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262화
사다리가 멈춘 곳은 1번, 3명이 들어가는 방이었다.
‘아.’
인간이 되면서 운도 떨어진 건가? 왠지 아쉬운데.
사실 3명 방이든 2명 방이든 상관은 없었지만, 에르제는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그가 그러고 있으니, 남은 두 개의 사다리 주인인 태현우와 민주혁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둘 다 2명 방에서 편히 지내고 싶은 모양인지.
“책 읽을 때 사람 많으면 불편한데.”
“나는 일단 넓은 게 좋아!”
깍지를 끼고 우두둑 소리를 내며 곧 싸우려는 사람들처럼 준비를 한다.
‘카테이아 대륙에서 도박판 갔을 때, 그때 봤던 사람들 눈빛이랑 똑같아.’
에르제는 확률에 목숨 거는 두 사람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간다?”
태현우의 말에 끄덕, 민주혁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네 번째 사다리에 위치해 있는 것은 민주혁, 곧 그의 이름 아래로 진한 선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민주혁의 이름이 멈춘 자리는 ‘1’번.
“아싸!”
자동적으로 2번이 당첨된 태현우가 포효하고, 결국 윤치우와 에르제 그리고 민주혁이 한방을 쓰게 되었다.
“드가자! 단테야!”
“아…….”
태현우에게 방으로 끌려가는 안단테는 조용히 방을 쓰고 싶었던 모양인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단테, 고생하겠네.”
안단테도 못지않은 하이 텐션이기는 하지만, 태현우 앞에서는 태양빛 아래의 불빛이랄까…….
안단테가 이쪽을 향해 뻗은 손이, 태현우에 의해 매몰차게 방 안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들어가자.”
윤치우의 말에 에르제와 민주혁도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와.”
“……장난 아니네.”
그들은 모두 숙소 안과 밖 풍경 모두에 감탄사를 뱉었다.
따스한 햇빛은 여과 없이 통유리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고, 시선을 조금 더 멀리에 두면 햇빛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닷가가 보였다.
하얀색과 갈색을 베이스로 한 깔끔한 호텔 숙소 내부와 아름다운 바깥의 풍경.
창가에 위치한 침대에 셋 모두 걸터앉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예쁘네.”
“보고만 있어도 힐링되는 기분이야.”
에르제와 민주혁이 그렇게 말을 하자 윤치우가 풋,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나가지 말까?”
“무슨 소리야.”
그 말에 민주혁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바로 바닷가 가야지.”
“그럼 라하임 매니저한테 연락하자.”
윤치우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보호자도 없이 여행을 보낼 수는 없었기에, 라하임도 하와이에 같이 따라오게 되었는데. 그는 따로 1인실에 머물렀기 때문에 다른 층으로 흩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뭐가 되었든, 이번 토트윈의 여행은 말 그대로 자유 여행 콘셉트.
보호자로 라하임이 와 있었고 에르제의 그림자 속에는 플랑이 혹시 몰라 숨어 있었기에, 하고 싶은 대로 놀아도 안전에 지장이 갈 이유도 없다.
쾅쾅쾅!!
어느새 옆 방에서는 벌써부터 나가고 싶어진 것인지.
“나와! 나가자! 바닷가로!”
단어마다 끊어 외치는 태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하하, 웃음을 터뜨린 셋은 수영복을 챙겨 나왔고, 토트윈은 그렇게 라하임과 함께 바닷가로 향했다.
* * *
수영복 바지에 얇은 티 하나, 토트윈은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그렇게 갖춰 입고 바닷가에 도착했다.
한 명씩 차에서 갈아입고 나오느라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으나 다들 귀찮았다는 듯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저 바다에서 밀려오는 냄새와 사람들의 즐겁게 떠들고 노는 소리, 파도에 부서지는 햇빛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야.”
태현우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가장 먼저 모래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 뒤를 토트윈과 라하임이 뒤따랐다.
‘누구야?’
‘몰라. 아시아인인 것 같은데, 연예인인가?’
평범한 복장으로 나왔을 뿐이지만 단순히 그들에게서 보이는 아우라만으로, 외국인들이 수군댔다.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은 그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슬금슬금 근처까지 다가왔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모른 척 지나가는 이들도 다반사였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외국인 팬들도 꽤 많지 않나?”
물에 들어가기 전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태현우가 말했다.
“그럴걸?”
모르긴 몰라도, 무튜브의 댓글 창을 차지하는 영어 댓글들을 보면 적지는 않을 텐데.
“근데 다른 아시아 분들이 대부분일걸? 하와이에서 외국인들이 우리를 알아보지는 못할 것 같은데.”
민주혁이 그렇게 대꾸하며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애초에, 이 사람들도 여기 놀러 온 거니까. 그냥 신기해서 쳐다보는 거겠지 뭐.”
“오케이, 그럼 마음 놓고 놀아도 되겠구만.”
태현우는 히죽 웃고는 발을 모래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그 추진력을 이용해 쏜살같이 바닷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
“야!”
“현우는 극한의 ‘E’가 틀림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민주혁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 따라 일어났다.
혼자만 즐기게 둘 수 없지.
다른 토트윈 멤버들도 그리고 에르제도 대충 짐을 돗자리에 둔 채 바닷가로 달려갔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속, 토트윈은 물장난을 치며 놀았다.
라하임은 짐을 지키기 위해 돗자리 위에 아직 앉아 있는 상태.
