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236화
파르만은 지서후를 따라서 곧장 토트윈의 숙소로 찾아왔다.
현재 에르제가 몰래 움직일 수 없으니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지서후는 파르만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반갑게 맞이하는 토트윈에게 화답했다.
“어서 형들한테 인사해야지?”
지서후는 눈웃음을 지으며 파르만의 등을 두들겼다.
“……안녕하세요.”
파르만은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공손하게 접어 인사했다.
“옳지! 착하다.”
지서후는 파르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현관까지 나온 토트윈 멤버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전에 더빙할 때 뵈었죠? 오랜만이에요.”
“은우랑 친하시다고 하더니 진짜였네요. 저는 은우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는데.”
“하하, 정말 친합니다. 은우가 저를 친형처럼 따르거든요.”
지서후의 말에 에르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언제?’
하지만 지서후의 민증 앞자리 숫자가 더 빠르니, 지구에서는 이런 취급을 당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은우가 동생으로 참 괜찮아요. 꼬박꼬박 존. 댓. 말까지 쓴다니까요, 아직도. 거참,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해도.”
“아, 정말요? 그럴 애가 아닌데……?”
‘은근히 즐기는 것 같은데.’
에르제는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지서후를 보며 눈을 흘겼다.
하지만 자신의 요구대로 파르만을 데리고 여기까지 와 줬으니, 하라는 대로 해 줘야지 뭐 어쩔 수 있나.
에르제는 연거푸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신나게 떠드는 지서후에게 말했다.
“서후 형, 할 말 있다고 온 거 아니었어요?”
“아 참, 그랬지.”
지서후가 손사래를 치며 능글맞게 웃었다.
“아니, 우리 조카가 은우 보고 싶다고 해서 겸사겸사 저도 같이 놀러 왔어요. 너무 급작스럽게 방문해서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놀러 오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혹시 제 사인은 필요 없는지……?”
태현우가 은근슬쩍 끼어들었으나, 지서후가 잘 커트했다.
“아, 그건 은우랑 이야기 좀 나누고 이따 받아도 될까요?”
“그럼요!”
태현우가 하하, 웃으며 물러났고, 에르제는 그제야 지서후, 파르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잠시.”
평소보다 엄중한 경계가 필요했기에 에르제는 혈기까지 끌어올려 방 안에 투명한 막을 쳤다.
내부에서 나누는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는 소형 결계였다.
“이제 됐어요.”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파르만은 하얀 맨투맨을 손으로 잡아 늘이며 투덜댔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지.”
“명분이 없었잖아요.”
지서후가 투덜대는 그를 달래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사실에 에르제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야, 이거 네 아이디어잖아!”
“제가요? 제 아이디어라고요?”
에르제가 존댓말까지 쓰며 모르는 척을 하자, 지서후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와, 바로 복수하는 거 봐.”
“평소 본인의 처신에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지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내 에르제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파르만은 왜 여기로 데려오라고 한 건데?”
그 말에 에르제는 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뱀파이어 로드, 늑대인간의 우두머리 그리고 드워프의 장로.
카테이아 대륙이었다면, 절대 이렇게 모일 수 없었을 텐데.
이것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라는 것인가.
묘한 상념에서 깨어난 에르제는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여의치 않아서.”
그는 파르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이곳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사실 그쪽이 나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거 아닌가, 파르만?”
“그렇다네.”
파르만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웬만하면 자네들의 일에 간섭하고 싶지도 않고 끼어들고 싶지도 않지만, 나와 황구 녀석의 터전이 방해받는 것은 싫어서 말이야.”
“터전?”
“왜, 그때 자네가 촬영하러 왔던 곳 말이네.”
에르제가 알바 몬스터를 찍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파르만의 말이 이어졌다.
“그곳에 웬 뱀파리스 무리들이 나타났지.”
“!”
“!!”
그의 말에 에르제와 지서후는 동시에 반응을 보였다.
“피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더군.”
파르만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두들겨 패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파르만이 형형한 눈빛으로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내가 산속에 산다고 아무 소식도 못 듣고 사는 건 아니거든. 듣고 보기만 해도 대충 흘러가는 낌새를 눈치챌 수 있다는 말일세.”
“그러면…….”
“그래. 쫓아내는 건 쉽지만, 그렇게 되면 자네들이 그자를 잡기 어려워지겠지. 그래서 내가 부득불 이곳까지 찾아온 거라네.”
그 말에 에르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황구를 그 산속에 두고 온 건가? ……근처에 뱀파리스들이 있으니, 인간은 위험할 텐데.”
“당연히 다른 거처에 가 있도록 지시했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파르만은 외형과 어울리지 않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야. 내가 이곳으로 오는 것도 시간이 좀 걸려서 말이야. 보아하니, 그들은 일정 시간마다 계속 거처를 옮기는 듯하더군.”
그것까지 눈치챘나.
역시 드워프의 장로쯤 되면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다.
‘……서은우의 부모님도 확보했으니, 이제 진짜 서은우를 끌어내야지.’
