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248화
에이리스는 앞에 서 있는 드워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파르만’은 카테이아 대륙에 있을 때에도 본 적 있는 드워프들 중 하나였다.
‘다만 그때 쓰던 망치는 없는 듯한데.’
에이리스는 파르만을 유심히 보며 턱을 괴었다.
“그대의 땅이 침범을 당했다?”
“그렇다네.”
파르만은 심기가 몹시 불편한 티를 팍팍 내며 팔짱을 꼈다.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은 퍽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에이리스는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드워프들이 자신의 터전을 끔찍이 아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장장이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그들은 양질의 금속이 나오는 땅에 정착해 살았고, 그렇기에 거의 이동을 하지 않는 종족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가진 힘이었다. 땅을 지킬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 터전의 자유를 부여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파르만의 말과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네 힘으로도 그들을 쫓아 낼 수준은 되지 않나?”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털고 가야 하는 법. 에이리스는 카얀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닌지 보다 확실하게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파르만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내 제자 녀석 때문이지.”
“제자?”
“그래. 인간 제자.”
“……설마 인질로 잡혀 있다던가, 그런 건가?”
인질이라면 더욱 의심스럽다.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카얀의 편에 서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러나 에이리스는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의아하다는 티만 내며 물었다.
“그래서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아닐세.”
하지만 파르만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 녀석은 내가 따로 피신을 시켜 뒀지. 하지만, 내가 혼자서 그들을 상대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아.”
파르만의 말뜻을 이해한 에이리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혼자서는 제자를 지키면서 그들과 싸우는 건 힘든 일이지.”
특히나 드워프라면 더욱.
그들은 변수를 싫어한다. 변화를 싫어하는 고집불통에다 옛것이 늘 옳다고 여기는 고리타분한 종족이므로.
그런 에이리스의 생각을 파악한 듯, 파르만이 끌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성격은 예전에 버렸네. 이제는 혼자 남기도 했고, 지구라는 세계는 우리가 살던 곳과는 많이 다르더군.”
“……그건 그렇지.”
하긴 음유시인 노릇이나 하며 돌아다니던 에르제가 여기서는 그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아이돌이 되어 있지 않던가.
‘그것도 남의 몸을 빌려서.’
에이리스는 조금 구겨졌던 표정을 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왔다?”
“그렇다네. 그렇지 않아도 그 녀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어제 보니 자네들이 그들과 대판 싸우더군.”
파르만은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자네들이 내 땅을 탐내지만 않는다면 이 몸이 좀 의탁을 할까 하네만.”
“흐응.”
에이리스는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우리 종족이 땅에 집착하는 거 봤어?”
“하긴 그것도 그렇군.”
파르만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일족끼리 마을을 이루는 뱀파이어라면 몰라도, 자네들 같은 뱀파리스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 그놈들이 내 땅에 자리를 잡은 것도 은신처로 삼은 탓일 테니까.”
“그대가 돕는다고 하면, 일이 끝난 후에 바로 철수하도록 할게. 우리도 사는 곳은 따로 있거든.”
에이리스가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기며 눈웃음을 지었고, 파르만은 “알겠다.”라고 대답하며 첫 접견을 끝마쳤다.
* * *
그날 밤 자정이 되기 전.
에이리스는 뱀파리스들과 파르만까지 대동해 드디어 선제공격에 나섰다.
파르만 덕분에 그들의 위치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땅의 기운을 읽는 건 참 편해.”
에이리스가 파르만의 능력을 내심 부러워하며 말했다.
“종족적 특성이니 그대는 할 수 없을 것이네.”
“알아, 나도.”
그녀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카얀에게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이동을 계속했다.
사각, 사각.
풀 밟는 소리만 울리는 밤. 이윽고 자정이 넘어가고 달이 떠오르자 에이리스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카얀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은신처가 바로 지척이었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그들은 가만히 몸을 숙이고 에이리스의 손만 바라보았다.
그녀가 쥐고 있는 주먹이 앞으로 쏘아지는 순간, 그들은 그대로 돌진할 것이다.
긴장감에 공기가 파르르 떨었다.
에이리스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파르만을 바라보았다.
‘아칸을 잃은 건 아깝지만, 그 싸움 덕분에 이 드워프가 찾아왔다.’
전력으로 치자면, 몇 배나 더 상승한 수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야기를 나눠 보며 수상한 점을 찾으려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땅을 침범한 불청객에 대한 분노만 가득했을 뿐.
심지어 그는 자신의 기억을 보여 주기까지 했다. 그의 전체 기억을 보게 허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카얀과 관련된 기억에서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충분해.’
카얀이 데리고 있는 뱀파리스들은 고작해야 숫자가 20이 채 되지 않는다. 물론 그만큼 수준이 높지만, 숫자 앞에 장사 없는 법.
그녀 뒤에 도열해 있는 56명의 뱀파리스들이 카얀을 칠 시간을 충분히 벌어 줄 것이다.
생각을 마친 에이리스는 꾹 주고 있던 주먹을 펼치고 앞으로 쏘아 보냈다.
사사사사삭, 더욱 격해진 풀 밟는 소리가 뒤에서부터 앞으로 쏜살같이 들려왔다 사라졌다.
이제는 조용히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파르만이 그녀에게 물었다.
“자네는 안 가나?”
“저 녀석들로 시간을 벌고, 그대와 나는 카얀만 노릴 거야.”
