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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250화 (250/307)
  • 제250화

    250화

    대기가 마구 진동했다.

    저번에 에르제와의 강제 계약을 통해 지구에 잠시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 서은우의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반갑군. 에이리스. ]

    이미 예전의 말투는 잊었다는 듯 광오하고 오만한 목소리가 환희에 젖은 에이리스에게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대악마님.”

    서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색실로 수놓아진 하얀색 로브가 바람에 펄럭였다.

    [ 직접 지구의 땅을 밟는 건…… 너무도 오랜만이군. ]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 고생은 무슨. ]

    서은우는 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로브가 펄럭이며, 사이에 비치는 금색 장신구들이 어둠 속에서 빛을 내었다.

    한때 카테이아 대륙을 공포로 물들였던 미친 황제, 대악마 서은우의 모습이 지구에 재현되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에이리스가 시종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곧바로 몸을 찾으러 가시는 겁니까?”

    [ 그래야지. ]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는 서은우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주변 모든 것들이 그의 발밑에 있다는 듯, 그의 표정은 오랜 시간 악마들의 정점으로 군림해 온 위세로 가득했다.

    에이리스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혈석의 힘으로 강림하셨기 때문에 오랜 시간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알고 있다. 그래서 이리 몸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냐. ]

    서은우는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 해서,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 것이냐? ]

    “대략 2년 정도 예상됩니다. 다만…….”

    [ 다만? ]

    “어디까지나 혈석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입니다.”

    [ ……그래서 내가 카얀, 그 녀석이 혈석의 힘을 많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일렀거늘. ]

    “제 다리가 온전하지 못해서…….”

    그녀의 말에 서은우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 다 내 탓이다? ]

    “아니, 그런 게 아니오라.”

    [ 너를 죽이지 않고 이곳으로 보낸 게 나다. 차원 이동의 대가로 다리를 잃은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

    쯧, 하고 서은우가 혀를 차자 에이리스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구겼다.

    “죄송합니다. 실언하였습니다.”

    [ 알면 됐다. ]

    서은우는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덧 아침이 밝아 오는지 어두웠던 주위가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 ……태양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건 좋군. ]

    정체는 대악마이지만, 그는 현재 인간의 몸에 들어와 있는 상태. 그것이 지금 몸 주인과 맺은 계약이었으므로, 빛에 정화되는 일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본체의 일부만 빙의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몸이 죽는다면 서은우도 같이 죽는 형태의 계약이었다.

    리스크는 커졌지만 반대로 대악마의 힘을 온전히 쓸 수 있으니 사실상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는 그에게는 리스크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 멀었나? ]

    “에르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합니다.”

    [ 아직까지 그것도 확인하지 않고 무얼 하고 있었던 게냐. ]

    싸늘한 말에 에이리스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대악마께서 앞서가시기에 이미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 ……흠. 내가 오해하게 만들긴 했군. 그냥 가벼운 산책이었다. 산책. ]

    “그렇습니까.”

    에이리스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에르제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서은우를 그에게 데려다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제물이 되어 저 멀리 버려져 있는 카얀처럼 에르제도 곧 저렇게 될 테니까.

    흩어진 로드의 힘은 이제 반쪽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자신의 몸에 깃들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리도 온전히 돌아올 테고, 세상을 자신의 발아래에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 카얀은 이제 어떻게…….”

    에이리스가 고개를 돌려 카얀이 있던 자리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

    그녀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에르제인가 싶었지만, 그는 아니었고……. 에르제보다 더 익숙한 얼굴, 늘 그녀의 휠체어를 밀어주었던 제이가 카얀의 앞에 서 있었다.

    “제이?”

    [ 제이는 또 누구지? ]

    서은우가 뒷짐을 지고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저 흡혈귀인가? ]

    흡혈귀라는 말이 거슬렸으나, 그런 것을 따질 새가 없었다.

    이미 제이는 만신창이가 된 카얀의 앞에 서서 손톱을 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곧 제이의 손에 혈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자, 잠깐!”

    지금 카얀을 죽이면, 그의 통제를 받는 뱀파리스들을 수습할 수가 없다.

    때문에 목숨을 끊지 않고 숨만 붙여 두었던 건데!

    에이리스가 전속력으로 제이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서은우의 걸음이 워낙 빨랐던 탓에 카얀이 있던 자리에서 이미 꽤 멀리 벗어나 있던 상황.

    그럼에도 제이와 에이리스의 사이는 놀라울 정도로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멈춰!! 제이, 카얀을 죽이면 안 돼!!”

    그러나 제이는 비릿한 웃음을 지은 채 손을 들어 올렸다.

    “늦었어.”

    푹, 제이의 손이 그대로 카얀의 심장을 뚫어냈다.

    “아!”

