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249화
“너무 쉽다고 생각 안 해 봤어?”
“…….”
카얀이 그대로 손을 뽑아내자, 에이리스는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꾸득, 하는 소리와 함께 관통된 부위가 회복을 시도했지만, 무슨 수를 쓴 건지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퉷.”
에이리스는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흐려졌던 시야가 돌아왔다.
“……밑이었나?”
에이리스는 바닥에 뚫려 있는 구멍을 보고 입술을 짓씹었다.
“괜찮은가!?”
어느새 달려온 파르만이 에이리스의 앞을 막아선 채 물었다.
“괜찮아.”
“……그대들 종족은 피가 제일 중요하다고 알고 있네만.”
파르만은 흩뿌려진 피를 보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으나, 에이리스는 반대로 입꼬리를 올렸다.
“로드의 힘을 얕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밭은 숨을 뱉어내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상처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기는 했다. 흘리는 피의 양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괴물 같네. 꾸물거릴 시간이 없겠군.”
카얀은 얼굴에 떠 있던 웃음기를 지우고 그대로 짓쳐들어왔다.
쾅! 카얀의 주먹과 파르만의 망치가 부딪치며 공기가 파르르 진동했다.
조금 전까지 파르만이 상대하던 것이 도플갱어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만큼, 카얀은 파르만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혈석의 힘을 얻은 상태인지라 조금씩 파르만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버텨.”
에이리스는 파르만의 뒤에서 회복에만 집중하며 말했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은 위험한 상태임을 알려 주는 듯했다.
“수성은 이 몸의 전문이네.”
파르만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사방에서 들어오는 카얀의 공격을 쳐 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기에 단순한 일대일 싸움보다 오히려 불리했다.
그러나 수성에 자신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는지, 그 와중에도 파르만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은 채 꿋꿋이 버텨 냈다.
“뭐 이렇게 단단해.”
카얀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고는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혈석의 힘을 더욱 끌어올렸다.
전신에 더욱 충만한 힘이 깃들고, 이윽고 피가 증기를 피워 올릴 정도로 들끓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카얀의 어깨 위로 김이 솟아올랐다.
“……세 번 이상은 힘들겠군.”
파르만이 망치를 양손으로 꽉 잡으며 중얼거렸다.
“충분해.”
뒤에 있던 에이리스는 혈색이 돌아온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손에도 로드의 힘을 두른 혈기가 가득해졌다.
“두 번, 그 이후에는 교대해.”
에이리스는 파르만의 등을 보며 말했고,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 하다 드워프에게 목숨을 내맡기게 될 줄이야.’
혈석의 힘을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다. 혈석은 그것 자체로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나 1장로는 혈석을 제물로 사용할 이유가 없었으니, 그 힘을 온전히 끌어내는 데 부담이 없을 터.
‘이렇게 되면…… 오히려 조급해지는 건 내 쪽이야.’
에이리스는 다시금 파르만을 향해 돌진해 오는 카얀을 노려보았다.
쿠웅―.
둘이 부딪치며 만들어 낸, 보다 묵직한 충격이 그녀가 있는 곳까지 전해졌다.
‘혈석의 힘을 다 못 쓴 상태에서 제압해야 하는데.’
게다가 죽이는 게 아니라 제압을 하고 제물로 바쳐야 하니 난이도가 수직 상승한다.
때문에 의심을 하면서도 파르만을 받아들였던 건데…….
‘결국 데려오길 잘했군.’
에이리스는 마지막 3번째 공격에서 뒤로 날아가는 파르만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아직 완벽하게 회복된 상태는 아니지만, 혈석의 힘을 어느 정도 사용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수준은 될 것이다.
그러나 카얀 또한 그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하하.”
마치 에이리스의 속내를 눈치챈 듯, 그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너무 뻔해, 에이리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걸.”
에이리스는 문답 무용으로 그대로 카얀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람이 귀 옆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둘의 거리가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이제 혈탄 쏘는 건 재미가 떨어졌나 봐?”
거의 얼굴이 맞닿아 있는 상태에서도 여유를 부린 카얀은, 그대로 몸을 빙글 돌려서 에이리스의 손을 피해 냈다.
로드의 힘에 의해 찢겨나간 공기가 기괴한 소리를 만들어 내며 틈을 벌렸다.
“너무 쉬워도 재미가 없지.”
에이리스는 그대로 카얀에게 따라붙으며 반대편 손을 휘둘렀다.
마치 늑대인간처럼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린 상태.
다섯 줄기의 로드의 힘이 다시금 공기를 찢어 놓았다.
“어이쿠.”
카얀은 슬쩍 피해 내며 거리를 벌렸으나, 에이리스는 그럴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거세게 몰아붙였다.
찌이익, 찌익.
카얀이 입고 있던 티셔츠가 군데군데 찢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 또한 서서히 굳어 갔다.
‘죽인다.’
죽이려고 마음을 먹어야만 제압할 수 있다.
에이리스는 그렇게 머릿속을 세뇌하며 맹공격을 퍼부었고, 카얀 또한 그 심리를 읽은 모양이었다.
서서히 가동률이 떨어져 가는 혈석을 느끼며 카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힘이 많이 남아 있는 모양이야. 로드의 힘이란 건 참 편해.”