“그렇군.”
파르만이 손에 들고 있던 망치를 말아 쥐는 순간, 에이리스도 좌측으로 우회하기 시작했다. 파르만이 그 뒤를 빠르게 쫓았다.
이윽고 정면에서 뱀파리스들이 맞붙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카얀은 어디에 있지?’
녀석이 전장의 한복판에서 싸우지는 않을 터. 분명 카얀도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우두머리만 죽이면 끝나는 싸움. 2:1 혹은 2:2가 될 구도에서 파르만의 존재는 그만큼 클 터였다.
뛰어가는 동시에 땅의 기운을 읽어 낸 파르만이 앞서가는 에이리스에게 말했다.
“동북, 570m, 가장 강한 기운 3개.”
“3개라…….”
2:3이었나. 여전히 쓸데없이 조심성만 많구나.
에이리스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속도를 더욱 높였다.
이쪽이 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에 카얀에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해야 한다. 녀석에게 대처할 시간을 주는 것은 자신에게는 독이 될 테니까.
“속도를 더 높이지.”
“충분히 가능하네.”
파르만도 동의했고, 에이리스는 로드의 힘을 더욱 발에 실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인지라 힘이 과도하게 소모되었지만, 지금 시간은 그것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다.
자정부터 새벽까지의 시간은 뱀파리스들에게 힘을 증폭시켜 주는 시간이었으니까.
“400, 300, 200. 여기서 10도만큼 우측.”
파르만이 계속해서 그들과의 거리와 방향을 계산해 말해 주었고, 덕분에 에이리스는 보다 빠르게 카얀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
“카얀.”
그는 에이리스가 이곳까지 올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는지, 꽤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여길 알고?”
“그것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드워프 때문이었군.”
카얀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의 시선은 에이리스의 옆에 서서 망치를 들어 올리는 파르만에게 향해 있었다.
‘확실히 카얀의 편이 아니구나.’
그리고 그의 반응에서 에이리스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파르만과 카얀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고작해야 드워프. 대세에 지장은 없다.”
카얀은 짓씹듯이 말하고, 곧바로 혈기를 줄기줄기 뽑아내며 짓쳐들어왔다.
이번에는 도플갱어가 아닌 본체였기에 혈석의 힘을 소모시키는 듯했다.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끝내려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지.
이쪽은 로드급이 두 명이다.
피식 웃은 에이리스의 앞으로 파르만이 뛰쳐나오며 망치를 강하게 휘둘렀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카얀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
그제야 카얀의 표정에서는 파르만이 드워프의 장로임을 깨달았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되니?”
에이리스는 여유로운 말투로 로드의 힘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전위가 든든하니, 전투가 좀 편해지겠는걸.”
“귀찮은 일은 죄다 내 몫이군.”
파르만이 투덜댔으나, 그는 에이리스의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리라고 곧바로 이해했다.
“저 가운데 있는 놈을 우선적으로 맡도록 하지.”
“나머지 둘은 내 쪽으로 넘어와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
에이리스의 대답에 파르만이 발을 더욱 굳건히 땅에 디뎠다. 그가 든 망치가 서슬 퍼런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곧 그의 뒤에서부터 에이리스가 쏘아 낸 혈탄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대충 카얀이 무력화되었다 싶으면 저 드워프까지 함께 처리해야겠군.’
에이리스는 그런 속내를 숨기며, 보란 듯이 카얀을 향해 혈탄을 집중시켰다.
“쯧.”
카얀은 혀를 차며 혈기를 방패처럼 앞에 둘렀다. 대부분의 혈탄은 피의 방패 앞에 막혔으나, 중첩된 곳에 꽂힌 것들은 서서히 안으로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못 지나간다.”
혈탄을 뚫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던 카얀의 앞을 파르만이 막아섰다.
카얀이 이를 깨물며 말했다.
“너도 이용당하고 있는 걸 모르고 있는 건가?”
“글쎄, 누가 누굴 이용하고 있는 건지는 두고 봐야지.”
그의 말에 카얀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말이 많은 녀석이로군.”
파르만은 씨익 웃으며 망치를 휘둘렀다.
“윽……!”
황급히 몸을 숙여 피한 카얀의 앞으로 5발의 혈탄이 쏘아졌다. 두 발이 카얀의 어깨에 박혔다.
“크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카얀이 다시 뒤로 물러섰다.
“후읍!”
파르만은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퍼억, 소리와 함께 카얀이 땅바닥에 그대로 박혀 버렸다.
“죽이면 안 돼.”
에이리스가 경고를 하듯 망치를 들어 올린 파르만에게 말했다.
“힘 조절엔 자신이 있어.”
파르만은 웃으며 망치를 내려치려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 황급히 에이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보게! 뒤!!”
“!!”
그러나 파르만의 말은 그녀에게 조금 늦게 닿았다.
푹, 소리와 함께 에이리스의 복부를 뚫고 나온 손이 보였다.
그것도 그나마 몸을 비틀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심장이 한 번에 꿰뚫릴 뻔했다.
에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공격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들이 싸우고 있었던 것은 카얀이 스스로를 복제한 도플갱어였던 것일까.
어깨 너머로 씩 웃고 있는 카얀이 보였다.
“너무 쉽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쿨럭, 카얀이 손을 뽑아냄과 동시에 에이리스의 입에서 많은 양의 피가 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