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242화
무대가 종반으로 향할수록 토트윈 멤버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루비다이아와 끝까지 이야기했던 그것. 바로 엔딩 요정 포즈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율동 수준의 안무와 함께 곡은 마지막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강해지는 드럼 소리와 일렉기타, 록으로 편곡된 강렬한 사운드가 서서히 고조되어 갔다.
― 거짓말할 필요 없어.
네 눈빛만 봐도
다 보이니까.
매혹적인 에르제의 목소리 위로 하얀의 목소리가 얹혔다.
가요제전에서 망친 무대를 마치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에르제의 목소리가 더욱 강하게 울렸다.
2옥타브 후반을 지나 3옥타브의 도.
웬만한 남자 가수들에게는 힘든 음역대를 자유롭게 소화하던 에르제가.
탁!
오른발을 구르며 앞으로 조금 나왔다.
― 너를 쫓아
나는 Chaser―!
음계가 더 위로 올라갔다.
3옥타브의 미. 쨍한 에르제의 목소리가 무대 위에 크게 울려 퍼지고, 이번에는 태현우가 그 뒤를 보조했다.
낮은음으로 화음을 쌓은 태현우가 팔을 아래로 두 번 내리쳤다.
쿵쿵! 동시에 세게 때리는 드럼 소리.
무대에 서 있는 토트윈과 루비다이아도, 이를 지켜보는 다른 가수들과 관객석 사람들까지.
모두 한껏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크게 환호성을 지른다.
와아아아아!!
더 이상 흘러나오는 음악은 없었지만, 텅 비어 버린 공간을 그들의 함성 소리가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잦아들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토트윈과 루비다이아의 마지막 모습 덕분이었다.
턱을 아래로 끌어당긴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윤치우.
반대로 하늘 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사선으로 비껴 내린 민주혁.
브이 자를 뒤집은 채 코앞에서 흔들고 있는 안단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입꼬리를 씩 올리고 있는 태현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문 에르제가 오른쪽 눈을 깜빡 감았다가 떴다. 이어서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웃는 그의 모습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비쳤다.
한때 카테이아 대륙에서도 먹혔던 윙크였다.
“후욱, 후욱.”
안무보다는 노래 때문에 거칠어진 멤버들의 호흡이 무대에 서 있는 이들에게도 조금씩 들려온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정한 엔딩 포즈를 스크린에 모두의 모습이 비쳐질 때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더욱 커진 함성 소리가 그들의 위로 마치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와, 죽을 뻔!!”
백스테이지로 내려오자마자 안단테는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부끄러워서?”
“네!!”
하여간, 이런 쪽으로는 면역력이 너무 없는 토트윈이었다.
아마 스크린에 크게 클로즈업되었으니, 팬들도 그들이 부끄러워하고 있는 모습을 눈치챘을 터.
이들 중 유일하게 뻔뻔했던 이는 에르제뿐이었다.
마지막에 팬들이 “한 번 더!”를 외쳐서 윙크를 반대편 눈으로 한 번 더 했으니 말이다.
물론 오른쪽 눈에 비해 왼쪽 눈은 윙크에 적합한 근육이 부족했는지 그저 경련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지만…….
그래도 객석의 가수들과 팬들이 좋아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니나 다를까. 태현우가 혀를 내두르며 에르제에게 말했다.
“너는 신경이 참 굵은 것 같다, 야.”
“신경 두께는 다들 비슷하지 않나?”
에르제는 농담을 다큐로 받으며 피식 웃었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태현우가 칫, 하고 투덜댔다.
“뻔뻔한 녀석!”
그러고는 그대로 장난을 치러 달려들었지만, 에르제의 기민한 움직임은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쓱 하고 피해 낸 에르제는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어 주고는 루비다이아 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윤치우는 그들의 리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늘 고생 많이 하셨어요.”
“다음에 또 같이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하하.”
에르제가 윤치우의 옆에 서자, 나머지 멤버들도 그를 따라 주르륵 도열했다.
그러고는 서로 악수를 나누면서 노고를 치하했다.
“그래도 연습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치고는 꽤 잘한 것 같아요, 그렇죠?”
어느새 토트윈의 다른 멤버들과 악수를 나누고 온 하얀은 에르제에게 딱 붙어서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요. 루비다이아가 왜 걸그룹들 중에서도 상위권인지 여실히 증명이 된…….”
“에이, 너무 딱딱하다.”
하얀이 에르제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퀸님, 저쪽 자리로 가기 전에 대기실에서 오랜만에 이야기나 좀 나눌까요?”
“아뇨.”
에르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퀸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헤헤.”
그러나 장미영에 비해 하얀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저번에도 느낀 건데, 이번이라고 뭐가 다를까.
“그럼 제가 나중에 따로 놀러 갈게요!”
“…….”
어느새 멀어지는 하얀과 루비다이아를 보며, 에르제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같이 있으면 기가 쫙 빨리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 본다.
‘내가 뱀파이어 로드이기도 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왜…… 더 상위 종족이라는 기분이 안 드는 거지.
에르제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쓱쓱 문지르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대기실로 향했다.
조금 느긋하게 멤버들의 뒤를 따라 걷던 에르제의 곁으로 윤치우가 속도를 조절해 보폭을 맞췄다.