“너는 가질 자격도, 운용할 능력도 없다.”
공방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둘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이제는 카얀의 정신이 온전히 에이리스에게로 쏠렸다.
그녀가 찢어 놓은 공간은 순간적으로 진공 상태가 되어 그 자체로 지뢰가 되어 갔고, 카얀은 에이리스의 공격과 지뢰들까지 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쯧.”
혀를 찬 카얀이 공수를 전환했다. 수비만 해서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혈기를 담은 카얀의 주먹이 에이리스가 멈칫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에이리스는 방어를 도외시하고 있는 상태. 그녀는 어깻죽지가 찢겨나가는 것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더욱 카얀에게 가까이 붙었다.
“지금만 기다렸지.”
에이리스는 공격 대신, 카얀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뽑아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붙잡고 있을 뿐.
“뭐 하는……!”
카얀이 경각심을 높이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늦었다.
퍼억.
카얀의 옆구리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힘겹게 그가 눈동자를 옆으로 돌리니, 망치를 옆구리에 박아 넣은 파르만이 보였다.
카얀이 데려온 뱀파리스 둘은 이미 파르만에 의해 곤죽이 된 상태.
“도움 되는…… 새끼들이…… 하나도 없네.”
카얀은 하악, 숨을 뱉어내며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도 팔을 붙잡고 있는 에이리스 때문에 멀리 물러나지는 못했다.
“어딜 가려고?”
에이리스는 다 죽어 가는 듯한 몰골로 입꼬리를 올렸다.
퍼억! 다시 한번 파르만의 망치가 카얀의 다리를 향해 내리쳤다.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카얀의 다리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이리스는 그제야 팔을 놓아주며, 다치지 않은 손으로 카얀의 머리카락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도플갱어니?”
“……흐.”
카얀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은 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가 너와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넋두리는 나중에 가서 해. 제물이 된다고 곧바로 죽는 건 아니니까. 유언 정도는 내가 직접 들어 줄 테니.”
“널…… 따라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 순간, 카얀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혈석을 부수기 위해 심장 쪽으로 혈기를 집중시켰다.
“!!”
이를 눈치를 챈 에이리스는 손날로 카얀의 뒷목을 쳐서 그를 기절시켰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파르만도 망치를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은 이미 피로로 잔뜩 흐려져 있었다.
“이제는 내 도움이 더 필요하지는 않겠지.”
“……그래.”
이대로 파르만을 죽여 힘을 보충할 수도 있었지만, 에이리스는 금세 포기했다.
지금의 몸 상태로 파르만과 싸웠다가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로드의 힘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네.’
에이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회복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그럼, 이만.”
어깨에 망치를 올린 파르만은 지친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가 몇 걸음도 가지 않고 다시 에이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말이지.”
“…….”
“그 녀석은 왜 죽이지 않는 겐가?”
“알 거 없어.”
“……내 땅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라네.”
파르만의 경고에도 에이리스는 그저 웃어넘겼다.
“누가 드워프 아니랄까 봐.”
“…….”
파르만은 잠시 에이리스를 응시했다가 이내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드디어.’
에이리스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카얀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친 얼굴임에도 환희의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숙원을.”
모든 종족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지배하겠다는 염원, 빌어먹을 로드의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있게 되었다는 바람이…… 드디어 이뤄지려고 하고 있다.
에이리스는 조심스럽게 카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듯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그녀는 곧 심장 쪽으로 손바닥을 옮겼다.
맥동하는 심장과 그 옆의 혈석이 느껴졌다.
다행히도 대악마를 강림시키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
“후후후.”
에이리스는 남아 있는 로드의 힘을 움직여 혈석을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곧 혈석이 카얀이 가지고 있는 혈기와 생명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qkadml rldnsms toqurdp soflsms dltmf ekfqlcdl qlclwl dksgsms tprPdp rkdflagkf eodkrakdu…….”
카테이아 대륙의 언어가 에이리스의 입에서 빠르게 주문의 형태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카얀의 몸에서 빠져나온 혈석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기이한 기색을 뿜어내는 붉은색과 보라색의 피가 혈석의 주위를 고리처럼 맴돌고 있었다.
에이리스의 주문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혈석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서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어두컴컴한 새벽이 더욱 짙은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 유일하게 빛을 내던 달빛도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다.
쩌저적.
이내 금이 생겨난 혈석이 쪼개진 상태로 허공에 머물렀다. 큰 조각에서 작은 조각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루로.
보석처럼 생겼던 혈석은 어느덧 가루가 되어 공기 중에 머물렀다. 곧 서서히 퍼져나간 자줏빛 먼지들이 타원을 그렸다.
마치 포털과 비슷하게 생긴 형태였다.
먼지가 이룬 타원 안은 불길함이 가득한 어둠뿐.
그 안쪽에서부터 낮게 깔린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에이리스인가? ]
굳이 대답을 들으려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소름 끼치는 웃음을 흘리며 포탈 밖으로 한 발 내밀었다.
발, 무릎, 손 그리고 얼굴.
카테이아 대륙을 공포에 떨게 만든 장본인이자 인간의 육체 속에 숨어든 대악마.
서은우가 지구의 땅을 밟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