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264화
라하임은 에르제와 윤치우를 번갈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윤치우 님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괜찮아. 이미 너도 알고 있었다며.”
“그건.”
라하임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제 정체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었는데…….”
그의 시선이 윤치우에게로 향했다.
“저에게 와서 부탁을 했었습니다. 로드와 서은우, 둘 다 구해 줄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서요.”
“……그 전에 내가 돌아온 거고?”
“결론적으로는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대마녀를 찾아가서 방법도 강구해 보고 했었는데, 딱히 좋은 방법은 없더군요. 오히려…….”
수심이 깊어진 듯한 라하임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로드께서 다시 돌아오실 확률이 더 낫다고 해서, 나중에는 거의 둘 다 구하는 것은 포기하긴 했습니다.”
“해피 엔딩은 아니네.”
에르제는 라하임과 비슷한 얼굴을 하며 윤치우를 바라보았다. 윤치우의 표정 또한 그들과 비슷했다. 지금은 그들 모두, 서은우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윤치우였다.
“사실 무서워서…… 계속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은우는 어떻게 된…… 거야?”
희망을 담고 있으면서도 불안함이 공존하는 눈빛. 그러나 에르제는 둘 다 충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서은우가 에르제의 육신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뒤, 신이 그에게 그 사실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윤치우는, 자신의 몸에 들어 있는 서은우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 나중에…….”
에르제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나중에, 보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서은우가 자신의 몸에 들어간 뒤 무엇을 할지 에르제는 알지 못한다. 평범한 인간이 되어 지구로 올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글쎄. 과연 아이돌을 하려고 할까?
만약 연예계에 더 이상 뜻이 없다면, 윤치우는 서은우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살아 있기는 하다는 거네.”
“그렇지.”
에르제와 서은우, 그리고 이제는 죽어 버린 에이리스. 그들과 자신의 이야기는 며칠 내내 밤을 새서 대화를 나누어도 모자라다. 평범한 인간인 윤치우에게 그 사실을 다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 술법에 면역력이 강하니까 완전히 평범한 인간은 아니지.’
에르제는 피식 웃으며 다시 라하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화제는 빨리 전환을 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아무튼,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은?”
“아!”
라하임이 아차, 하는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게, 사실 안단테 님의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내 가는 소매치기범을 발견을 하기는 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잡을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하와이에 하루만 계시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며칠 더 머물 예정인데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처가 필요해 보여서요.”
“대처?”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하임이 머쓱한 얼굴로 코 밑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소매치기를 미행해서 아지트를 알아냈습니다.”
이어진 라하임의 설명은 이랬다.
그렇게 아지트를 찾은 라하임은,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단신으로 하와이 뒷세계를 평정했다고…….
당연히 홀로 쳐들어온 라하임을 가만둘 리는 없었으므로, 지금의 피는 그때 묻은 모양이었다.
“물론 제 상처는 없습니다.”
불쌍한 인간들의 넋을 잠시 위로해 주며 에르제가 재차 물었다.
“그래서, 그 아지트 말고 조직 몇 개를 소탕하고 왔다고?”
“소탕까지는 아니고.”
라하임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경고만 주고 왔습니다. 앞으로 동양인들 상대로 똑같은 짓을 하면 제가 찾아올 거라고…….”
“…….”
“…….”
모르긴 몰라도, 라하임 또한 한국식 드라마에 아주 깊이 빠져 있던 모양이다. 분명 저런 비슷한 대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에르제가 픽 웃자 라하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무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 라하임이 윤치우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속삭였다.
“로드께서는 이제 힘을 잃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계속 보좌할 예정이니까, 편하게 휴가를 즐기십시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요.”
“……그래.”
얼떨결에 대답한 에르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소매치기가 훔친 것이 자신의 지갑이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눈에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힘을 잃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린 자신에게, 여전히 뱀파이어 로드로서의 대우를 그리고 맹목적인 충성을 보이는 라하임의 모습은 든든하면서도…… 고마웠다.
그래도 로드로서의 세월이 허투루 보낸 것들은 아니었구나, 그런 감상에 잠시 젖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토트윈에서도 마찬가지겠지.’
언젠가 자신이 목이 망가져 노래를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다리가 부러져 춤을 추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토트윈 멤버들과 팬들은, 계속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까.
단순한 자신의 바람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까, 라는 예상이기도 했다.
만약 토트윈 멤버 중 다른 이가 그렇게 된다면, 그래서 팀을 나가겠다고 한다면, 자신은 가장 먼저 앞에서 막을 테니까.
왠지 모르게 훈훈한 기운이 맴도는 가운데, 윤치우가 그의 어깨를 살짝 쳤다.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 애들 기다리겠다. 빨리 들고 가자.”
“아, 응.”
“매니저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치우는 공손하게, 뱀파이어 식으로 인사를 했다.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며 반듯이 허리를 접는 방식으로.
어설펐지만, 그 나름대로의 감사 인사겠지.
라하임 또한 만면에 웃음을 띠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명예 뱀파이어 직위라도 드려야 하는 건 아닌지.”