때는 되었다.
에이리스, 1장로 그리고 서은우.
그들과 얽힌 악연을 풀어낼 때가 말이다.
에르제는 서둘러 대마녀와 플랑에게 연락했다.
* * *
까득, 손톱이 나무를 파고드는 소리가 빈 전당에 울려 퍼졌다.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건지.”
왜 아직도 카얀의 소재를 찾지 못하는 건지, 에이리스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은우의 부모를 이용해 카얀이 먼저 움직이도록 만들어서 그를 공격할 명분을 얻긴 했지만, 그 뒤의 중요한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카얀…….”
그놈이 제이에게서 빼앗아 간 혈석. 그리고 그를 도와준 듯 보이는 대마녀.
‘카얀을 도와주고 있는 게 대마녀인 건가.’
에이리스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이탈자들도 계속 생기고 있는데……. 짜증 나게.’
아직도 카얀을 찾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여긴 건지 카얀에게로 넘어가는 이탈자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은우의 부모를 만나고 난 이후 잠적해 버린 제이까지.
카얀을 찾는 것이 우선순위라 제이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러는지.
에이리스는 다시금 까드득 손톱으로 의자 팔걸이를 긁어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움직일 수만 있었어도.
만약 그랬다면 카얀이고 에르제고…… 모두 별것 아니었을 텐데.
에이리스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으나,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사실 그녀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서은우와의 계약 때문이었다.
대악마로 강림한 이후, 인간의 몸에 들어간 서은우는 미친 황제로 불리기 시작했다.
모든 종족들을 몰살하고 오로지 인간만을 남기겠다는 집념으로 카테이아 대륙을 온통 들쑤셔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고 긴 전쟁에 지쳐 버린 종족들이 하나둘씩 서은우의 손에 무너져 갈 때, 카테이아 대륙의 신들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대악마인 서은우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는 없었기에 살아남은 종족들을 이곳 지구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전쟁으로 인해 바닥까지 떨어진 신앙 때문에 종족 전부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들 중 선택받은 이들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서은우는 그들이 다른 차원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더 많은 인간들을 병사로 차출했고, 제대로 된 휴식 시간도 없이 그들을 마구 굴렸다.
그리고 무리한 전략은 언뜻 보기에 성공한 듯 보였다.
몇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서은우가 목표로 삼았던 에르제를 죽였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하지만, 서은우는 결국 정해진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서은우 때문에 그런 운명으로 바뀌어졌는지도 모른다.
에르제는 자신의 종족들을 지구로 보냄과 동시에, 그 또한 신의 선택을 받아 ‘지구의 서은우’의 몸에 들어오게 되었으니까.
당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서은우는 크게 분노했다. 미친 황제라는 이명에 걸맞게 진정 광인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날 다시 찾아왔었지.’
유일하게 서은우의 공격권에서 벗어나 있던 에이리스에게 대악마이자 미친 황제가 찾아온 것이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금발 사이로 그의 흰자위가 드러났다.
― 지구로 가서 내가 넘어갈 발판을 마련해 놔.
그런 명령과 함께.
하지만 에이리스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이미 다른 종족들과 에르제는 지구로 넘어간 상태이고, 그들을 혼자 상대하며 지구에 대악마를 강림시키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으니까.
― 그렇다면 다른 뱀파리스 녀석들도 살려서 보내 줄게. 대신, 대가가 필요하지만.
그 대가가 자신의 다리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지구로 온 뒤였다.
물론 로드의 힘을 다리 위에 덧씌우면 움직이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런 짓을 하면 힘의 소모량이 너무도 컸다.
에이리스가 에르제와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것을 피해 온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처지. 그게 현재 그녀의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빨리 카얀을 이용해 서은우를 강림시켜야 하는데.’
서은우를 이곳으로 강림시키는 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닌 악마와의 거래 때문.
그가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야지만 거래가 종료되니, 그때가 되면 자신도 다리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총애하는 대악마와 함께 이 지구를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터.
그녀가 바라 왔던 뱀파리스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란 희망에 부풀었다.
쓸데없이 숫자만 많은 인간들을 발아래 두고, 온 세상을 지배하는…….
에이리스는 하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힘의 소모가 크더라도 직접 움직여야 하나.’
그녀가 진지하게 못난 부하들에 대한 아쉬움을 크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벌컥, 허락도 없이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꿈틀.
그 무엄한 작태에 에이리스의 눈썹이 꿈틀댔으나.
‘들어 보고 판단한다.’
그녀는 인내심으로 분노를 억눌렀다.
“로드!! 에이리스 님!!”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지?”
싸늘한 에이리스의 말에 허겁지겁 달려온 뱀파리스가 순간 움찔했으나, 이내 미소까지 지어 가며 입을 열었다.
“로드께서 명하신 1장로 카얀에 대한 소재를 확인했습니다!”
“!”
에이리스는 손가락을 튕기며 다급하게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카얀은 어디에 있나?”