를 리는 없었다.
“LAK랑 토트윈, 둘 중 누가 먼저 빌보드 차트 10위권에 들어가냐 아니에요?”
“맞아.”
정확해, 제이는 그런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개리 제임스와의 곡이 빌보드 10위권 내에 들기는 했지만, 그건 논외로 하자고. 너희들끼리 한 건 아니니까.”
“그래야죠.”
제이의 말에 에르제가 동의하자, 그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누가 먼저 10위권 내에 드냐, 그런 거로 내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우리가 굳이 그런 걸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사실 서로 상황도 많이 다르잖아?”
LAK의 앨범은 토트윈보다 먼저 나왔고, 반대로 토트윈은 개리 제임스 효과가 있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서로 장단점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우리가 좀 더 유리한 상황이긴 한데.’
그나저나 내기에 관한 게 아니라면 뭘까. 에르제가 궁금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자, 제이가 입술을 떼었다.
“LAK랑 토트윈, 둘이 같이 라이브 방송 하나 할 생각 없나 해서. 너희 LA에 조금 더 묵는다면서.”
“네, 근데 라이브 방송이요?”
“응. 내가 괜찮은 소스 하나 가져왔거든.”
제이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생각해 봐. 빌보드 차트 10위 안에 두 그룹 모두 들어가면 좋은 거 아니겠어?”
“당연하죠. 그것만으로도 기록인데요.”
현재 남자 솔로 가수인 ‘파이’를 제외하면, 빌보드 10위 안에 든 아이돌 그룹은 하나도 없었다. 현재 ‘STARLIGHTS’와 ‘LAK’ 그리고 ‘토트윈’ 세 그룹이 노리고 있는 것도 그 자리였으니까.
하지만 제이의 말대로 모두가 그 안에 들어간다면, 나쁠 것은 없었다. 물론 그 순위에 따라 팬들이 말을 하기는 하겠다만…….
“그래서요?”
“보니까, 이번에 한국에서 기부 관련한 게 하나 있더라고.”
“자선 콘서트 말하는 거예요?”
“맞아. 지금 팬들이 말하는 것들 중에서 누가 빌보드 10위 안에 먼저 들어가냐는 것도 많지만, 사실 그보다 더 팬들이 원하는 게 있거든. 현재 우리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한국에 없다는 게 문제니까.”
“……아.”
두 그룹의 무대를 볼 수 없다는 거.
물론 라이브로 하는 미니 콘서트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건 한국에 있는 팬들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하는 거니까…… 확실히 의미는 있겠네요.”
“그렇지. 최소한의 보답은 될 것 같다.”
에르제는 제이를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원래 이렇게 팬들을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인간이 되고 난 이후라 그런 걸까…… 뭔가 좀 변한 듯했다.
제이는 후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때마침, LAK 대 토트윈, 이런 구도잖아. 팬들의 니즈도 채워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제이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이번에 미국에 발매한 타이틀곡, 그걸 서로 바꿔서 해 보는 거야.”
제이의 눈이 마치 사냥감을 바라보듯 빛났다.
그리고 에르제도 질세라 마주보……려고 했으나 문제를 깨닫고 표정을 고쳤다.
제이는 LAK의 리더였고 여기 오기 전 멤버들과 합의를 봤을 테지만, 자신은 두 가지 모두 해당이 되질 않는다.
에르제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건…… 멤버들이랑 상의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제이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에르제의 핸드폰을 밀었다.
“전화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