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3화
243화
“제이.”
에르제는 자신을 잡아끈 남자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에이리스를 피해 도망 다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는 어떻게?
‘설마 다시 에이리스에게 붙은 건가?’
제이의 기억은 이미 지워진 상태. 그렇다면 에이리스에게 다시 복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었다.
예전에 자신과 계약을 맺고도 대마녀에게 따로 접촉했던 제이이지 않은가.
심지어 기억까지 지워진 마당이니, 에이리스에게 다시 붙었다고 하더라도 배신이라고 여기지도 않을 터였다.
‘근데…… 그게 가능한 일이었나.’
에이리스가 혈석을 빼앗긴 제이를 용서하는 일 말이다. 그만큼 에이리스에게 제이라는 존재가 중요했던 걸까.
에르제는 신중한 표정으로 제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에르제를 뒤로 잡아끄는 중이었다.
“잠시…….”
에르제의 시선을 받은 제이는 머뭇거리며 눈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의 눈짓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비어 있는 대기실 하나가 보였다.
“……저기로 가자는 얘기인가요?”
끄덕, 제이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유는…….”
“…….”
여기서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인 건가. 어차피 지금 주변에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일단은 어쩔 수 없나.
제이가 에이리스의 휘하에 다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을 이렇게 따로 찾아온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에이리스의 하수인으로 자신을 찾아왔어도 그녀가 전할 말이라면 들어 두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럼, 잠시만요.”
에르제는 빠르게 멤버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서 윤치우를 붙잡아 세웠다.
“나, 잠시 선배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선배님?”
윤치우가 에르제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에는 초조해하는 제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제이 선배님.”
“응.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알았어.”
“먼저 가 있어.”
윤치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제는 다시 제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냐는 말이 제이의 입에서 다시금 초조한 기색으로 흘러나왔다.
“먼저 가 있으라고 했어요.”
에르제의 대답에 안도한 제이는 앞장서서 대기실로 향했다.
자신을 찾아오기 전에 이미 확인을 했던 모양인지 대기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확실히 하는 게 좋으니.”
에르제는 혈기를 손바닥 끝에 모아서 대기실 벽면에 흩뿌렸다.
“……아.”
눈을 빨갛게 물들인 제이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혈기를 보며 감탄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소리를 차단하는 술법과 대기실 문의 존재감을 낮추는 술법을 걸어 두었어요. 술법에 면역력이 있는 인간이 아니라면, 이 방에 들어오는 일은 없을…….”
벌컥.
에르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살짝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아, 미안!”
윤치우는 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표시를 한 후 서둘러 할 말을 전했다.
“수상 시간도 있으니까 너무 길게 얘기하면 안 된다고 말해 주려고. 다른 건 몰라도 디지털 음원 본상 수상이 있으니까.”
“여유가 얼마나 있는데?”
“한…… 30분 이내면 좋을 것 같아. 우리가 초반에 무대를 해서 그나마 시간이 있는 거야.”
“알았어. 금방 갈게.”
윤치우는 오케이, 라고 대답한 후 문을 닫고 나갔다.
고개를 돌리니 제이가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러고 보면 윤치우는 술법에 면역이었지.’
예전에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는 술법을 썼을 때에도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던 기억이 있다.
에르제는 고개를 저으며 제이에게 말했다.
“술법에 면역이 있는 인간이 윤치우라서.”
“……그렇습니까.”
제이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대기실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지 않은 듯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심호흡을 한 제이가 입을 열었다.
“에이리스는 1장로를 잡으러 떠났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겠죠.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까.”
제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에이리스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녀에게 제 존재가 필요하지 않은 거겠죠.”
그의 말에 에르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럼 에이리스의 밑으로 들어간 게 아니었나.’
계속 숨어 다니다가 에이리스의 정신이 1장로에게 쏠린 틈을 타서 인간 세계로 다시 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위험을 굳이 무릅쓸 필요는 없을 텐데.
에르제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제이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오늘 당신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겠죠.”
“의문이 들기는 하네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계속 숨어 있으면 조만간 어느 쪽이든 결판이 날 텐데.”
에르제는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에르제가 그와 관련된 기억을 지운 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에이리스에게 자신의 계획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제이가 앞으로는 LAK의 리더로서 계속 아이돌 활동만을 하며 살기를 바라서였다.
뱀파이어니 뱀파리스니, 그런 것들은 자신과 에이리스의 싸움이 끝이 나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굳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제이를 전쟁터에 밀어 넣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토트윈에게는 LAK라는 자극제가 계속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제이는 에르제와는 생각이 다르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제게 남는 것은 뭡니까?”