“아하하. 그냥, 이제는 저도 많이 익숙해져서요. 숨기지만 않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윤치우는 조금은 쓸쓸한 얼굴로 대답했고, 에르제는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 미안함을 느꼈다.
아마도 그동안 에르제가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질책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이제는 에르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더 이상, 내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다행이고.”
에르제와 윤치우는, 안단테의 지갑을 들고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걷는 발걸음은 둘 모두 올 때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 * *
라하임이 장담했던 대로 이후 하와이의 일정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첫날도 안단테의 지갑 사건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휴가 분위기를 냈겠지만, 이후 탄력을 받은 토트윈은 더욱 신나게 놀았던 것이다.
해변가 구경부터 시작해서 분화구에도 올라 보고, 도시 내에서 쇼핑을 하기도 하고…….
종종 그들을 알아보는 이들과 라하임의 보호 아래 사진도 찍어 주면서,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던 것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받아 냈다.
그렇게 이윽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날.
“꺄아아악!”
“오빠! 여기!!”
“토트윈 사랑해!!”
팬들과 기자, 꽤나 많은 이들이 공항에서 토트윈을 반겨 주었다.
귀국 날짜는 다들 어떻게 알았던 것인지, 토트윈은 당황하면서도 능숙하게 손을 흔들어 주고 팬 서비스를 잊지 않았다.
경호원들은 그들이 일정 선 안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으나, 에르제를 비롯한 몇몇은 일부러 팬들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잡아 주기도 했다.
“저도 사랑해요.”
에르제는 큰 소리로 사랑한다 외치는 팬들을 위해 화답해 주며, 라하임의 안내를 받아 회사로 돌아가는 차에 탑승했다.
그들을 많이 알아보지 못하는 나라에 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감정은, 마치 이번에 서은우의 몸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와 꽤 비슷한 면이 있었다.
하와이에서의 생활이 편하기도 했지만…… 역시, 자신을 알아봐 주고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색다른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지금 자신의 기분에 가장 걸맞을 듯싶었다.
에르제는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입꼬리를 만지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와이에서는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던 커뮤니티, 그곳에는 다양한 사진들과 글이 올라와 있었다.
하와이에서 행복하게 휴가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과, ‘충분히 쉬고 오라’는 팬들의 댓글까지. 이제야 소속사가 정신 차렸다는 댓글에 에르제가 피식 웃음을 뱉었다.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보니 풍경이 빠르게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도 그의 시선에 잠시 닿았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아마 팬들에게도, 대중들에게도, 어쩌면 그들의 인생에 스쳐 지나가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을 어둠에 갇혀 있던 에르제는, 다시 빛이 가득한 곳으로 돌아온 세상에서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
* * *
모카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토트윈을 보며 장 대표는 흐흐,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선크림 등으로 관리를 나름 철저히 했지만 조금 탄 멤버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아주 신나게 놀던데. 나도 같이 갈 걸 그랬나?”
회식에 부장님 참석한다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다니. 딴청을 피우는 토트윈을 보며 장 대표가 섭섭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안다, 알아. 그래서 같이 안 따라갔잖냐.”
“에이. 같이 오시면 너무 좋았을 것 같은데요.”
태현우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자 장 대표가 되었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올해 전반기는 너희들도, 팬들도 조금 휴식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나을 것 같다.”
장 대표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물론 아예 아무 활동도 안 하고 있는 건 팬들이 많이 아쉬워할 테니까, 떡밥은 지속적으로 계속 뿌려야 하는데 흠.”
장 대표는 그들이 하와이에 가 있는 동안 고민을 많이 했었는지, 이것저것 의견을 내어놓았다.
“음악 활동을 중단하니 예능이나 CF 같은 것들이 꽤 많이 들어오기는 했는데, 사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자체 콘텐츠 위주로 하면서 푹 쉬었으면 하긴 하거든?”
“예.”
“최근에 단테도 아팠고, 은우도 쓰러졌었잖아. 나머지 사람들도 언제 그럴지 모르니까…… 그래서 일단 이렇게 추려 봤다.”
장 대표와 이윤이 보여 주는 예능들은, 대부분 힐링 계열의 예능이나 토크쇼 위주가 많았다. 또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이것도 하기 싫거나 쉬고 싶으면 쉬어도 돼. 혹시나 하고 싶은 사람들 있을까 싶어서 보여 주는 것뿐이야.”
다양한 플롯의 예능들이 그들의 앞에 놓여 있었다.
개인과 팀, 그렇게 따로 제안이 들어온 것도 눈에 띄었다.
‘재미있어 보이는 게 많기는 하네.’
에르제가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보고 있으니, 장 대표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은우는 안 돼.”
“?”
왜요? 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장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예능 내보냈다가는, 소속사 진짜 폭파된다.”
“…….”
그것도 그런가. 하긴 무대 위에서 쓰러진 자신이 예능에 출연하면, 팬들이 기겁을 할 것 같기는 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장 대표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두 달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자. 그 대신, 이라고 하기는 뭐 하지만 이후에 네게 제안할 것도 있으니까.”
씩, 입꼬리를 올리는 장 대표의 눈빛이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