그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멤버들과 함께 웃으며 놀고 있는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원래 자리로 다 돌아왔구나.’
어떻게 하신 건지는 모르겠다.
로드의 힘을 잃으신 것도, 그 이유는 모르겠고.
그러나 라하임은 에르제가 다시 돌아왔을 때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윤치우의 부탁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던 중.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에르제는 이미 서은우의 몸으로 돌아온 뒤였다.
― 나 돌아왔어.
그렇게 말하던 에르제의 모습은 너무나도 지쳐 있어서 라하임은 어떻게 돌아왔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저 고생했다며 따듯하게 안아 주는 수밖에.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본인의 몸을 빼앗긴 서은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하임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풍경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 * *
토트윈은 말 그대로 물 만난 고기처럼 놀았다. 오후에 찾았던 바닷가, 그 수면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난 뒤에도 말이다.
그리고 바닷가를 채우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밤이 되니 대부분이 사라졌다.
대부분은 바닷가 뒤쪽 해변 거리를 거니는 이들이었다.
“해변가에서는 술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라하임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그 이유를 깨달은 멤버들이 아쉬움을 삼켰다.
“이럴 때 맥주 한잔 쭉 하면서 회포 풀어야 하는데.”
태현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고,
“너 술 약하잖아.”
민주혁의 팩폭에 쭈그러들었다.
짧게 웃음이 터져 나오고 그들은 짐을 정리했다.
서핑을 포함해 다양하게 놀다 보니 그들의 피부는 이미 쭈글쭈글해진 상태였다.
“어우, 피곤해.”
태현우가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하며 어깨를 주물렀다.
그리고 에르제도, 오랜만에 그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이제는 뱀파이어의 체력이 아니다 보니 노는 걸로도 지치는 모양이다.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네.’
에르제는 눈가를 주무르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러면 연습할 때도 힘들겠는데.’
다른 멤버들이 연습 뒤에 퍼질 때 자신도 합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제이는, 인간이 되어서 잘 지내고 있으려나.’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챙기며 피식 웃었다. 자신도 그처럼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에르제는 걸음을 옮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유려하게 펼쳐진 밤바다가 시선에 들어왔다.
힘을 잃고 인간이 되었음에 불만도 후회도 없다.
오히려 다 같이 나이를 먹어 가면서 토트윈으로서의 활동이 끝난 이후에도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더 좋았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서은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을까.
“은우야!”
에르제가 잠시 감상에 젖어 있을 때, 앞서간 멤버들이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돌을 밟고 서 있는 태현우의 손에는, 혹시 몰라 들고 왔던 통기타가 들려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뭘 또 하려는 모양이다.
가까이 가니 태현우가 작게 속삭였다.
“우리, 버스킹은 해 본 적 없잖아. 한번 해 볼래?”
“우리는 다 찬성했어.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한 건, 단테가 다 기억하고 있대.”
“음.”
에르제는 웃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기타는 안단테가 잡았다.
그를 가운데에 두고 나머지 멤버들이 양옆으로 두 명씩 날개를 펼치고 앉았다.
하와이의 해변가에서 버스킹이라.
흔하지 않은 풍경이긴 했다.
관심 없는 사람들과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이 갈렸다.
곧 안단테의 기타 선율이, ‘HaLLo’를 연주했다.
데뷔할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멤버들은 잔잔한 분위기에 맞춰 각자의 파트를 불렀다.
이 모습을 정면에서 촬영하고 있는 라하임의 근처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커다란 비눗방울을 가지고 놀던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산책하러 나온 신혼부부가,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이들이.
하나씩, 토트윈의 노랫소리에 홀려 모여들었다.
‘HaLLo’에서 ‘Epilogue’까지.
곡의 선정은 안단테가 당장 부르고 싶은 노래였고 멤버들은 모든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 듯.
― Para, Para, Parados―
화음까지 즉석에서 넣어 가며 노래를 불렀다.
메인 댄서인 민주혁이 튀어 나가서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중인 것만 제외하면, 그야말로 ‘토트윈 미니 어쿠스틱 콘서트’라고 해도 될 정도.
사람들은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기도 하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기도 하면서 즐겁게 무대를 관람했다.
앰프도 마이크도 없이 펼쳐지는 무대는 소음이 될 정도로 크지는 않았지만, 그들 주변을 둘러싼 이들에게는 충분히 들릴 정도는 되었다.
“다음 곡은 ‘Moonlight’입니다.”
안단테는 알아듣지 못할 이들에게 그렇게 곡을 소개하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이 노래는.’
에르제는 반주에 맞춰 발을 까딱거리며 생각했다.
‘서은우가, 무대에 섰던 노래.’
음원까지도 자신의 노래가 들어가 있지 않은 토트윈의 노래다.
아쉽게 활동이 중단되어서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했는데 기회가 이렇게 올 줄이야.
팬들에게 불러 줄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에르제에게는 지금만으로도 충분했다.
― Moonlight
파란 밤을 비춰
더욱 길어진 그림자가
내 마음을 알게 해
Where are you
왜 네게 가는 길은
비추지 않는 건지
뱀파이어의 힘 없이도 매혹적인 목소리가, 에르제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서은우가 불렀을 때와 확연히 달라진 짙은 감성과 매력적인 목소리의 ‘Moonlight’는.
“?!”
“……!”
태현우와 민주혁, 둘 모두를 깨닫게 했다.
그들이 알고 있던 서은우가, 다시 돌아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