“남는 게 꼭 필요하나요?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
제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연관이 있지 않습니까.”
“!”
“내 기억을 지운 거, 에르제 당신이잖습니까.”
그걸 어떻게? 에르제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계속 의문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내 기억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인지, 왜 정신을 차린 순간 1장로에게 혈석을 빼앗긴 상태였던 것인지.”
“…….”
“이 사실을 에이리스에게 말하고 안전해질까, 그런 생각까지 했단 말입니다.”
화를 억누르는 제이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만약, 의도적으로 내 기억을 지운 거라면,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제이의 눈이 천천히 에르제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에이리스와 1장로가 싸우도록 부추긴 후 약해진 세력을 집어삼킬 집단은 어디일까?”
제이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마치 스스로를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무기력하게 숨어 있는 동안, 가장 좋았던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생각할 시간이 넘치도록 많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다는 뜻인가요?”
“기억을 다시 돌려 놨으면 좋겠는데.”
제이의 눈이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소속은 뱀파리스라는 듯이.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게 선배님에게 무슨 이득이 되죠?”
에르제는 일부러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생각은 여전했다. 제이가 이 전쟁터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처럼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변해 있을 거예요. 더 이상 숨을 필요도 없고, 선배님이 좋아하는 아이돌 활동도 계속할 수 있어요.”
“……나는 아이돌 활동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제이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고는 간절한 눈빛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1장로에게 혈석을 빼앗기도록 계획한 것, 그거 네가 한 짓이잖아. 그리고 나도 동의를 했던 거 아니야? 네 계획에 동참했던 거 아니냐고!!”
간절함은 분노로, 그리고 고통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고 고통스러운 건지 에르제는 도통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죠?”
“……뭐?”
“왜, 죽음을 스스로 찾아가느냐는 말이에요.”
에르제는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제가 기억을 돌려놓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그건…….”
“어려울 겁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느리지만, 확실한 거절 의사의 표시였다. 에르제는 몸을 돌렸다.
“당신의 역할은 거기서 끝났어요.”
“X발.”
문고리를 잡는 에르제의 등 뒤로 묵직한 욕설이 꽂혔다.
“결국엔 네 계획대로 될 거 다 알고 왔어, 나는.”
통찰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기억이 없는 이상 자신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예측할 수 없으리라.
손에 힘을 주자 문고리가 비틀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제이가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원해서 뱀파리스가 된 적 없어.”
조금씩 열리던 문이 다시 닫혔다. 어느새 다가온 제이의 손이 문을 막고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보랏빛 눈동자가 에르제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나도 나를 이렇게 만든 에이리스의 마지막을 확인할 자격이 있다고.”
“그러기에는 에이리스의 밑에서 꽤나 많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던가요?”
그 말에 제이가 자조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는 ‘저 인간을 죽여. 아니면 널 죽일게.’라는 로드의 말에 어떻게 반응할 건데?”
제이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없었다. 그저 생존을 위해 쌓은 업보가 무겁게 얹혀 있을 뿐.
“그런데도 웃긴 게 뭔지 알아? 인간을 죽여도, 동족을 죽여도 아무런 느낌도 없어. 끔찍한 감각이 손에 남아 있는데, 그걸 보고도 나는 웃고 있어.”
그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적어도 나를 이렇게 만든 뱀파리스는…… 내 손으로 죽이게 해 달라는 말이야.”
“……!!”
에르제는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그제야 제이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 말이다.
“……인간이 되고 싶은 건가요?”
“그래.”
제이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뚝뚝 대기실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니까, 부탁할게.”
“……당신을 뱀파리스로 만든 게 누구죠?”
조금은 또렷해진 제이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1장로.”
“…….”
에르제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에이리스였다면, 조금 고민을 했을 것이다. 숙주를 죽인 뱀파리스는 최종적으로 마지막 선택을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1장로라면 어떠한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상관은 없다. 그저 그 선택에 따른 자신의 대처가 달라질 뿐.
“에이리스가 1장로를 죽이기 전에 손을 써야겠군요.”
계획이 조금 변경되기야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유일한 변수는 서은우이겠지만.’
녀석은 어차피 이 몸만을 노리고 있을 테니.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에르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요.”
“!!”
제이의 손이 잘게 떨렸다.
에르제는 그런 손을 잡아 그를 대기실의 긴 소파로 이끌었다.
제이를 소파 위로 눕힌 에르제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오래 안 걸릴 거예요.”
제이가 곧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끄윽……!”
제이의 신음과 함께, 에르제의 손에서 나온 혈기가 제이의 이마에 닿아 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