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245화
에이리스의 명을 받든 아칸은 계획을 실행할 뱀파리스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곧 그의 앞에 다섯의 뱀파리스가 모였다. 하나같이 기세가 흉흉한 그들은 그만큼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한 이들이었다.
‘버리기 아까운 패이지만.’
그래도 1장로 카얀을 끌어낼 미끼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아칸은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그들에게 물었다.
“정찰 결과는?”
“1장로는 오두막집 안에 있는 듯하고, 일행 중 둘은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음.”
아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럼, 서은우 님의 부모는 안에 같이 계신가?”
“그것까지는…….”
그들 중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조금 전 내뿜던 흉흉한 기세가 확 가라앉았다.
“확인하지 못했다?”
“예. 아무래도 1장로가 오두막집 주변에 술법을 쳐 둔 듯한데, 거리가 멀어 그것을 뚫고 기감을 읽어 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
아칸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건 이 뱀파리스를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 또한 그 술법을 뚫어내지는 못했을 테니까.
‘아마 로드께서 직접 보시지 않는 이상 모르겠지.’
그러나 에이리스는 그것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말했었다.
확인을 할 수 있으면 하고, 불가능하다면 그냥 포기하라고.
그렇다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아칸은 혹 자신이 에이리스의 뜻을 곡해한 건 아닌지 다시 머릿속으로 따져 보고는, 이내 괜찮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오늘은 1장로를 곧바로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럼,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묻는 목소리가 긴장으로 가득했다.
“우리의 목적은 오로지 1장로를 무사히 제물로 바치는 것. 그러려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압할 필요가 있다.”
아칸은 다섯의 뱀파리스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므로 오두막집 안에 1장로 혼자 남겨 놓는 것이 필요하지. 1장로를 제압하는 건 이틀 뒤에 개시할 예정이니까 우리는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래. 일단은 숲속으로 따로 빠져나왔다는 녀석들에게 우혈충을 심어서 그들의 경계 로테이션이나 움직이는 행동반경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혈충을 심으려면 접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칸은 씩 웃으며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에이리스 님이 내려 주신 우혈충이 있으니까.”
얼핏 보면 적색의 두꺼운 실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숙주를 찾아 희미하게 움직임을 거듭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 필요도 없이 그들 쪽에 이것을 풀어놓으면 된다. 그럼 알아서 숙주를 찾아 들어갈 거야.”
“알겠습니다.”
다섯의 뱀파리스들 중에서 아까부터 대답하고 있는 뱀파리스는 하나뿐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가 대답한 후 아칸에게서 유리병을 고이 받아 품에 넣었다.
“역시 에이리스 님은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생명력을 가진 우혈충을…….”
“그러니까 우리가 에이리스 님을 따르는 것 아니겠나. 1장로는 사실상 두문불출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번에 대놓고 에이리스 님을 적대했으니…… 아마도 끔찍한 말로를 당하겠지. 로드께서는 용서가 없으시니까.”
“…….”
아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엎어져 있는 네 명의 뱀파리스들뿐.
조금 전 그에게서 우혈충을 받아 간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아칸이 기겁하며 쓰러져 있는 뱀파리스들을 확인하려는 순간, 그의 목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닿았다.
“!!”
그리고 곧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살갗이 그대로 파헤쳐졌다.
* * *
“허억, 허억.”
아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무에 손을 얹었다.
조금 전 그것은 도대체 뭐였지?
겨우 도망쳤…….
“도망쳤다고?”
아칸은 허리를 펴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자신을 쫓아오는 기척은 아무 데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자신은 도망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니, 도망치고 있었다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건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직전의 상황이 기억나질 않았다.
“모르겠군.”
아칸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품을 뒤져 유리병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 이건 기억이 나는군.’
자신은 불러 모은 다섯 뱀파리스들 중 하나에게 이 유리병을 주고 에이리스의 명령을 전달했다.
다행히 중요한 일은 잘 끝낸 모양이다.
나머지는 그 녀석들이 미끼의 역할을 잘해 주면 될 뿐.
아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야.”
내디디는 발걸음마다 조금 전의 이상했던 상황을 납득할 만한 이유들을 주워 삼키던 그는 곧 에이리스의 거처 앞에 멈춰 섰다.
현재 그들이 1장로의 눈을 피해 숨어 있는 곳은 근처의 한 별장이었는데, 별장 주인은 가끔씩만 이곳을 찾는 모양인지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놀러 왔다면 필시 에이리스의 손에 죽었겠지만 말이다.
아칸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고는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10명이 넘는 뱀파리스들이 모여서 쳐 둔 결계는 같은 편인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지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결계 너머로 들어가자 별장의 2층 창가 너머로 에이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 계셨군.”
아칸은 에이리스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거의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간 뒤 에이리스가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에이리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그를 맞이했다.
“일은 잘 처리했니?”
“예, 로드.”
