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247화
밤하늘을 빠르게 날아온 에르제는 다들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해 다시 인간 형태로 돌아왔다.
대마녀와 그 휘하의 마녀들, 그리고 일족들과 뱀파이어들이 모여 있는 곳은 에이리스와 1장로가 눈치채지 못할 만한 장소였다.
그들로부터 대략 1km 이상 떨어진 장소. 아무도 찾지 않는 폐공장이었다.
전신이 공장이었던 덕분에 수십의 인원이 다 모일 정도로 넓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기다리다 지친 얼굴로 대마녀가 도착한 에르제에게 투덜댔다.
에르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대상을 수상했잖아요. 멤버들과 술 한잔한다고.”
“허어, 우리를 이렇게 음침한 곳에 박아 두고 혼자 술을 먹고 있었어?”
대마녀가 허리춤에 손까지 올리며 눈에 쌍심지를 켜자, 라하임이 빠르게 수습했다.
“로드께서는 아이돌 활동도 겸하고 있습니다. 과한 언행을 삼가 주시지요.”
수습을…… 하려 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충직한 부하 둬서 좋겠다, 야.”
대마녀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그냥 트집을 잡고 싶었던 건지 사실 그렇게 불만스러운 얼굴도 아니었다.
에르제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으니, 곧 그에게로 한 뱀파이어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로드, 디지털 음원 본상 및 대상을 수상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세리나.”
에르제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반가움을 표하며, 그녀의 손을 꾹 잡았다.
“오늘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예, 알겠습니다.”
세리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다시금 푹 숙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세리나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있는 만큼 마녀들도, 뱀파이어들도 모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늦게 왔다고 뭐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나.’
에르제는 픽 웃으며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일어날 전투의 원인은 자신이었고, 이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니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할 몫이었다.
후우우웅―.
강하게 발현된 로드의 힘이 곧 그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불안감을 해소하던 그들의 시선이 중앙에 위치한 에르제에게로 모여들었다.
모두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음을 확인한 에르제는 증폭시킨 목소리를 내뱉었다.
“모두들, 이 자리에 와 줘서 고맙습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오늘 그동안 길고 길었던 분쟁을 끝내려 합니다. 카테이아 대륙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에이리스와의 악연을 끊어 낼 겁니다.”
“…….”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동안.”
에르제의 시선이 천천히 그들에게 하나씩 머물렀다.
“지키지 못했던 것들을 위해서.”
꾸욱, 주먹을 말아 쥐는 이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더 이상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끊어 내려고 합니다. 대악마도, 뱀파리스도…… 이 땅에 설 자리가 없도록.”
에르제의 주변을 맴돌던 로드의 힘이 조금씩 강해졌다. 어느새 그의 옷이 파동에 의해 팔락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최전선에 설 겁니다.”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른 고양감이 그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주먹을 쥔 손을 가슴에 부딪쳤다.
쿵.
뱀파이어에게 가장 중요한 피를 공급하는 심장을 손으로 치는 행동은 자신의 목숨도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쿵.
에르제도 오른손 주먹으로 심장 부근을 때렸다.
쿵, 쿵, 쿵.
그리고 그 행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 *
축 처져 있던 분위기를 단숨에 끌어올린 에르제는 대마녀, 라하임과 함께 공장 2층에 있는 한 방으로 들어왔다.
대마녀의 발명품 중 하나인 ‘무드 등’이 은은하게 방 안을 밝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벌써 1장로랑 에이리스가 한판 붙었는데.”
“예상했던 일 아닌가요.”
에르제는 먼지가 가득한 테이블을 보며 몸을 뒤로 빼 등받이에 기대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치고받을 줄은 몰랐지.”
“에이리스가 1장로의 위치를 파악했듯이, 1장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각자의 수하를 숨겨 두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대마녀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그래서, 바로 혈석 터뜨릴 거야?”
“아뇨.”
에르제는 고개를 저으며, 최후의 계획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
“목적은 물론 독이 든 혈석을 터뜨려 1장로와 서은우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거지만, 그러려면 필수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아.”
에르제의 말을 알아들은 라하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리스가 1장로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게 아니면 단순히 1장로의 목숨을 취하는 결과밖에 안 되니까.”
“……그럼, 에이리스를 도와주자는 뜻이야?”
“아뇨.”
에르제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고는 예전에 지서후가 파르만을 데려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날, 파르만은 자신의 대장간 주변을 이상한 놈들이 점거했으니 치워 달라고 부탁하러 왔었고, 에르제는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동시에 좋은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다.
에이리스는 자신이 파르만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 테니, 파르만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파르만에게 터전을 지키고 싶으면 도우라고 이야기했고, 한참 고민하던 파르만은 결국 에르제의 제안을 수락했다.
“드워프 하나가 에이리스를 도울 겁니다.”
