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258화
서은우가 카테이아 대륙에서 시공간의 축을 겪으며 얻어 냈던 ‘영혼 전이’는,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넘어갈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물론 죽을 때마다 겪는 고통은 남겠지만, 적어도 그대로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불사’한다는 페널티도 없다.
‘아마, 서은우는 계속 자기 몸으로 살다가 죽겠지.’
혹은, 원할 때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그 몸으로 살다가 아무에게도 죽지 않고 자연스럽게 명을 마감하면 되니까.
늘 위협이 산재해 있던 카테이아 대륙과는 다르게, 지구는 그런 면에서 훨씬 편했다.
어느덧 이 칠흑 같은 세계에서 사라진 서은우의 빈자리를 보며 에르제는 거듭 이동했다.
‘아마, 이곳으로 온 서은우는…… 그 육체가 아니라 영혼일 텐데.’
에르제는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오감은 돌아왔지만 여전히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로드의 힘을 되찾은 것도 서은우의 영혼에서 빼앗은 거려나.’
흐음, 에르제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만 움직여 팔 위를 두들겼다.
서은우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바꾼다라.
녀석이 한 말 덕분에 가능성을 찾았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방법은 찾지는 못했다.
아마도 이 어둠뿐인 곳을 자신의 것으로 바꾼다면, 그러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제 주인을 찾아온 로드의 힘이 혈관에서 내보내 달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래.”
일단 한 번 해 보자.
에르제는 로드의 힘을 풀어냈다.
손과 발끝에서부터 심장으로, 천천히 검은색의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반으로 나눠졌을 때도 다른 뱀파이어들을 손쉽게 제압할 만큼 강력한 힘이었는데, 확실히 완전한 하나가 되니…… 몸에서 느껴지는 충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에이리스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에르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서은우에게 느끼던 죄책감을 덜어 냈다.
이제 와서 내 몸이니 네 몸이니 하고 싸우기에는, 서로 짊어진 업이 너무 많다. 그냥 이제부터는 이기적이고 싶었다.
“스으읍.”
에르제는 코로 숨을 들이마시며 로드의 힘을 사방으로 뻗었다. 가시처럼 솟아난 로드의 힘이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갔다.
“…….”
꽤나 집중해서 로드의 힘을 컨트롤해 보았지만, 어둠에게 닿지는 못했다.
분명 서은우와 자신을 가로막은 벽이 있었듯, 이 어둠도 어딘가에는 끝이 있을 것…….
“잠깐만.”
벽……?
에르제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서둘러 서은우와 마주쳤던 곳으로 달려갔다.
타다닥, 곧 뛰던 발이 멎고 에르제는 ‘벽’에 도착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벽 앞에 말이다.
‘물리적인 건 막는 것 같았는데.’
에르제는 손바닥을 천천히 벽에 가져다 대었다.
벽은, 소리도 빛도 심지어는 로드의 힘도 통과를 했지만 결국 서은우가 이곳으로 넘어오지는 못했었다.
꿀꺽 침을 삼켜 넘긴 에르제가 손을 앞으로 뻗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벽에 닿았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냥 실온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에 닿은 것처럼, 그냥 ‘벽이 있다.’는 것만 느껴진다.
‘카테이아 대륙에서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마법사들의 마법이나, 네크로맨서들의 영혼 관련 마법들. 모든 지식을 총동원했지만 2500년의 시간 속, 에르제가 원하는 정보는 없었다.
“음…….”
에르제는 여전히 벽에 손바닥을 올려둔 채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똑같은 어둠이지만, 에르제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서은우가 있던 공간과, 자신이 있던 공간의 넓이가 다르다는 것을.
여기가 원룸이라면, 저쪽은 대부호의 별장 수준이다.
최소 몇십 배, 그 정도는 차이가 나는 듯한 기분. 오로지 어둠뿐이지만…… 자신이 이곳에 있기에 그 크기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건 경계일지도 몰라.’
에르제는 벽을 손으로 쓸어 보며 생각했다.
‘서은우의 영혼과 내 영혼을 갈라놓은 경계.’
그리고 이 벽이 나누고 있는 공간의 크기가, 어쩌면 몸의 주도권을 결정하는 게 아닐까?
“……이래서 신이, 원주인의 영혼이 유리하다고 한 건가.”
몸 주인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땅이 기본적으로 넓다면, 자신 같은 침입자의 입장에서는 시작부터 불리한 싸움이니 말이다.
에르제는 벽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걸어보았다.
하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벽은 길었다. 심지어는 로드의 힘까지 써서 뛰어 보았는데도 닿을 수 없는 길이였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는 입맛을 다시다 제자리에 멈춰 섰다. 혹시나 벽의 끝에 닿으면 뭐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대로는 절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끝으로 가는 게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밀어 봐야 하는 건가?”
이 거대한 벽을…… 밀 수가 있을까?
분명 앞으로 밀어 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의 공간이 넓어지기는 할 텐데.
에르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판단하고, 양 손바닥을 모두 벽에 올렸다.
꾸우욱, 그리고 로드의 힘까지 써서 밀어 보았다. 있는 힘껏,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아아아……!!”
역시, 이게 아닌데.
에르제는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순간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전력을 다했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뭐 어떻게 하라고…….”
최소한 방법 정도는 알려 줘야지. 축복인지 뭔지 발동했다며.
설마 그게, 로드의 힘을 빼앗아 오는 걸로 끝이야?
예나 지금이나, 축복을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는 건 변하지 않았다.