“은우야.”
윤치우는 복잡한 심경으로 에르제를 보고 있었다.
“응?”
“그…….”
에르제가 고개를 갸웃하자, 잠시 망설이던 윤치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니는 이제 완전히 괜찮아지셔서 일상생활을 하시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으셔.”
“아, 그래?”
에르제는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가 거의 힘든 병이었는데, 완전히 괜찮아지시고…… 재발도 진행되지 않아서.”
윤치우의 목소리에 물기가 살짝 묻어 나왔다. 아마 기뻐서 그럴 거다.
“앞으로도 괜찮으실 거야. 조마조마해하지 않아도 돼.”
에르제는 확신을 담아 말했고, 윤치우는 입술을 아래로 꾹 누른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마워.”
“저번에도 말했는데, 뭐.”
“그래도…….”
윤치우는 에르제의 등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고맙다는 말 한 번으로는 부족하니까.”
에르제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들이 이렇기에 자신은 토트윈에 계속 남아 있고 싶은 거다.
카테이아 대륙에서 보았던 인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음유시인으로 활동할 때 많은 인간들과 팀을 꾸리기도 하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때 에르제의 주변에 토트윈과 같은 인간들은 거의 없었다.
그 시절, 에르제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 주었던 눈먼 소녀. 지금은 그 소녀 4명이 자신의 곁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왠지 모르게 뭉클해진 기분으로 에르제가 헛기침을 하자, 윤치우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과도 하고 싶었어.”
일전에 그가 했던 말을 과오라고 여긴 것인지 지금 그의 표정에는 죄책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뭐를?”
“예전에 은우……는 더 이상 볼 수 없냐고 말했던 거. 너도 원해서 그 몸에 들어온 건 아니었을 텐데.”
“…….”
“은우의 영혼을 다시 불러오면, 지금까지 토트윈 멤버로 함께했던 너는 사라진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너한테 은우 영혼 이야기를 꺼냈던 것도 그렇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에르제의 모습을 윤치우가 고개를 돌려 빤히 바라보았다.
“미안해.”
윤치우는 진심을 담아서 사과했다. 고작 세 글자밖에 안 되는 말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지 에르제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윤치우가 이 말을 하기까지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렇기에 에르제도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렇게만 대답했다.
윤치우의 눈이 살짝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까딱, 아래위로 움직였다.
이를 확인한 에르제는 잠시 말없이 걷다가 주먹을 꾹 쥔 채 입을 열었다.
“언젠가 가능하다면.”
“?”
“서은우, 네가 서은우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
윤치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가 이내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 아니야. 괜찮아. 진짜로.”
“나도 진짜야.”
당황한 윤치우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진 에르제가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네가…….”
이제는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윤치우의 말에 에르제가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지장이 가게 하지는 않아. 내가 생각보다 좀 이기적인 뱀파이어이거든.”
“……그래.”
쿡, 하고 웃은 윤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작게 목소리를 냈다.
“만약……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그냥 잘 지냈냐고…… 그렇게만 물어봐 줄래?”
“……그건 한 20퍼센트.”
분위기를 깨는 에르제의 말에 윤치우가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그러고는 총총걸음으로 다시 앞 대열에 합류했다.
“둘이 뭔 얘기했어여?”
늘 호기심이 많은 안단테가 물었고, 윤치우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폭을 맞춰 뒤로 왔을 때보다 그의 표정이 한결 홀가분해진 상태였다.
‘어떻게 잘…… 풀리기는 했네.’
에르제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 * *
토트윈은 혹시 모를 수상에 대비해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완전히 클래식한 정장은 아닌, 조금 가벼운 세미클래식 차림이었다.
그리고 색상 구분 없이 멤버 모두 블랙으로 맞추었다. 심플한 하얀 와이셔츠 위에 검은색 정장 재킷 그리고 검은 바지와 구두.
마치 영화제에서나 볼 법한 모습에 그들의 메이크업을 다시 손봐 주던 직원과 코디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뱀파이어 시절부터 정장만큼은 완벽하게 소화하던 에르제는 우아하고 고귀한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죽이네…….”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태현우가 에르제를 보며 감탄하면서 입을 쩍 벌렸다. 다른 멤버들도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은우는 확실히 블랙이 제일 잘 어울리네.”
“그러니까. 전에 연미복 입었을 때도 괜찮았는데, 여태 본 것 중에서 오늘이 제일 멋있다, 야.”
에르제는 멤버들의 반응에 당당히 팔짱을 끼고 웃어 주었다.
“심플 이즈 베스트.”
“……가자.”
민주혁이 먼저 고개를 돌리고 대기실 문을 열고 나갔다.
다른 멤버들도 우아한 에르제를 뒤로하고 밖으로 향했다.
“…….”
혼자 남겨진 에르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문 쪽까지 걸어가 대기실에 남아 있는 스태프들에게 품격 있는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1년 넘게 같이 일하며 익숙해진 스태프들도 똑같이 따라 해 주었다.
‘다들 품격이 높아지고 있군.’
에르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떠들며 가고 있는 멤버들의 등이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에르제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서은우. 아니, 에르제.”
누군가가 그의 오른팔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