“……드워프가?”
대마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고작 드워프 하나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고작이 아니니까요. 파르만은 드워프 중에서도 장로입니다.”
그러나 대마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카테이아 대륙 출신이 아니니 드워프 장로가 가진 힘에 대해서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드워프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장로들입니다. 물론 그들도 미친 황제에 의해 멸망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로드의 말씀대로입니다.”
라하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르제의 말을 받았다.
“드워프 장로의 힘은 에르제 님과 붙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물론, 결국엔 로드께서 승리하시겠지만 그만큼 경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라고……?”
에르제는 대마녀의 얼떨떨한 반응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하임의 말대로, 파르만은 자신과 비견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러려면 특수한 망치가 필요했으니 지구에서는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러나 그것 없이도 플랑을 손쉽게 이긴 사실만 보아도, 그가 여전히 건재함을 알 수 있었다.
“플랑, 기억하시죠?”
에르제는 피식 웃으며 대마녀에게 말했다.
“녀석이 손 한 번 못 써 보고 당했습니다.”
“……그러면, 확실히 에이리스에게 힘이 되어 주겠네.”
“예. 그렇게 되면, 에이리스도 더 이상 소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제대로 둘의 싸움에 불을 붙이는 꼴이죠.”
대마녀는 흠,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그럼 에이리스가 1장로에게 승리해서 그를 제물로 바치는 순간, 혈석을 터뜨리는 거지?”
“예.”
에르제는 그렇게 대답하며 조건을 하나 덧붙였다.
“대악마의 강림은 혈석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1장로의 신체로 강림하는 것은 아닙니다. 혈석 그 자체에 강림을 하게 되는 거죠.”
“혈석이 실체화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군.”
“맞습니다. 그러니 그때, 혈석을 터뜨려야 합니다.”
“그럼 1장로는? 독에 당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렇죠. 하지만, 몸 안에 있던 혈석을 빼앗기면서 강림이 이루어지는 만큼, 1장로도 굉장한 타격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럼 빈사 상태에 빠진 1장로는 내가 처리하면 되는…….”
“그건.”
에르제는 대마녀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적임자가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뭐.”
누가 누굴 죽이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었으므로 대마녀는 순순히 물러났다.
에르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제가 여기 온 것과 동시에 파르만에게도 움직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에이리스와 만나고 있겠네요.”
“……오늘 에이리스가 바로 전쟁을 시작하겠군.”
“예. 파르만도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겁니다. 하루 빨리 터전을 되찾고 싶으니, 어서 빨리 1장로를 잡으러 가자고 말이죠.”
대마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오케이. 그럼 우리는 근처까지 이동해서 대기하면 되는 거지?”
“예. 슬슬 이동하시죠.”
마지막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두 뱀파이어와 대마녀는 방을 나와서 각자의 세력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곧 그들 앞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이들이 모였다. 그러나 긴장 속에서도 에르제의 연설로 인한 고양감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갑시다.”
에르제의 말과 동시에 수십의 그림자가 에이리스와 1장로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 *
에이리스와 1장로가 자리 잡고 있는 곳과 가까운 인근 산에서 일행은 자리를 잡고 야영을 준비했다.
인간 능력을 한참 벗어난 그들이기에 그 정도 거리는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빠르면 오늘 새벽, 늦으면 아침 즈음 본격적으로 두 세력이 맞붙을 겁니다. 우리는 에이리스가 완전히 승리를 거두는 때에 대악마의 강림을 저지할 겁니다.”
에르제는 작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계획의 일부를 전달한 뒤, 그와 라하임이 쓸 텐트로 돌아와 앉았다.
지금부터는 인내와의 싸움이다.
그 과정에서 죽는 뱀파리스들은 자신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그들 모두를 어떻게든 뱀파이어로 만들고 교화시키려 했다면, 이제는 에르제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조금 전에 했던 연설처럼, 이제는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야만 했으니까.
같은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긴장되십니까?”
“아니. 그냥, 입맛이 쓰네.”
라하임의 질문에 대답한 에르제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여동생이자 애증의 관계였던 에이리스를……. 그리고 이 몸의 주인인 서은우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건 뭐라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일족만큼이나 중요한 존재들이 생겼고, 앞으로 만들어 갈 시간 또한 그에게는 아주 소중했다.
“괜찮아. 마음 약해지는 일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라하임은 하하,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저도 계속 로드 곁에서 매니저를 하고 싶으니까요.”
“…….”
그를 바라보는 에르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잠깐의 평화로움도 잠시.
[ 파르만과 에이리스가 1장로의 진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에르제는 지서후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빨라도 오늘 새벽쯤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직 자정을 넘어가기도 전이었으니까.
‘어지간히도 급했구나.’
에르제는 스마트폰을 집어넣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에필로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