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화
246화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에이리스였다. 그녀는 휠체어에서 일어나자마자, 온몸에 로드의 힘을 두르고 카얀에게 달려들었다.
줄기줄기 뻗어 나간 혈기가 순식간에 쇠사슬처럼 카얀의 사방을 옭아맸다.
“!!”
처음부터 이렇게 본격적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카얀은 혈기를 다리에 집중시켜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카가가각―!
바닥을 긁고 지나간 로드의 힘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다시 카얀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읏!”
황급히 고개를 숙인 카얀은 그대로 몸을 오른쪽으로 굴려 공격 범위 바깥으로 완전히 벗어났다.
“후우.”
카얀은 차오른 숨을 뱉어 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소꿉친구인데, 로드의 힘을 이렇게 남발하는 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배신자는 응당 벌을 받아야지?”
“배신은 네가 먼저 한 거……!!”
콰아앙!!
더 이상 카얀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에이리스는 곧바로 달려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좁혀진 두 사람 사이로 혈기와 로드의 힘이 엉겨 붙었다.
그녀의 주먹이 카얀의 주변을 스칠 때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핏, 처음으로 카얀의 볼에 상처가 나고 피가 튀었다.
“쯧, 이 몸으로는 무리인가.”
잠깐을 틈타 중얼거린 카얀은 혈기를 몸 위에 3겹 둘렀다. 아직까지 혈석의 힘을 쓸 수 없었다.
도플갱어는 그가 가진 힘의 70%밖에 사용하지 못할뿐더러, 소모된 혈석의 혈기는 복구되지 않으니까.
먹이로 쓸 녀석들도 없다고 판단한 카얀은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도망칠 자리를 찾고 있니?”
그러나 그 시도는 에이리스에게 곧바로 막혔다.
표정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에이리스는 입꼬리를 올리며 손가락을 앞으로 향했다.
에이리스만이 가지고 있는 술법 중 하나인 혈탄이 손가락 끝에서 쏘아지기 시작했다.
“X발.”
기본적으로 근접 전투를 좋아하는 뱀파이어 종족은 원거리 공격을 등한시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인식을 뒤바꾼 것이 현재 카얀에게 쏟아지는 혈탄이었다. 한 발, 한 발이 막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카얀에게 날아든다.
그는 여태까지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못 해 보고, 다시 혈탄을 피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별장 주인이 가져다 놓은 듯한 고급스런 장식품들과 나무 기둥이 무력하게 부서져 나갔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하려고?”
반면에 에이리스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하다. 카얀이 알고 있기로, 그녀가 휠체어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힘이 소모된다고 들었는데…….
‘그걸 오늘을 위해서 속이고 있었던 건 아닐 거 아니야!’
카얀은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혈탄을 피했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에이리스의 힘이 다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네 꿍꿍이를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에이리스는 피식 웃으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여전히 그녀의 손에서는 쉬지 않고 혈탄이 쏘아지고 있었다.
“내가 왜 이 상황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
카얀은 그제야 에이리스의 꿍꿍이를 눈치챘다.
그녀는 처음부터 강력하게 몰아붙여 자신을 방 뒤쪽으로 밀어 넣었고, 그 순간 거리를 벌려서 혈탄을 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더 이상 서 있을 필요가 없도록 말이다.
카얀의 예상대로 에이리스는 휠체어까지 걸어가 느긋하게 다시 그 위에 앉았다.
더 이상 다리를 움직이는 데에 힘을 쓸 필요가 없었기에 혈탄의 파괴력은 최소 1.5배는 더 강해졌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미 방의 끝과 끝, 비처럼 쏟아지는 혈탄을 뚫고 에이리스에게 접근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카얀 자신의 본체였다면 모를까, 어쭙잖은 이런 집사장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계산 착오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실패를 예감했다.
에이리스가 고작 도플갱어에게 이 정도로 힘을 쏟아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쯧.”
계속 발을 움직여 공격을 피하던 카얀은 고개를 저으며 이내 제자리에 서 버렸다.
그래도 어느 정도 에이리스가 힘을 소모하도록 만들었다.
계획은 실패했지만, 최소한의 성과는 얻었음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푹, 단단한 뱀파이어의 신체를 손쉽게 뚫어 내는 혈탄이 순식간에 카얀의 몸을 꿰뚫었다.
“또 보자.”
신체의 모든 기능이 끊어지며 암전되는 시야 속에서 에이리스의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들렸다.
* * *
골든테이프의 2일 차 시상식 무대까지 끝나고 난 뒤 토트윈과 모카 엔터테인먼트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1일 차에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던 디지털 음원 대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토트윈과 D.D.를 제외한 남자 아이돌 그룹의 활동이 별로 없었고, 때문에 솔로 가수나 여자 아이돌 그룹에 밀린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부적인 판단이었을 뿐 결과는 달랐다.
그리고 어쩌면 토트윈 멤버들에게는 그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을 받아 얼떨떨한 상태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다 보니, 처음으로 아무도 울지 않았던 것이다.
‘Prologue’, ‘Parados’ 그리고 마지막 ‘Epilogue’까지 이어지는 이번 프로젝트는 그렇게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장 대표와 이윤까지 함께한 간단한 회식이 끝나고, 2일 차 시상식 다음 날 밤.
토트윈은 멤버들끼리만 모여서 오랜만에 단출한 술자리를 가졌다.
탁! 치이익-.
