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244화
제이의 기억을 다시 되살려 준 뒤, 에르제는 제이보다 먼저 시상식에 참석했다.
봉인해 둔 기억을 되살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제이가 기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기 때문이다.
술법은 유지한 채 왔으니, 대기실에서 좀 누워 있다가 나와도 상관은 없을 터였다.
에르제는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이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그의 본심을 들었고 계획에 지장이 없을 것이기에 기억을 돌려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제이의 목적은 그를 뱀파리스로 만든 1장로를 그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것.
1장로를 직접 죽인다면, 제이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게 된다.
1장로의 힘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1장로가 만든 뱀파리스들의 새로운 주인이 되든가, 아니면 그 모든 힘을 버리든가.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했으니…….’
아마도 인간이 되는 것을 선택하겠지만, 지구식 표현으로 뱀파리스들은 ‘박쥐’ 같았다. 아마 이곳에서 그런 표현이 생긴 것도 뱀파리스들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마음을 바꿔 1장로의 힘을 계승하려고 할 수도 있겠지.’
에르제는 의자에 앉은 채 턱을 치켜들었다.
만약 제이가 그렇게 한다면.
꾸욱, 에르제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손으로 제이를 죽이는 수밖에.
LAK가 그대로 존속하고 제이도 죽지 않았으면 하지만,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을 남기는 것은 제일 멍청한 짓이다.
에이리스가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던가.
그녀가 어렸을 때, 자신이 망설이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부터 모든 일들은 연쇄적으로 이어졌고, 뒤바뀐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에 도달해 있는 거겠지.
결국 모든 일의 원인은 나다.
에르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또 후회를 해야 하는구나.’
제이를 죽이게 된다면 분명 그렇게 될 거다. 후회를 위한 후회라…….
그래도 선택만큼은 제이의 몫이다. 자신은 그것을 지켜볼 뿐이다.
그가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구름에 가려 별들이 보이지 않았다.
* * *
시상식은 제이까지 돌아오고 난 이후 차례차례 진행되었다.
오늘 토트윈은 1일 차부터 참석한 상태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디지털 음원 부문 수상이 1일 차에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음반 비중보다 디지털 음원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토트윈이었기에 내일 있을 시상식보다는 오늘이 더 중요했다.
아마 골든테이프 측에서도 팬들 투표로 진행되는 것을 제외하면…… 한 그룹에 모든 상을 몰아주지는 않겠지.
에르제는 백스테이지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가수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현재 토트윈은 수상을 위해 백스테이지에 대기하고 있는 상태.
그리고 이건 이미 받을 줄 알고 있었던 상이다.
바로 디지털 음원 부문 본상. 오늘은 총 10팀이 받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시상식에 참석해 자신의 수상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끝나고, 우리 ‘Epilogue’ 짧게 보여 주는 무대가 있으니까 긴장 풀지 마.”
윤치우는 헤실헤실 웃고 있는 멤버들을 다잡으며 똑바로 서 있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저번에 안단테가 쓰러진 이후로 잔소리가 좀 줄었는데, 오늘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윤 2세 모드로 변신해 있었다.
“은우야!”
“아, 응.”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잠시 대열에서 이탈해 있던 에르제에게 윤치우의 잔소리가 꽂혔다. 에르제는 재빠르게 태현우의 뒤에 가서 섰다.
“치우 형, 점점 무서워지는 거 같아.”
“네가 제일 잔소리 많이 듣잖아.”
태현우가 뒤를 보며 속삭였고, 에르제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한결같아서 좋다.”
에르제의 말에 태현우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뿌듯해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루비다이아는 음반 쪽이던가?”
“그렇지. 올해 정규 하나 냈으니까.”
멤버들의 담소를 잠시 듣고 있다가 이내 오케스트라 소리가 무대 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상식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
백스테이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스태프들이 알려 준 대로 좌우로 갈라섰다.
오른쪽으로 5팀, 왼쪽으로 5팀. 순서는 좌우로 한 팀씩 나간다고 한다.
“오, 떨려.”
태현우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자신의 손을 꾹꾹 주물렀다.
“작년에도 한 건데 뭘.”
“상 받을 때는 원래 떨리는 법이야.”
“그런가.”
에르제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 또한 토트윈의 일원으로서 수상은 기뻤다. 다만 기쁜 것과 익숙한 것은 다른 문제였다.
에르제는 이미 카테이아 대륙에 있을 때에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으니까.
인간 왕들에게 초대를 받아서 연회에 참석했을 때에는 이보다 압박감이 더 심했다. 그곳은 정치적으로 워낙 치열한 자리였으니 말이다.
옛 생각이 나서 피식 웃고 있으니, 곧 앞의 그룹이 무대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때 적이었던 ‘D.D.’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 참이었는데, 그들이 참가했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문제였지 D.D.가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만나기 전에는 적대감이 강했는데, 막상 만나고 난 뒤에는 서로 호감도가 높아진 상태. 특히 작년에 같이 무대를 준비하면서 꽤 많이 친해졌다.
참고로 올해 D.D.의 작업물만 보면 토트윈이 데뷔했을 시기와 맞먹을 수준이라 그들은 오늘과 내일 모두 수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들었다.
“저희 먼저 가요~!”
D.D.의 리더가 뒤를 돌아보며 토트윈에게 손을 흔들고는 무대 위로 나갔다.
다음은 반대편에 있던 인디 밴드 그룹이 나갈 차례.