아칸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차질 없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흐응.”
에이리스는 콧소리를 내며 쿡쿡 웃었다.
“재미있구나.”
“……?”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아칸의 등줄기를 따라 섬뜩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새 에이리스가 보랏빛으로 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 로드?”
“로드는 무슨?”
에이리스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 그렇게 부를 마음도 없지 않니, 카얀?”
에이리스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녀의 손에 응축되어 있던 로드의 힘이 순식간에 아칸을 덮쳤다.
“허억.”
거대한 공기의 파동을 맞은 듯 아칸의 몸이 뒤로 휘청거렸다.
“로드!! 어째서 이러시는 건지 말씀해 주시면……!!”
“뻔뻔하구나. 내가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텐데?”
“그게 도대체 무슨……!!”
“아칸의 의식을 남겨 놓은 것은 무슨 악취미인지 모르겠네.”
에이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플갱어로 장난질 그만하고, 이제 슬슬 나오지?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찾아온 거 아닌가?”
“…….”
아칸은 입을 꾹 다문 채 에이리스를 바라보았다.
로드가 하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아칸이고, 뱀파리스들을 총괄하는 집사장이었으며, 그 누구보다 강한…….
어?
아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다.
하나씩,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조각이 나고 파편이 되어 이윽고 먼지처럼 사라진다.
처음 뱀파리스가 되었던 순간을 잊었고, 주변 지인들을 잊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름마저 잊었다.
아칸의 눈이 회백색으로 변했다.
“불쌍한 녀석.”
에이리스는 쯔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아까운 집사장을 잃었구나.”
“……아끼던 녀석이었나?”
그리고 이에 대답한 것은 자신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은 아칸이었다.
이제 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에이리스가 예측한 대로 ‘카얀’이었다.
“아카얀이라고 불러 줄까?”
에이리스의 되지도 않는 농담에 카얀이 실소를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에이리스가 표정을 바꾸었다. 비릿한 미소가 있던 곳에 이제는 분노가 자리했다.
“그래서 내 휠체어를 밀어줄 충직한 부하를 죽이면서까지 내게 할 말이 뭐지? 아니, 그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그 정도도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조금 실망인데.”
카얀의 대답에 에이리스가 미간을 좁혔다.
“역시 그 마녀들의 짓이군.”
카얀은 어깨를 으쓱 올리고는 손에 혈기를 피워 올렸다.
“네가 세운 알량한 계획은 이미 무용지물이 됐고, 네가 나를 제물로 바치는 일도 쉽지는 않을 거야. 이 녀석의 기억을 들여다보니…… 할 만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내가 나선다면, 네 세력 따위는.”
“잊었어?”
카얀이 에이리스의 말을 끊었다.
“나한테는 이제 혈석이 있다는 거.”
“……통제하기 힘든 힘이거늘, 무엇이 너를 그리 자만하게 만들었을까?”
에이리스는 혀를 차며 카얀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칸의 얼굴 속에 숨겨진, 카얀의 도플갱어를.
“여전하구나, 너는.”
카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조만간, 전장에서 보자.”
“……고작 그 얘기나 하려고 이랬니?”
“너와 이 거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없을 테니까.”
“소꿉친구에 대한 예의라면 집어치우는 편이 좋아.”
“그럼 그럴까?”
카얀은 마치 에이리스의 대답을 예측이라도 한 듯, 빠르게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카얀의 손에서 붉은색의 혈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너는 뱀파리스가 되기를 늘 거부했었지.”
에이리스의 눈이 보라색으로 타올랐다. 그녀의 주변을 휘감고 있던 로드의 힘이 카얀의 공격을 막아 냈다.
쿠웅―.
두 힘이 충돌한 충격으로 인해 별장 전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너도 에르제와 다를 바 없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뱀파이어들.”
“아니, 나는 다르지.”
카얀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의 눈은 광기로 가득했다.
“에르제처럼 평화주의자는 아니니까. 나는, 뱀파리스가 아닌 뱀파이어의 세상을 만들 거다. 물론, 나를 먼저 배신한 너와 힘을 합칠 생각은 없어.”
훌쩍, 뒤로 걸음을 물린 카얀이 뒷짐을 지고 섰다.
별장이 크게 흔들렸음에도, 에이리스를 지키기 위해 달려오는 뱀파리스들이 하나도 없었다.
꿈틀, 에이리스의 눈매가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선수를 빼앗겼구나.”
“너는 늘 그랬지.”
“몇백 년 전의 일을 아직까지.”
에이리스는 짓씹듯이 말을 뱉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를 기울이니, 이미 밑에서는 싸움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카얀이 쿡쿡 웃으며 다시금 혈기를 끌어올렸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될 거다. 에이리스.”
“하여간, 마녀들이 끼어들어서 제대로 된 적이 없지.”
한숨을 푹 내쉰 에이리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어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에이리스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두 발로 땅을 짚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