[ 축복이 아직 활성화 중입니다. ]
하지만 위에서도 답답했던 것인지, 다시금 에르제 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아니, 이루어지는 게 맞을까? 축복이 ‘활성화’ 중이라고 하지 않은가.
에르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으로 벽을 더듬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는 않지만, 분명 축복으로 무언가를 하려면 이 벽이어야만 했다.
벽이 아닌 다른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만약 끝으로 가야 하는 거면, 축복의 빛으로 길이라도 만들어 줬을 거야.’
그러면 그건 아닐 가능성이 높고…… ‘활성화’ 중이라는 건 도대체, 뭐지.
에르제는 벽을 탕탕 두들겨 보기도 하고 얼굴을 들이밀어 가까이 살펴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후우.”
결국 짜증이 난 에르제가 로드의 힘을 담아 강하게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혹시나 구멍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벽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에르제의 그 시도가 효과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우웅, 우웅, 우웅.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벽이 떨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껏 벽은, 주먹으로 치든 손바닥으로 밀든 아무런 소리도 나지가 않았었는데…… 처음으로 반응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던 것은 처음 서은우를 만난 자리에서의 일.
끝을 찾아 걸어갔던 여정이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에르제는 계속해서 벽을 강하게 내리치며 우웅, 소리를 내는 곳을 향해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자신이 딛고 있는 발의 위치 즈음의 낮은 곳에 새하얀 빛이 진동을 토해 내고 있었다.
에르제가 벽을 내리칠 때마다, 하얀빛은 빛 가루를 떨어뜨리며 울었다.
“이게…… 축복인가?”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인 걸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에르제는 그 자리에 엎드려 하얀빛을 유심히 살폈다.
주먹만 한 크기의 하얀 빛은, 마치 벽 안에 갇혀 있는 듯이 보였다. 마치, 화석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하얀빛은, 그 줄기를 희미하게 벽을 따라 펼치고 있었다.
‘……나무줄기…… 같은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곳이 뿌리, 그리고 뻗어 있는 선들은 나뭇가지.
‘설마.’
에르제는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그러고는 그 손에 로드의 힘을 최대한 모았다. 심장에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전신에 있는 모든 로드의 힘을 끌어모은 수준이었다.
천천히, 에르제의 손이 하얀빛에 닿았다.
벽 안에 갇혀 있던 하얀 빛은, 로드의 힘을 보자마자 더욱 빛 가루를 뿌려대며 몸을 떨었다.
로드의 힘을 달라,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서은우의 낚시……는 아니겠지.’
아니, 아닐 것이다. 어쨌든 서은우는 대악마니까, 이런 빛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후.”
에르제는 짧게 호흡을 끊어 내뱉고는 로드의 힘을 빛이 있는 곳으로 밀어 넣었다.
꾸득, 꾸득, 꾸득.
여태 로드의 힘을 튕겨 내기만 했던 벽이, 하얀빛에 감응하여 검은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괴상한 형태로 움직이는 벽은, 에르제의 손은 가만히 둔 채 로드의 힘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받아들인 힘은, 하얀빛으로 고스란히 흡수가 되었다.
하얀빛이,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로드의 힘을 흡수한 탓이었다.
“…….”
시야에 닿는 공간을 전부 채우고 있던 거대한 검은 기운이 조금씩 줄어들어 갔고 하얀, 아니 이제는 검은빛이 된 뿌리는 그 크기를 더욱 키워 갔다.
동시에 벽을 타고 퍼져 있던, 육안으로는 거의 볼 수 없는 수준의 가지가 굵어지며 꽃을 피워 냈다.
점점 넓어지고 커지는 가지, 그 위에 피어난 하얀 꽃이 다시 씨앗을 뿌렸다.
잠깐 사이에, 지구에서의 1년이 이 안에서 흘러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검은 나무는, 벽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세력을 점점 넓혀 갔다.
로드의 힘이 줄어들수록, 나무는 점점 거대해졌다.
벽을 뚫어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점점 옆으로, 더욱 옆으로 벽을 타고 가지를 뻗었다.
꽃은 다시 씨앗을 뿌렸고 새로 태어난 나무들은 로드의 힘 없이도 자체적으로 벽 안을 가득 채워 갔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투명한 벽이 검은색 나무들로 완전히 메워졌다.
에르제는 자신이 만들어 낸 풍경을 보며 입을 벌렸다.
“……벽이…….”
느껴진다. 안에서 맥동하는 로드의 힘이 아직은 자신의 소유인 듯, 벽 전체가 자신의 것이 된 것 같았다.
로드의 힘도, 뱀파이어의 힘도, 모두 벽 안에 있었다. 이제는 평범한 인간이 되어 버린 에르제가, 이윽고 손을 벽에 얹었을 때.
쿠구구궁―.
벽은 자신의 의지대로 밀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너무나도 손쉽게, 에르제의 영혼이 가진 땅이 점점 넓어졌다.
“아직이야.”
에르제는 옆이 아닌 앞으로, 발을 옮겼다.
서은우와 자신의 영혼이 차지하고 있는 넓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해서, 쉴 틈은 없다.
두 영혼이 자리싸움을 벌이는 이 넓은 우주 같은 공간,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던 벽이 움직였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가장 끝에 있던 나무가, 힘을 다하고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하나씩, 하나씩.
주변에 벽이 밀고 나간 자리가, 서은우가 아닌 자신의 것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정확히 절반 지점까지 벽을 밀어 넣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처음 로드의 힘을 주었던 그 한 그루, 그것만이 남아 있었다.
“끝…….”
에르제는 아주 조금, 남아 있는 한 그루의 힘만큼 벽을 밀었다.
그리고 시야가, 뒤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