캔 맥주를 따는 소리가 숙소 안에 하나둘씩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멤버들의 주량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소주 없이 맥주만으로 채워진 술자리였다.
“건배!!”
“대상 축하합니다~!!”
골든테이프에서 받아 온 트로피를 테이블 한가운데 둔 채 멤버들끼리 맥주 캔을 부딪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만큼은 에르제도 가벼운 마음으로 맥주를 목구멍 너머로 쭉 들이켰다.
‘기분 좋네.’
에르제는 피식 웃으며, 수상을 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받은 대상. 그 결과가 주는 짜릿한 감정은 그로서도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음유시인으로 활동했을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그야말로 몇십, 몇백 배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은 듯한 느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이 술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멤버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룰 수 없었던 일이다.
에르제는 입안에 감도는 쓴맛을 느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만약 자신이 잘못되어서 서은우가 이 몸에 들어오게 된다면 과연 토트윈은 예전과 같을까, 아니면 달라질까.
달라진다면 전보다 좋아질까, 나빠질까.
문득 궁금증이 들었지만, 에르제는……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랐다.
왁자지껄 떠들며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고 농담을 주고받는 그들이, 연습할 때와 무대에 오를 때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그들이 언제까지고 자신의 옆에 남아 있기를.
그리고 자신 또한 그들의 옆에 계속 있을 수 있기를.
어느새 일족들만큼이나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린 토트윈을 에르제는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이 세상 따위는 어떻게 돼도 관심 없는 뱀파리스와 서은우에게서.
살짝 붉게 변해 있던 에르제의 눈동자가 다시 들이켠 맥주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흑색 머리가 찰랑이며 눈썹 위를 덮었다.
“은우도 여기로 와!”
그가 홀짝거리며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태현우가 그를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잡아끌었다.
“오늘 같은 날 사진을 남겨야지. 언제 하겠어, 그렇지?”
태현우가 낄낄 웃으며 트로피를 그들의 한가운데에 가져다 놓고, 손을 쭉 뻗어 스마트폰으로 카메라 각도를 만들었다.
“하나, 둘, 셋! 하면 찍을게!”
“아!”
“놀랐잖아여!”
태현우의 속임수에 속은 멤버들이 장난 섞인 짜증을 내는 순간, 태현우의 엄지손가락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찰칵!
스마트폰의 카메라가 그 순간을 멈춘 시간으로 남겼다.
그 순간 반응한 것은 에르제뿐인지라 민주혁, 안단테, 윤치우의 표정은 꽤나 볼만하게 나왔다.
“아!! 진짜!!”
“현우야, 오랜만에 형이랑 방에 가서 조용히 이야기 좀 할까?”
“…….”
사진에 망가지게 찍힌 멤버들이 태현우에게 분노를 쏟아 냈다.
“아하하핰!! 이건 내가 따로 개인 소장할게! 알았어! 다시 찍자아아악!!”
세 명의 인간들에게 깔려 햄버거 빵이 된 태현우가 바닥에 찌그러지며 연신 비명을 질러 댔다.
얼큰하게 취한 넷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그런가…….
‘유황불고기버거 먹고 싶네.’
에르제는 그들과 닮은 햄버거의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훌쩍 뛰어올라 가장 위에 있던 민주혁의 등으로 몸을 날렸다.
“야!! 서은우!! 이……!!”
바닥에 엎어져 에르제의 발밖에 보지 못했던 태현우가 에르제가 점프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으억!!”
물론 이어진 것은 더 무거워진 중력에 의해 내질러진 비명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가진 술자리는 한바탕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는 태현우와 도망가는 네 멤버들이 떠드는 소리가 숙소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일고, 멤버들끼리 술자리를 가진 지 2시간이 되어 갈 때쯤.
이미 저녁 11시가 지났음을 확인한 윤치우가 짝짝, 박수를 치며 술에 취해 해롱해롱하는 멤버들을 깨웠다.
술기운도 있었지만, 그동안의 긴장과 피로가 풀린 탓이 더 커 보였다.
“정리하고 들어가자, 이제.”
“으웅……. 네에.”
안단테가 눈을 비비며 태현우의 어깨를 짚고 일어났고, 나머지 멤버들도 비몽사몽 상태로 뒷정리를 시작했다.
“…….”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삼키던 에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워낙 난장을 벌이며 마셔서 그런지 정리하는 데만 20분이 넘게 걸렸다.
분리수거를 할 것들을 따로 모아 두는 것까지 마친 뒤, 멤버들은 윤치우의 주도 아래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곯아떨어질 것이다.
“잘 자.”
에르제는 윤치우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향했다.
“은우야.”
윤치우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소매를 붙잡았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에르제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 낸 건지 아니면 그저 리더의 감인 건지 윤치우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어왔지만, 에르제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아니야. 그냥.”
윤치우는 말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편하게 얘기해. 나는…… 그래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
에르제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일 없어.”
“그래…….”
에르제는 윤치우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태현우는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상태.
에르제가 가만히 서 있으니, 다른 방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그의 예민한 청력에 들려왔다.
윤치우도 이제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후우.”
에르제는 한숨을 뱉어 내며 잠든 태현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오늘이 멤버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오늘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이들을 잠시 떠나야 했다.
부디 ‘Epilogue’가 무사히 완결되기를.
붉게 변한 에르제의 눈동자가 창가에 비쳤다.
곧 그의 몸이 창문 밖으로 높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