“다음 토트윈 입장하겠습니다.”
토트윈 멤버들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무대로 향했다. 춤과 노래를 하기 위해 무대로 나갈 때와는 또 다른 감상이 밀려왔다.
무대 뒤편에 위치한 곳에서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은 디지털 음원 본상.’
에르제는 무대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본상을 수상하는 10팀이 일렬로 쭉 같은 방향을 보고 섰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대상 하나.’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에르제는 본상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Prologue’부터 ‘Parados’ 그리고 ‘Epilogue’까지.
그들이 3개의 곡으로 그려 온 서사는 대상을 염두에 두어도 될 정도였으니까.
* * *
“로드, 무엇을 보고 계시는 겁니까?”
에이리스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오라버니가 즐기고 있는 유희를 지켜보는 유희를 하는 거란다.”
“……그렇습니까.”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것은 접견실 문을 지키는 뱀파리스 본부의 집사장이었다.
그 또한 장로들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뱀파리스로, 에이리스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이가 사라져 버린 지금 그녀의 휠체어를 담당하는 중이었다.
집사장 ‘아칸’은 휠체어 뒤편에서 그녀가 보고 있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상식…… 입니까?”
“그래.”
에이리스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에르제가 나오는 화면을 가리켰다.
“보이니? 디지털 음원 대상 발표란다.”
“대상이면 제일 좋은 상 아닙니까?”
“그래. 토트윈이라는 그룹이 지금 그걸 수상했다고 하네.”
그녀의 말마따나 토트윈이 디지털 음원 대상을 수상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무대 뒤편을 차지하고 있는 스크린에는 황금색 물결과 함께 ‘디지털 음원 대상’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고, 그 앞에 위치한 마이크 앞에서 토트윈이 일렬로 서 있었다.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아칸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서 있으면 맨 앞에 있는 사람밖에 안 보이지 않는…….”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맨 앞에 서 있던 윤치우의 얼굴 뒤로…… 다른 멤버들의 얼굴이 쏙쏙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게 아니고 잘 보이는군요.”
재빠르게 말을 바꾼 아칸의 모습에 에이리스가 쿡쿡 웃었다.
“가끔씩 우리 오라버니가 뭐 하고 사나~ 궁금할 때는 얘들 보면 되더라고. 나름 괜찮아. 보는 재미도 있고, 얘들 실력도 좋고.”
에이리스는 입꼬리를 올린 채 수상 소감을 말하는 토트윈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마이크에 입을 댄 것은 리더인 윤치우였다.
[ 우선…… 네. 많이 부족한 저희들에게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물심양면 도와주시는 장태수 대표님, 윤이 형, 라하임 매니저님, 그리고……. ]
그 뒤로 이어지는 이름의 나열.
지루해지기 직전에 태현우가 윤치우를 슬쩍 옆으로 밀어냈다.
[ 앞에서 제가 할 멘트를 다 쳐 버렸어요. ]
울상을 짓는 태현우를 보자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토트윈이 되겠습니다!! ]
태현우가 짧게 소감을 말하고 끝내자, 뒤에 있던 멤버들도 간단히 소감을 말했다. 그의 말대로, 감사해야 할 사람은 윤치우가 이미 다 해 버렸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민망해하는 윤치우를 잡았다가 다시 마이크 앞으로 돌아왔다.
[ 정말 감사합니다. ]
가장 마지막으로 소감을 말하게 된 에르제가 그 앞에 서 있었다.
[ 저도 짧게 끝내겠습니다. ]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에르제의 주변으로 혈기가 약하게 피어올랐다.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에이리스의 눈에는 에르제의 의도가 보였다.
아주 옅게 희석시킨 매혹의 힘이 슬그머니 에르제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정도로는 팬들이 매혹되지 않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에이리스도 왠지 궁금해져서 얼굴을 스마트폰에 조금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 이브 여러분, 사랑해요. ]
그런 멘트와 함께, 에르제가 다시 한번 카메라에 대고 윙크를 날렸다.
엔딩 요정 때 앙코르를 외치던 팬들의 요청을 여기서 들어준 것이다.
다만…… 그건 이브들이 보고 있었을 때의 얘기고.
“헙.”
에이리스는 그대로 스마트폰을 집어 던지고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지금 내가 본 게 뭐지? 그 위엄 넘치고 빈틈없던 에르제가 맞나?
데뷔 초, 키스 날리기 영상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실제로 인간들을 매혹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행위니까.
하지만…… 한쪽 눈 깜박 감기라니.
카테이아 대륙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끼리만 할 수 있는 행위였다.
고개를 뒤로 돌리니, 그녀와 함께 카테이아 대륙에서 넘어온 아칸 또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드, 방금 그건…….”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잘못 본 것 같구나. 기억에서 지워야겠어.”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흔든 에이리스는 멀리 떨어진 스마트폰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라버니 구경은 여기까지 하고.”
저 꼴을 보니, 이쪽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하나도 모르는 모양이다.
“슬슬 1장로를 제물로 바쳐서 대악마를 강림시킬 거야. 다른 뱀파리스들에게는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바로 일을 시작해.”
“!”
아칸은 대악마란 말에 흠칫, 몸을 떨었다가 이내 허리를 숙여 그녀의 명령을 받들었다.
“빠르게 준비 끝내 놓도록 하겠습니다.”
에이리스가 나가 보라며 휘휘 손을 저었고, 아칸은 그 명령에 따라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