    에이리스의 발이 그대로 멈추었다.

    “어떻게 네가…….”

    에이리스는 허망한 눈으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가 카얀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도와준 게 자신이었으나,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상황이었다.

    [ 죽으면 안 되는 건가? ]

    느긋하게 물어오는 서은우를 잠깐 째려본 후 에이리스는 입술을 씹었다.

    “카얀이 만든 뱀파리스들, 그들에 대한 통제권이 사라진 겁니다.”

    [ 한 마디로 네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얘기군. ]

    에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뱀파리스들의 세력을 다시 모으는 데도 시간이 걸릴 터.

    “에르제를 잡기 위해서 필요한 전력들인데…….”

    보나 마나 제이는 카얀의 힘을 계승해서 그들의 통제권을 가지려 할 거다.

    그러나 그녀의 중얼거림에 대답한 건 현재 원망의 대상인 제이였다.

    그는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봐. 로드는. 아, 이제 내 로드가 아니지.”

    “……!”

    설마.

    에이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이를 바라보니,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나는 1장로의 힘을 계승하지 않아.”

    “그럼…… 왜, 어째서…….”

    “너는 이해 못 해.”

    제이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으로, 에르제와 뱀파이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이리스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건가.

    그녀의 눈이 마지막에 등장한 파르만에게로 가서 멈추었다.

    저 드워프도 네 계획의 일부였구나.

    에이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세게 앙다문 잇새로 피가 새어 나왔다.

    너는 늘 이런 식이야.

    하고 싶은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방관하고 방관하다가 늘 마지막에 모든 것을 앗아 간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에르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리스는 분노가 어렸던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의 뒤에 있는 존재를 떠올리니 오히려 여유가 생긴 것이다.

    “너도 늦었어, 에르제. 대악마께서는 이미 지구에 강림하셨으니까.”

    “…….”

    에르제는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는 늘 시야가 좁아.”

    에르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진정 내가 네게 보여 주고자 했던 것들을 보지 못하고…… 그저 질투만 일삼았지.”

    “그게 무슨?”

    “더 이상은 말해도 소용없겠지. 너와 나는 이미 각자 살아온 시간이 몇십 배는 많아졌으니까. 그러니 이제 결착을 짓자.”

    바라던 바다.

    에이리스는 로드의 힘을 끌어올리며 자세를 잡았고, 에르제도 마찬가지였다.

    [ 제 발로 찾아오다니 멍청하구나. ]

    그리고 서은우 또한, 에이리스의 옆으로 발을 옮긴 채 조소를 머금었다.

    몇백 년 혹은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지독한 악연이 이제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 *

    에르제는 로드의 힘을 끌어올리는 에이리스를 보며 속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지금 그녀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로 에이리스가 영면에 들게 되면.

    관 앞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꼭 들려주리라. 에르제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서은우에게로 가서 닿았다.

    ‘미친 황제…….’

    에르제는 이미 그의 겉모습만 보고 정체를 파악한 뒤였다.

    ‘미친 황제가 어째서 그만한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늘 의문이었는데, 그걸 여기서 알게 될 줄이야.’

    대악마가 미친 황제였고, 또한 서은우였다.

    시공간의 축에 오랜 기간 갇혀 있다가 몇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그는 결국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이자 결과였다.

    결국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논제가 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이런 게 운명이라는 거겠지.’

    에르제는 씁쓸한 표정을 감춘 채, 옆에 서 있던 대마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에이리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서은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혈석을 힘의 원천으로 움직이고 있는 서은우는 그 무엇보다 혈석의 영향을 크게 받을 테니까.

    “시작하죠.”

    에르제의 말에 대마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무슨 꿍꿍이를 또? ]

    서은우는 무언가 수상한 기색을 느끼고 달려들었으나, 그 시도가 무색하게 상황이 급변했다.

    [ ……!! ]

    대마녀가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서은우의 몸이 발작을 일으켰다.

    그가 입고 있던 호화로운 옷 위로 검은색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서은우의 입에서부터 나온 중독된 피였다.

    “대악마님!!”

    “얘기했지. 시야가 좁다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에이리스에게 일침을 가하며, 그는 천천히 서은우에게로 다가갔다.

    해독할 수 없는 강한 독에 중독되어 그의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냐……. ]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웬만하면, 나도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어.”

    가능하다면 자신의 몸을 주어서라도 서은우를 살리고 싶었다.

    윤치우가, 그리고 어쩌면 다른 멤버들도 예전의 서은우를 그리워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에르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가열차게 독을 내뿜는 혈석은 대악마의 힘으로도 완전히 억제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검은 피는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사지는 마비가 된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기회가 되면, 안부는 전해 줄게.”

    [ 잠깐……! ]

    오랜 시간 공을 들였음에도.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에르제의 손이 대악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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